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 (1)
은질리 국제공항 VIP 라운지.
콩고민주공화국을 방문하는 VIP들의 영접을 책임지고 있는 부투야 비서실장은 실무진과 긴급 대책 회의를 진행했다.
“캉테 국장, 우리나라를 방문할 VIP들은 이제 모두 도착했나?”
“아닙니다. 두 시간 전에 앙골라 대사관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산투스 부통령님이 오늘 오후에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부투야 비서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앙골라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다.
하여 앙골라 측에서는 자국이 주최하는 행사에 축하사절을 보내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설령 보내온다 하더라도 사절단장의 격을 대폭 낮춰서 보내오곤 했다.
당연히 자신들도 앙골라 측에 똑같이 응대하고 있었고.
그런데 이번에는 앙골라 정부의 2인자인 산투스 부통령이 축하사절단을 이끌고 자국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한다.
“캉테 국장,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네. 사빔비 앙골라 대사한테 직접 들었기 때문에 틀림없습니다.”
“흐음, 산투스 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려는 진짜 이유가 뭘까?”
“저는 일대일로 프로젝트 탈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근거는?”
“우리나라를 방문할 산투스 부통령은 제일 먼저 H&J 컨설팅의 정명훈 사장, 루퍼트 장관과 만나기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음… 그렇다는 말이지?”
“네, 실장님.”
“이제 다른 얘기를 잠깐 해 보자고. VIP들에게 답례품으로 지급할 선물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나?”
캉테 국장은 그 문제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VIP들을 위해서 답례품으로 준비한 선물은 홍삼이 함유된 건강식품이었다.
이번 바통고 대통령의 생일 축하연에 예년과 비슷한 숫자의 VIP들이 방문할 것이라 예상하고, 그 규모에 맞춰 SH무역 측에 200세트를 주문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올해는 예년에 비해서 두 배 가까이 많은 VIP들이 참석할 의사를 보였다.
그로 인해서 당장 VIP들에게 지급할 답례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
“절반 가까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큰일이네. 대책은 수립되어 있나?”
“잉가 3댐과 도로 확포장 공사 착공식에 참석하는 VIP들한테 지급할 선물을 전용하는 방안을 생각해 놓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그때, 실무자 중에 한 사람이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실장님, 제가 세 시간 전쯤에 공항 세관장한테 들었는데, SH무역에서 H&E 트레이딩에 보낸 물품들 중에 홍삼이 함유된 건강식품이 300세트가 포함되어 있답니다.”
“오호라! 그렇다는 말이지?”
부투야 실장은 반색하며 급하게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네, 부투야 실장님.]
“은센기 사장, 긴급하게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네, 물론입니다.]
“SH무역이 보내온 품목 중에 홍삼이 함유된 건강식품이 포함되어 있다고 얘기 들었는데, 어떤 용도로 사용할 예정인지 얘기해 줄 수 있나요?”
[저는 SH무역에서 보내주는 대로 수령했기 때문에 용도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정호영 이사가 잘 알고 있는데, 전화 바꿔 드릴까요?]
“그렇게 해 주세요.”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호영의 에너지 넘치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부투야 실장은 지체 없이 은센기 사장한테 했던 질문을 똑같이 던졌다.
[돌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추가로 보내 달라고 한 겁니다.]
“정 이사님, 그 선물을 저희가 사용해도 됩니까?”
[얼마든지 사용하셔도 됩니다만…….]
호영이 끝말을 흐린 이유를 파악한 부투야 실장은 얼른 말을 이어 나갔다.
“바통고 대통령님의 생신 축하연에 참석하신 VIP들에게 지급할 답례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입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은센기 사장한테 얘기해 놓겠습니다.]
“제가 직접 부탁하는 게 예의일 듯합니다.”
[옆에 계신데 전화를 바꿔 드릴까요?]
“아닙니다. 정명훈 사장님께 드릴 말씀도 있고 하니, 제가 지금 호텔로 출발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딸깍.
