034화.
금방이라고 했으니까
송하견과 걸음을 옮겼다. 모닥불에서 멀어지니 찬 공기가 피부에 바로 닿아 왔다.
나를 흘끗 본 송하견이 내 어깨 위로 담요를 부드럽게 덮었다. 포근하게 감기는 담요가 따뜻했다.
방어 마법을 꽤 넓게 두른 것 같았다. 나름 멀리 온 것 같은데. 고개를 뒤로 돌려 보니 타오르는 불길이 저 멀리 조그맣게 보였다.
모닥불에서 멀어졌음에도 주변이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다. 송하견이 공중에 띄우고 있는 상자에서 빛이 흘러나와서 주위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드문드문 풀이 자라 있는 흙길과 옆으로 빼곡하게 선 큼지막한 나무가 시야에 담겼다.
새까만 숲이었다. 주위를 밝히는 연한 빛도 그 안에 담기지 못한 채 표면에서 흐릿하게 맴돌았다. 마치 어둠과 빛이 서로 섞일 수 없다는 것처럼.
‘어떻게 여기에 숲이 생긴 걸까.’
빛 한 점 없는 곳에 어떻게 식물이 자랄 수 있지? 나무도 풀도 표면은 말라 보였지만 완전히 시들어 있지는 않았다.
아니, 그 전에 더 이상한 게 있었다. 애초에 어떻게 항상 밤인 장소가 있을 수 있지?
“하견 형. 여기에는 왜 해가 뜨지 않아요?”
“…너는, 궁금해하는구나.”
잠깐 생각하던 송하견이 한 손을 들어서 내저었다. 허공에 빛으로 그려진 지도가 생겼다. 몇몇 부분에 색칠된 표시가 있었다. 지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송하견이 입을 열었다.
“…뒤틀린 듯한 장소들이 있어.”
해가 뜨지 않는 숲, 하늘에서 꽃이 쏟아지는 평원, 내내 비가 내리는 사막.
그러나 누구도 이런 장소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고 했다. 송하견 자신도 용사 서약을 맺은 이후에야 이런 장소들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인식했다고 한다.
라엔도, 민주혁도, 박율 역시도 마찬가지로 용사가 된 이후에 알아챘다고 한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계속 연구하는 중이라며 혼잣말처럼 내뱉은 송하견이 손을 살짝 까딱였다. 지도가 빛 알갱이로 변하며 서서히 흩어져 갔다.
눈앞에서 빛 알갱이가 찬찬히 사그라들었다. 이와 반대로 내 머릿속에는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복잡하게 튀어 올랐다.
내가 용사가 아닌데도 이 장소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아마 시스템 때문일 것이다. 이유가 될 만한 것은 그것밖엔 없었다.
‘그런데 왜?’
대체 이 모든 것들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조각난 정보가 묘하게 이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시스템이 내게 말한 건 한 가지였다. 내가 가진 힘으로 세상을 구해 달라는 것.
내가 가진 힘이라는 건 치료 스킬을 말하는 거겠지. 그리고 세상을 구한다는 건 균열을 닫고 있는 용사들을 치료해서 돕는 일일 것이다. 간접적으로나마 일조하는 것일 테니까.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나? 용사들만 비정상적임을 인식할 수 있다는 뒤틀린 장소가 존재하는 이유는 뭐지?
시스템은 나에게 지금 뭘 말하지 않고 있는 걸까.
흩어지던 빛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그럼에도 어쩐지 눈앞에 한참 동안 잔상이 남은 것 같았다.
◇
“…여기까지.”
잠시간 더 걷다가 송하견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부드러운 동작이었으나 닿아 오는 손길에서 단단함이 느껴졌다. 걸음을 멈췄다.
“선이한. 보여?”
보였다. 몇 걸음 떨어진 바닥에 연하게 빛나는 선이 이곳을 빙 둘러싸며 그어져 있었다.
“여기는 넘어가지 마.”
방어 마법의 경계인 듯했다. 나도 굳이 안전한 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말없이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송하견과 시선이 바로 맞았다.
“혼자서는, 나가지 말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나가고 싶으면 말해.”
같이 가 줄 테니까, 하고 송하견이 말을 마쳤다. 앞으로도 나가고 싶은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공기가 시원했다. 이렇게 걸으니까 좋았다. 어쩌면 나는 산책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전에 있을 때는 이렇게 마음 편히 걸을 기회가 없었으니 몰랐다.
방어 마법의 경계선도 확인했으니 이제는 돌아갈 때였다. 지체하지 않고 등을 돌려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정확히는 걸음을 옮기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띠링, 하고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돌발! 퀘스트> 나 홀로 용기 있는 한 걸음!
성공 시: 용기 있는 한 걸음(1회) 획득
실패 시: 1일간 걷지 못함 페널티
옅게 빛나는 푸른색의 빛이 점점이 이어진 모양새로 떠올랐다. 허공에 주욱 그려진 빛은 방어 마법 경계선의 밖으로 이어져 있었다.
실패 페널티가 살벌했다. 용기 있는 걸음을 옮기지 않을 거라면 아예 걷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건가? 이 정도면 그냥 등 떠미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기한이 딱히 없는 걸 보니 당장 해야 하는 퀘스트는 아닌 것 같았다.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고 발걸음을 마저 떼는 순간.
퀘스트를 포기하시겠습니까?
자동 실패까지 남은 시간: 5
자동 실패까지 남은 시간: 4
잠깐, 잠깐. 걸음을 다시 뒤로 돌렸다. 줄어들던 숫자가 멈췄다. 착잡했다. 솔직히 이건 좀 심했다.
“선이한?”
