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마음 급한 사람들
“왜!”
[…혹시 내가 너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니?]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호영의 목소리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순간 실수했음을 깨달은 겨울은 재빨리 사과의 말을 꺼내들었다.
“하아, 아니야. 미안하다. 짜증나는 일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러는 거야?]
“글쎄 우리 사장님이 이번에 채용한 신입사원을 상대로 나보고 특강하란다.”
[하면 되잖아.]
“너는 아무 준비도 없이 신입사원들을 상대로 특강하는 게 쉬워 보여?”
[이제부터 준비하면 되지 뭐가 걱정이냐?]
“문제는 특강을 당장 오늘 2시에 해야 한다는 거지.”
[…명복을 빈다.]
순간, 기분이 확 상한 겨울이었다.
“야, 지금 나 놀리고 있는 거지?”
[커흠, 놀리다니. 친구로서 걱정해 주는 거잖아. 내 진심이 안 느껴져?]
“진심이라는 놈이 말투는 왜 이렇게 가벼운데?”
[나 참, 별거로 다 트집이네. 이제 끊자.]
“끊을 때 끊더라도 전화한 용건이나 얘기해 주고 끊어라.”
[아, 맞다. 오늘 시간 있으면 대한 그룹 연수원에 같이 답사하러 가자고 할 생각이었지. 그런데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네.]
“아니, 괜찮을 거 같은데? 말 나온 김에 오늘 같이 가자.”
[시간 괜찮겠어?]
“어. 연수원으로 가는 도중에 점심 먹을 예정이니까, 늦어도 11시까지는 우리 회사로 와라.”
[오케이. 너를 위로하는 의미로 오늘 점심은 내가 살게.]
“잘 먹을게, 친구야.”
* * *
“부사장님, 진짜로 아스날을 인수할 생각이십니까?”
운전석에 앉아 있던, 홍석훈 기사가 조심스런 목소리로 겨울에게 물었다.
“홍 기사님, 설마하니 프리미어 리그의 명문 구단인 아스날을 말씀하는 것은 아니겠죠?”
조수석에 앉아 있던 하도진 실장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부사장님, 진짜입니까?”
“네. 그럴 예정입니다.”
“와우! 대박사건.”
잔뜩 흥분한 하도진 실장의 목소리가 자동차 내부에 가득 들어찼다.
“하 실장님, 그게 그렇게 놀랄 만한 사건입니까?”
“부사장님이 프리미어 리그의 명문 구단을 인수하려고 하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마음먹었기 때문에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날 때까지는 비밀로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저도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겨울은 하도진 실장의 의도를 단숨에 눈치챘다.
아스날 구단을 인수하는 데 그도 동참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살짝 건드려 보기로 결정했다.
“뭐가 말씀입니까?”
“저도 아스날 구단을 인수하는 데 조금이나마 자금을 보탰으면 합니다.”
역시 자신의 추측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그 문제는 공동 구단주인 정 이사한테 하락을 맡도록 하세요.”
“정 이사님, 저한테도 기회를 주십시오.”
호영은 살짝 아쉬웠다.
자기와 겨울이 보유한 자금만으로도 충분히 아스날 구단을 인수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겨울은 하도진 실장의 참여를 동의하는 듯한 뉘앙스를 보이고 있었다.
최대주주가 동의하는데, 2대주주에 불과한 자기가 반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조건부로 동의하겠습니다.”
“어떤 조건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하 실장님이 책임지고 아스날 구단을 인수하도록 추진한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하하, 그 점에 대해서는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이제부터 저하고 한 부사장이 수립한 계획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호영은 아스날 구단을 인수하는 데 필요한 자금, 인수 기간, 운영 방안 등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뛰고 있는 조강석 선수를 영입하기로 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저희 둘은 하 실장님만 믿고 한발 뒤로 물러나 있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나저나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연수원인데, 맛집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연수원 밥이 그렇게 맛있더라고요.”
“아이고야.”
겨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호영 또한 마찬가지.