전화를 끊은 부투야 실장은 시선을 옮기며 캉테 국장에게 지시 내렸다.
“산투스 부통령은 캉테 국장이 나 대신 영접하라고.”
“네, 알겠습니다.”
* * *
“정 이사, 부투야 실장님이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뭔지 물어보지 그랬어?”
호영에게 통화 내용을 끝까지 들은 정명훈 사장은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부투야 실장님이 너무 조급해 보여서 여쭤보지 못했습니다.”
정명훈 사장은 고개를 돌려 김종학 지점장한테 말을 건넸다.
“김 지점장, 부투야 실장님이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무엇인지 짐작되는 게 있나?”
“아니요. 전혀 감을 잡지 못하겠습니다.”
그때, 은센기 사장이 무언가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 사장님, 제가 며칠 전에 바나투 건설장관께 얘기를 들은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빨리 얘기해 보세요.”
“우리나라의 킨샤사와 콩고공화국의 브라자빌을 연결하는 다리 건설을 위한 자금을 AFDB에서 지원받기로 했답니다. 아무래도 그 건과 관련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급히 사장님을 뵙자고 한 것 같습니다.”
“하하, 좋은 정보를 알려 줘서 고마워요.”
은센기 사장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정명훈 사장은 추성민 법인장에게 말을 걸었다.
“추 법인장, 혹시 모르니까 문세형 사장님께 미리 연락을 취해 놓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H&E 트레이딩에 이익을 후하게 쳐주고.”
지금 정명훈 사장은 고급 TV 3,000대와 최신형 핸드폰 2만 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회장님께 저희 제일 그룹의 이익을 최소로 책정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고맙고. 은센기 사장님, 얘기 들었죠?”
“언제나 저희 회사를 위해서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H&E 트레이딩은 우리 회사와 가족 같은 사이인데, 소홀히 대할 수 있나요?”
“가족 같은 사이라…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데요? 오랜만에 저희 집을 찾아온 가족한테 제가 오늘밤에 한턱내도 될까요?”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호영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은센기 사장님, 오늘밤은 H&J 컨설팅의 또 다른 가족인 제가 반드시 쏴야 하니까, 내일 부탁합니다.”
“네? 왜 그렇습니까?”
“어떤 개떡 같은 인간이 오늘밤에 거하게 쏘라고 생떼를 부리고 있는 중이라서요.”
“정 이사, 나는 그런 적이 절대로 없습니다.”
제 발 저린 겨울이 재빨리 한마디 내뱉었다.
그러나 그대로 넘어갈 호영이 아니었다.
“한 부사장님이 이곳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저한테 한 말을 그대로 읊어 줄까요?”
“증거 있습니까?”
“한 부사장님이 오리발을 내밀 것을 대비해 핸드폰에 대화 내용을 녹음했는데, 틀어 드릴까요?”
“에이, 농담을 진담으로 받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결정적인 증거 앞에 겨울은 꼬리를 내렸다.
반면,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호영은 겨울을 조금 더 밀어붙였다.
“눈감아 줄 테니까, 오늘밤에는 한 부사장님이 쏘시든가요.”
“그렇게는 못 하겠으니까, 핸드폰에 녹음되어 있는 대화 내용을 모두에게 들려주시죠.”
“커흠… 어라?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 왜 이렇게 덥지?”
불리함을 느낀 호영이 재빨리 밖으로 도망쳐 나갔다.
약 30분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부투야 실장이 정명훈 사장의 숙소를 찾아왔다.
그는 급한 마음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자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 은센기 사장에 VIP들에게 지급할 답례품에 대한 얘기부터 꺼냈다.
“…현재 이런 상황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홍삼이 함유된 건강식품이 300세트는 저희가 매입했으면 좋겠습니다.”
“부투야 실장님, 기념품 구입 비용은 대한 그룹 측에서 전액 부담한 상황입니다.”
