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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33화 (33/150)

033화.

여기는 항상 밤이지만

순식간에 잠든 선이한은 여전히 하얀 얼굴로 조용히 누워 있었다. 박율은 그 옆에서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찬찬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길게 이어졌던 생각을 잘라 내듯 끊었다. 밖에서 말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다들 돌아온 것 같았다. 이제 나갈 때였다.

사락.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 박율이 텐트 밖으로 나갔다. 찬 공기가 텐트 안으로 순간 밀려 들어왔다가 흩어졌다.

밖은 여전히 완연한 어둠이었다.

“이한이, 방금 잠들었어.”

이어지는 박율의 말에 라엔은 흔들리는 눈으로 선이한의 상태를 확인했다.

선이한의 이마를 쓸어 올린 라엔은 침대 바로 옆으로 작은 탁자 하나를 소환했다. 그러고는 그 위에 따뜻하게 데운 물과 컵을 올려 두었다.

민주혁은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 주고 선이한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을 매만지던 민주혁이 폭신한 장갑을 공중에 만들어 냈다. 하얀 장갑은 엄지손가락만 따로 끼우고 나머지는 함께 끼게 되어 있었다.

“야, 선이한. 이번에는 깨자마자 치료 마법 쓸 생각하지 마.”

민주혁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창백하게 질린 선이한의 손을 감싸듯이 장갑을 끼웠다. 넉넉한 크기의 장갑이 솜처럼 부드럽고 가벼웠다.

송하견은 잠든 선이한을 말없이 눈에 담다가 침대 머리맡에 약초 주머니 하나를 묶어 두었다. 풀꽃 향기가 주위로 퍼졌다. 그리고 송하견은 가장 마지막으로 텐트를 나섰다.

선이한이 잠에서 깬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였다.

눈을 떴다. 공기가 훈훈했다. 주위가 은은하게 밝았고, 옅은 풀 향기가 났다. 그리고 나는 이불에 푹 파묻힌 채 누워 있었다.

‘아주 가지가지 하네….’

몸이 개운했다. 그래도 이런 개운함은 싫었다. 이렇게 끊어지듯 잠들었다 일어나는 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이제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며칠 밤을 새는 것도 거뜬했는데. 갑자기 왜 체력이 이렇게 바닥나 버린 걸까. 운동이라도 해야 하나? 지금까지는 그런 거 없이도 괜찮았는데.

옆에서 치료하기 막대 게이지가 깜빡였다. 붉은빛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래, 마지막으로 확인한 게 이거였다. 치료하기 게이지 비워 내기 튜토리얼. 그리고 박율한테 피 토하는 걸 보였었지.

다시 생각해도 아찔했다. 다음부터는 아무도 보지 못할 곳으로 떨어진 후에 비워 내기를 해야 했다.

‘일단 밖으로 나가 봐야겠네.’

나가서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바로 옆의 탁자 위에 물 잔이 올려 있었다. 그쪽으로 손을 뻗는데, 손에 끼워진 하얀 장갑이 보였다.

웬 장갑? 느낌이 안 나서 있는 줄도 몰랐다. 가만히 손을 쥐었다 폈다. 손에 닿는 천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걸 왜 내 손에 끼워 놓고 간 거지?

‘뭔가 이유가 있나?’

혹시 모르니 물어보고 벗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뭔가 마법을 걸어 놓았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그런 것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신중해야 했다.

탁자에 놓인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신 후에 텐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입구의 천을 걷어 냈다. 찬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밖이 깜깜했다. 멀리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옆으로 통나무에 앉아 있는 인영이 보였다.

‘하견 형?’

단정하게 묶어서 내려뜨린 머리칼에 모닥불의 빛이 어른거렸다. 작은 움직임도 없이 고요하게 자리에 앉은 송하견에게 걸음을 옮겼다.

모닥불은 텐트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가깝지도 않았다.

내가 거의 근처로 다가갈 때까지도 송하견은 알아채지 못했다. 가만히 보니 노트에 느릿하게 글자를 적고 있는 것 같았다. 지도처럼 보이는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바빠 보이네.’

그렇게 생각하며 한 걸음을 더 옮긴 순간, 송하견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송하견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선이한.”

노트를 빠르게 덮은 송하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내 어깨를 단단히 감싸 쥐었다. 눈을 깜빡하는 사이에 나는 송하견이 앉았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채였다.

“불편한 데는, 없어?”

박율 형에게 들었다며 말을 잇는 송하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송하견은 내 바로 앞에 가만히 서서 나를 내려다봤다. 걱정이 얼핏 보이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항상 괜찮았고, 괜찮지 않은 건 당신들이었다. 지금껏 이 생각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지겨울 정도였다.

송하견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물어볼 것이 있었다.

“맞다, 하견 형.”

“선이한. 너 저번에도….”

아, 말이 겹쳤다. 내가 말을 꺼내는 동시에 송하견이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계속 말하라는 뜻으로 송하견을 바라봤는데 송하견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내가 먼저 말하기로 했다. 송하견에게로 양손을 살짝 내밀며 말을 이었다.

“벗어도 돼요?”

내 본분을 다해야 했다. 송하견에게 치료하기를 써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려면 장갑을 벗어야 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처음으로 치료했던 상대가 송하견이었다. 그때는 옷 위로 손이 닿아도 상태 창이 떴는데, 그 이후로는 살갗이 직접 닿아야만 상태 창이 생겨났다.