옆에서 송하견의 목소리가 들렸다. 멈춰 선 내 앞으로 송하견이 다가왔다. 고개를 숙인 송하견이 내게 시선을 맞춰 왔다. 옅은 걱정이 전해져 왔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 곧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견 형. 이 너머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왜?”
송하견이 멍하니 물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내 머리에 손을 살짝 올리더니 두어 번 도닥였다.
“아니야. …나중에 말해 줘.”
가자, 그렇게 덧붙이며 송하견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고마워요, 형.”
진심이었다. 송하견은 가볍게 말했지만 나는 그게 쉬운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마법도 쓰지 못하고 이 너머는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물론 나는 시스템 덕분에 괜찮을 테지만 송하견은 그걸 모르니 신경이 쓰일 것이다. 안 그래도 다들 바쁘고 피곤할 터였다. 적어도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미약한 죄책감이 마음을 짓눌렀다. 그러나 미안하다는 말을 전할 수는 없었다. 사과에도 자격이 필요했으니까.
내가 미안해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을 거라면 사과할 자격이 되지 않았다. 결국 내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말일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송하견이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
뭐가? 순간 내가 생각을 뱉었나 싶어 흠칫했다.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송하견이 괜찮다는 게 뭔지 모르겠다. 같이 갈 테니 괜찮다는 건지, 내가 아무런 설명 없이 나가고 싶다고 말해도 괜찮다는 건지. 아니면 또 다른 건지.
그래도 어쩐지 아주 조금 괜찮아진 것 같기는 했다. 그게 뭐든.
사람이 이렇게 이기적이다. 별 의미 없는 말일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약간이라도 놓이는 걸 보니까.
송하견의 단정한 얼굴이 시야에 담겼다. 언제나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는 송하견의 옆에서 나도 발걸음을 맞췄다.
경계선 밖에도 나무가 빼곡했다. 눈앞에 이어진 빛의 길이 선명했다.
‘여기다.’
빛이 한자리에서 수직으로 위쪽을 향해 쭉 뻗어 있었다.
커다랗고 두꺼운 나무가 있는 곳이었다. 빛이 그 꼭대기에서 끊긴 듯했다. 숨을 깊게 내쉬었다. 마음이 조금 진정됐다.
품에서 부유 마법이 담긴 종이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송하견에게 나무에 올라가야 한다고 침착하게 설명했다.
송하견은 처음에는 위험하다며 반대의 뜻을 조금 비치는 듯했으나 내가 생각을 굽히지 않자 결국은 승낙했다.
같이 가 주겠다는 송하견에게 고개를 저었다. 퀘스트를 보면 어차피 나 혼자 해야 할 일이었다.
“금방 다녀올게요.”
뭔가 더 말하려고 하는 송하견에게서 시선을 떼고 지익, 종이를 찢었다. 몸이 둥실 떠올랐다.
발 디딜 곳이 없다는 건 이상한 느낌이었다. 꼭 바람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나무를 따라 쭉 이어진 빛은 한참을 더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순간, 뚝 끊겨 있었다.
도착이었다. 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 홀로 툭 튀어나와 있는 굵직한 나뭇가지가 있었다. 그 위로 조심스럽게 올라섰다. 사방이 바람도 없이 고요했다.
두 발을 모두 딛고 섰는데 퀘스트에 성공했다는 상태 창이 뜨지 않았다. 저 빛 끝까지 손이 닿아야 하는 건가? 까치발을 들면 간신히 닿을 거리였다.
옆의 나무 기둥을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그쪽으로 천천히 손을 뻗어 올리는데,
퐁.
순간 맑은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적막 속에 울려 퍼진 소리가 섬뜩할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손끝에 얇은 장막을 통과하는 듯한 느낌이 났다. 하늘이 잠깐 일렁인 듯했다.
이게, 뭐야?
급히 손을 빼냈다. 귓가에 한 번 더 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온도조차 느껴지지 않는 묘한 감각이 손을 다시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화악.
빛으로 죽 이어진 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어둠이었다. 위도, 아래도, 옆도. 무엇도 보이지 않는 텅 빈 공간에 남겨져 있었다.
다리에 힘이 살짝 풀렸다. 찰나였다. 그러나 까치발을 들고 있어서였을까.
‘아, 잠깐만.’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선득한 감각이 느껴졌다. 찬 바람이 귓가를 세차게 때렸다. 정신을 차릴 새가 없었다. 떨어지는 와중에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떴다.
<돌발! 퀘스트> 나 홀로 용기 있는 한 걸음, 성공!
성공 보상으로 ‘용기 있는 한 걸음(1회)’를 획득하였습니다.
이걸? 지금 보여 줘? 암담함에 눈을 꾹 감았다. 몸이 땅에 떨어지는 건 무슨 느낌일까. 별로 좋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실했다. 송하견이 걱정이었다. 너무 놀라지 않아야 할 텐데.
…그래서 지금. 바닥까지 얼마나 남았지?
생경한 충격을 예감하며 몸을 굳힐 무렵,
“선이한!”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다.
몸이 떨어지는 속도가 느릿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눈을 슬쩍 떴다. 주위가 은은하게 밝아져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풀 향기. 익숙한 향이었다. 어느새 나는 송하견의 품에 안겨 있었다.
따뜻했다. 아니, 뜨거웠다. 너무 뜨거운 온기였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쿵쿵 뛰었다. 여전히 나를 안고 있는 송하견의 얼굴이 시야에 뿌옇게 담겼다.
숨을 들이켰다. 지금 이렇게 멍하게 있어서는 안 됐다. 더 놀란 건 송하견일 테니까, 뭐라도 말해서 안심시켜야 했다.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을 송하견에게 애써 웃어 보이며 목소리를 냈다.
“…금방 다녀왔죠?”
아, 이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