즉, 송훈석 회장에게 부탁하라는 말이었다.
하도진 실장이 즉시 발언권을 요청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부투야 실장님, 송훈석 회장님을 불러드릴까요?”
“그러지 마시고, 저희가 송 회장님께 가는 게 어떨까요?”
* * *
같은 시각.
송훈석 회장은 문세형 대한건설 사장 등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문 사장, 중국 측이 절대로 눈치채지 못하도록 VINCH 측과 협의해서 은밀하게 자료를 수집하도록 하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저희 컨소시엄에 스페인의 ACS를 끌어들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ACS에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송훈석 회장이었다.
몇 해 전에 잉가 3댐 건설 공사 입찰에 ACS와 컨소시엄을 구성하기로 결정하고, 스페인으로 출장 가서 테베즈 ACS 회장과 MOU를 체결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입찰을 한 달 남겨 둔 시점에 ACS가 자신들의 뒤통수를 치고 중국의 CTG와 손을 잡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로 인해서 VINCH와 컨소시엄을 구성한 자신들은 CTG 컨소시엄에 밀려 거하게 고배를 마셨고.
결국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잉가 3댐 건설 공사는 자신들의 품에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테베즈 회장에게 쌓여 있던 앙금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문세형 사장이 뜬금없이 ACS를 컨소시엄에 끌어들이자고 제안하고 있는 중이었다.
“문 사장, 내가 ACS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알고 있습니다만, ACS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서동호 실장은 문세형 사장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단숨에 눈치챘다.
만약에 완커건설 컨소시엄이 철도 건설공사 프로젝트에 ACS를 끌어들이면 상황이 복잡하게 꼬일 것은 불문가지.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ACS을 아군으로 포섭하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회장님, 저도 문 사장의 의견에 적극 찬성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건설공사를 제일 많이 수행한 회사는 누가 뭐라고 해도 ACS입니다. 만약에 완커건설 컨소시엄이…….”
서동호 실장은 문세형 사장이 걱정하는 내용에 대해 자세하게 보고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기분 나빠도 ACS를 아군으로 합류시키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알아들었어. 이 문제는 H&J 컨설팅과 상의해서 결론 내자고.”
“네, 회장님.”
딩동.
그때, 초인종 소리와 함께 부투야 실장을 비롯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방문했다.
이번에도 마음 급한 부투야 실장은 빈자리에 앉자마자 VIP들에게 지급할 답례품에 대한 얘기를 꺼내며 구입 의사를 밝혔다.
“부투야 실장님, 그러지 마시고, 저희가 바통고 대통령님께 드리는 생신 선물로 갈음하면 어떻겠습니까?”
“송 회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송훈석 회장의 통 큰 결정에 부투야 실장의 얼굴은 천천히 평온을 찾아갔다.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정명훈 사장이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부투야 실장님,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송 회장님과 같이 들어도 상관없는 내용이겠지요?”
“그 말씀은 제가 어떤 말을 꺼낼지 알고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맞습니까?”
“킨샤사와 콩고공화국의 브라자빌을 연결하는 다리 공사 건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얘기는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정색하면서 묻는 부투야 실장의 질문에 정명훈 사장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은센기 사장의 이름을 언급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순발력을 발휘해서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저희는 아프리카 대륙에 매우 관심이 많아서 여기저기서 정보를 취합하고 있는 중입니다.”
송훈석 회장도 싸한 느낌을 받기는 마찬가지.
부투야 실장의 그의 엄중한 표정으로 보아, 자칫하면 다리 건설 공사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부투야 실장님, 드디어 두 나라의 수도를 연결하는 다리 건설 공사가 확정됐습니까?”
“얼마 전에 AFDB 연차 총회에서 다리 건설 공사 비용을 지원받기로 결정됐습니다.”
“두 나라의 오랜 숙원사업이 해결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하, 고맙습니다.”
“저희 대한건설이 다리 하나 만큼은 기막히게 건설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죠?”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