“한 부사장, 하 실장님의 말씀이 맞아?”
“맞기는 뭐가 맞아. 그냥 일반 식당에서 식사한다고 생각해라.”
사실, 하도진 실장이 이렇게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은 이유는 연수원에서 대한 그룹 신입사원 연수를 담당하고 있는 이종수 이사 때문이었다.
오전에 겨울과 대화를 끝내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오니, 평소 안면이 있던 이종수 이사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겨울이 연수원에 특강하러 온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며 다짜고짜 점심식사를 같이하자고 제안해 왔다.
신입사원 연수기간 동안에 제일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은 제자가 겨울이라고 말하면서.
스승이 제자를 보고 싶어 한다는데, 모른척할 수 없지 않은가.
그는 두 사람의 눈초리를 무시하고 씨익 웃으며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 걸었다.
[하 실장, 언제쯤 도착하나?]
“5분 후 정문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내가 경비실에 얘기해 놓았으니까, 그냥 통과시켜 줄 거야. VIP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곳으로 오라고.]
“이 이사님, 뭔가 있는 겁니까?”
[VIP가 오시는데, 함부로 대할 수는 없지.]
“설마하니, 한겨울 부사장님을 VIP라고 여기는 것은 아니시겠죠?”
[이 친구야, 회장님의 예비사위이면 VIP이지, 누가 VIP야.]
“그 얘기는 또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한 부사장님의 예비 매제한테 들었어. 이제 됐지?]
“아이고.”
하도진 실장이 탄식을 내뱉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와 동시에 겨울이 물었다.
“하 실장님, 지금 어떤 상황인데 그렇습니까?”
“대한 그룹 연수원 측에서 부사장님이 방문하신다고, VIP 식당에 점심상을 차려 놨답니다.”
“일이 점점 커진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뭘까요?”
“저도 부사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 * *
하도진 실장과 통화를 끝낸 이종수 이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재성 대리에게 물었다.
“이 대리, 송지유 과장이 한 부사장님과 사귀는 게 맞아?”
“아직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겁니다. 경쟁자가 곧 떨어져나갈 테니까요.”
“경쟁자가 있었어?”
“요즘 재계에 무서울 정도로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SH무역의 후계자인 정호영 이사가 한 부사장님의 경쟁자입니다.”
“SH무역이라면, H&J 컨설팅의 전략적 파트너잖아.”
“네, 맞습니다. SH무역이 우리 회사의 전략적 파트너가 될 수 있던 이유는 정 이사가 부사장님의 죽마고우이기 때문입니다.”
“아,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이제야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이종수 이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정 이사도 오고 있다고 하니까, 가급적이면 송지유 과장 얘기는 삼가는 게 맞을 겁니다.”
“그럼 하나만 더 말해 줘. 한 부사장님이 송 과장과 결혼할 것 같은가?”
“그럼요. 제 전 재산을 걸겠습니다.”
“하하하, 알겠네.”
“이제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제가 밖에 나가서 한 부사장님을 모시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야. 나도 같이 나가자고.”
두 사람이 VIP 식당 밖에 나가서 잠시 기다리니, 최고급 승용차가 스르륵 다가와서 그들 앞에 섰다.
이재성 대리가 재빨리 승용차 뒷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부사장님.”
“이 대리가 고생이 많네요.”
“대한 그룹 연수원 측에서 성심성의껏 도와주고 있기 때문에 특별하게 힘든 점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이종수 이사가 활짝 웃으며 다가와 겨울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한겨울 부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이종수 이사님, 그동안에 건강히 잘 계셨습니까?”
“그럼요. 너무 잘 있어서 탈입니다.”
“제 옆에 서 있는 친구는…….”
겨울이 이종수 이사에게 호영을 소개시켜 주는 도중에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50대와 60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르르 겨울 일행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중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는 사람이 겨울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걸어왔다.
“한겨울 부사장님, 저희 연수원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연수원을 책임지고 있는 강진우 원장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강 원장님.”