왜지? 처음이라 좀 느슨하게 봐준 건가. 뭐, 별로 상관은 없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한참을 생각하고 있는데 송하견은 여전히 내 질문에 답이 없었다.

“…하견 형?”

송하견이 눈을 조금 크게 뜬 채 내 얼굴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리에 가만히 굳어 있는 채였다.

순간 옆에서 센 바람이 불어왔다. 모닥불의 불길이 이쪽으로 훅 넘어왔다. 뜨거운 열기가 가까이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나를 바라보는 연한 보랏빛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린 것 같았다. 이 장갑, 벗으면 안 되는 건가?

이번에는 팔을 쭉 뻗어서 송하견의 바로 앞으로 흔들었다. 송하견의 시선이 그쪽으로 천천히 옮겨졌다.

눈을 몇 번 깜빡이던 송하견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내 손목을 가볍게 쥐고 장갑을 부드럽게 벗겨 냈다. 힘주어 잡지 않았는데도 닿아 오는 손길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송하견이 장갑을 가지런히 모아서 내 손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응. 벗어도 돼.”

……이게 그렇게 오래 생각할 일이었나? 뭐, 송하견이라면 그럴 수 있었다. 항상 속도가 느린 편이었으니까. 그래도 그게 싫지는 않았다.

품에 장갑을 넣고 다시 송하견의 손을 잡았다. 단단하고 차가운 손가락이 감겨 왔다. 어쩌면 장갑을 끼고 있었던 내 손이 뜨거운 것일 수도 있었다.

눈앞에 떠오른 상태 창을 바라보며 치료하기를 선택했다.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송하견이 급하게 손을 뺐다. 그러나 이미 치료는 끝난 뒤였다. 내게로 흡수되는 빛을 눈에 담던 송하견이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말했다.

“나한테는 안 해도 돼.”

먼저 치료해 달라고 말해도 모자랄 텐데 왜 그렇게까지 피하는 걸까. 송하견뿐만 아니라 다들 그랬다. 어지간히 큰 부상이 아니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저번에 라엔이 치료하는 것의 대가를 물었던 적이 있다. 설마 다들 치료하는 데 대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하견 형도, 형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었다. 당연했다.

“이게 내가 할 일이에요.”

“…그게 왜, 네가 해야 할 일인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할 수 있는 일은 한다. 그게 맞으니까. 처음에는 그 이유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당신들만이 세상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하는 건 싫으니까. 세상을 구하는 건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당신들이 고통받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치료하는 건 별로 무리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다쳤으면 먼저 말해 줘요, 형.”

“…무리하는 게 아니라고.”

송하견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수긍하지 못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송하견의 이런 반응은 나도 납득할 수 없었다.

“무리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형이잖아요. 다들 그렇게 쉴 틈도 없이 바쁘게 다니면서….”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 거야. 음, 박율 형은 아니지만. 그런데, 너는?”

송하견이 내게로 시선을 곧게 맞췄다. 그렇구나. 신전에서 나를 합류시킬 때 내 의사가 없었다는 걸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처음부터 오롯이 내 선택이 아니었다는 건 사실이었다. 시스템이 나타난 건 예상치도 못한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까. 모두와 함께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형.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내가 처음부터 선택했든 그렇지 않든, 그건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은 당신들을 돕는 거였으니까. 그거면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 아닌가.

“중요한 건 지금이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

송하견은 말을 더 잇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에 잠긴 것처럼 고요한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하는 걸까.

숨을 깊게 들이켰다. 차가운 공기 속에 모닥불의 열기가 묘하게 스며 있었다. 차갑기도 하고 동시에 뜨겁기도 했다. 서로 다른 온도가 모두 선명했다.

아직 주변이 깜깜했다. 아마 계속 그럴 것이다. 여기는 항상 밤일 테니까. 그래도 저 밖으로는 하루하루 해가 뜨고 있을 터였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꼭 모든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밤이었다. 멀리서 해가 떠오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깊은 밤.

타닥거리며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한참을 말없이 있던 송하견이 생각을 다 정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숲을 돌아보고 왔을 때 균열이 열려 있었다고 한다. 오래 방치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빨리 처리해야 했기에 다들 이동했다고 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내 모습을 송하견이 말없이 눈에 담았다. 내 상태를 확인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린 송하견이 입을 열었다.

“선이한. 괜찮으면, 같이 걸을까.”

흘러가듯이 지나가는 말투였다.

내가 긍정해도, 부정해도, 심지어는 아예 대답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는 듯 보였다. 물어보는 게 분명한데도 의미가 흐릿하게 전달됐다.

“같이 걸을래요.”

그렇지 않아도 주변을 한번 살펴보고 싶었다. 나중에 치료하기 게이지를 비워 낼 때 몰래 다녀올 만한 곳이 있는지 봐 둬야 했으니까.

송하견이 고개를 돌려서 내게 시선을 맞췄다. 새벽을 닮은 보랏빛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담겼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정말 괜찮으냐고 다시금 물어보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송하견이 조금 안심한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방어 마법의 경계도, 알려 줄게.”

가까이에 있는 불빛 때문인지 송하견의 모노클이 반짝 빛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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