“날이 덥습니다. 다른 임원들은 VIP 식당 안에 들어가서 인사시켜 드리겠습니다.”
겨울은 그들의 황송한 환영을 받으며 VIP용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비어 있는 의자에 앉은 겨울은 묻고 싶던 질문부터 꺼내 들었다.
“원장님, 제가 이곳에 온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강진우 원장은 조금 전의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서동호 실장이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대한 그룹의 전략적 파트너인 H&J 컨설팅의 최대주주인 한겨울 부사장이 신입사원들에게 특강을 하기 위해서 연수원으로 오고 있는 중이라고 알려 왔다.
겨울이 회장님의 사위가 될 예정이기 때문에 예의를 다해서 대하라는 지시와 함께.
그때부터 직원들을 동원해서 급하게 겨울을 맞이할 준비에 돌입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 모두를 밝힐 수는 없지 않은가.
“서 실장님께 전화 받았습니다.”
“서 실장님이 괜한 일을 벌이신 것 같네요.”
“한 부사장님, 제가 여담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저희 연수원이 제일 바쁜 시기는 신입사원들이 연수를 받기 시작하는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입니다. 그 이후부터는 비교적 한가한 일상을 보내는데, 올해는 H&J 컨설팅 덕분에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저희와 SH무역의 신입사원 연수 때문입니까?”
“두 건의 연수는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하나만 예를 들자면, 올해는 저희 회사도 9월부터 신입사원 연수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즉, 예년에 비해서 신입사원들을 많이 채용한다는 의미였다.
“그 정도로 대한 그룹에 인력이 부족한 상황입니까?”
“네. 특히 전자, 건설, 제약이 많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도진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언권을 요청했다.
“원장님, 대한중공업은 인력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아직 대한중공업 측에서는 아무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다만…….”
무언가 있다고 판단한 강진우 원장은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렸다.
하도진 실장은 그의 의도를 알고 있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내용은 계약을 체결해서 언론에 알려지기 전까지는 극비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인도 해군은 중국 해군의 인도양 진출에 맞대응하기 위해서 향후 10년 동안 약 2,500억 달러를 투입해서 항공모함 2척, 이지스 구축함 5척, 미사일 구축함 6척…….”
하도진 실장은 인도 해군의 전력증강 프로젝트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현재 대한중공업의 한경수 사장님이 인도 국방부 측과 협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 실장님, 언제쯤 계약이 체결될 것 같습니까?”
“아무리 늦어도 다음 달에는 계약서에 사인할 수 있을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았습니다.”
“인도 해군이 발주하는 항공모함 등의 전함은 대한중공업이 자체적으로 건조할 수 없을 겁니다.”
“다른 조선 회사에도 일감을 나눠 준다는 말씀입니까?”
“네. 납기를 맞추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제가 이 말을 왜 꺼냈는지 이제 감이 잡히십니까?”
강진우 원장은 하도진 실장의 의도를 이제야 완벽하게 이해했다.
대한중공업이 건조할 수 없는 선박 등은 다른 조선 회사에 나눠 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그들도 부족한 인력들을 채용하려고 할 것이고, 필연적으로 우수인력 쟁탈전이 벌어지는 상황이 올 것이다.
그들보다 빨리 우수인력들을 확보하라는 의미로 하도진 실장이 이 말을 꺼낸 것이리라.
“하 실장님, 저희한테 커다란 힌트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와 대한 그룹은 가족 같은 사이인데요 뭐.”
“하긴… 하 실장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제가 한 부사장님께 VJP 식당의 음식 맛이 끝내준다고 자랑을 잔뜩 늘어놓았습니다. 제 얼굴에 먹칠하지 않도록 원장님께서 특별하게 신경 써 주십시오.”
일이 커진다고 판단한 겨울은 급하게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원장님, 하 실장이 농담한 거니까, 전혀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한 부사장님, VIP 식당의 음식 맛은 회장님께서도 인정하셨기 때문에 결코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강진우 원장은 겨울의 말을 단번에 일축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