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패키지 협상 전략 (2)
메흐타 장관은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조금 전에 겨울에게 들은 얘기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세르게이 국방장관의 입에서 그대로 흘러나왔으니까.
따라서 지금 이후에 전개될 협상 또한 겨울이 예상한 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는 겨울의 선견지명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정명훈 사장과 세르게이 장관의 대화에 집중했다.
“세르게이 장관님, 그렇게 뭉뚱그려 말씀하지 마시고, 정확한 가격 기준을 제시해 주십시오.”
“인도 측이 S―400 지대공 미사일 시스템 1개 포대와 SU―35 전투기 다섯 대를 수입해 주는 조건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수출하는 무기들에 비해서 3% 저렴하게 인도에 수출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에 인도 측이 장관님이 제안한 숫자보다 더 많이 수입하겠다면, 추가로 가격 할인을 해 줄 수 있습니까?”
세르게이 장관은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현재 자신들이 다른 나라에 판매하는 S―400 지대공 미사일 시스템 1개 포대의 가격은 평균적으로 20억 달러 선.
그리고 SU―35 전투기는 정해진 가격이 없지만, 중국에 대당 8,000만 달러가 넘는 가격으로 수출했다.
따라서 SU―35 전투기도 이 가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도 국방부는 S―400 1개 포대와 SU―35 전투기 다섯 대를 수입하기 위해서는 최소 24억 달러를 투입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 정도만 해도 적지 않은 금액인데, 정명훈 사장은 자신이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한 물량보다 더 많이 수입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운이 좋다면 50억 달러가 넘어갈 수 있는 초대형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상황.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심호흡으로 뛰는 심장을 진정시킨 세르게이 장관은 정명훈 사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정 사장님, 인도 측이 추가로 도입하기 희망하는 물량을 먼저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인도 측은 S―400 지대공 미사일 시스템 2개 포대와 SU―35 전투기 열다섯 대를 도입할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러시아 측이 제시하는 가격 조건이 매력적이라면, S―400 3개 포대, SU―35 전투기는 열다섯 대를 추가로 도입할 생각이 있습니다.”
“네?!”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세르게이 장관이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나타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명훈 사장이 언급한 물량은 120억 달러를 훌쩍 넘어가는 엄청난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정명훈 사장은 세르게이 장관의 심정을 알고 있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인도 측은 1차에 S―400은 2개 포대, SU―35 전투기 열다섯 대를 도입할 계획이고, 3년 이내에 잔여 물량을 도입할 계획입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 측의 제안이 파격적이라면, 2차 물량도 한꺼번에 도입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 사장님, 저희가 언제까지 답변해 드려야 합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이 문제는 저 혼자 결정할 수 없으니까, 본국과 협의할 시간을 넉넉하게 주십시오.”
“내일부터는 한국의 무기제조 회사들과 인도 측이 협상을 시작해야 하니까, 가급적이면 오늘을 넘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저희는 러시아의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야 물론입니다.”
“저희가 이곳에 있어 봐야 도움 될 것 같지 않으니 호텔에 돌아가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겨울 일행과 인도 측 사람들이 떠나가자, 요키치 장관은 협상에 참석해 있던 실무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나하고 세르게이 장관, 자코프 대사는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까, 자네들은 밖에 나가서 대기하고 있어.”
“네, 장관님.”
실무자들이 회의실 밖으로 나가자, 요키치 장관이 주위를 둘러보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르게이 장관님, 저는 인도 측이 S―400 5개 포대와 SU―35 전투기 30대를 도입한다는 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네? 자코프 대사도 모르고 있던 정보를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요키치 장관은 조금 전 화장실에서의 일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세르게이 장관의 질문에 대답했다.
“제가 속이 좋지 않아서 화장실에 앉아 있었는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와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귀를 기울여 목소리를 들어 보니 한 사람은 한겨울 부사장이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하도진 실장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어떤 내용으로 대화를 나눴습니까?”
“인도 국방부가 도입 예정인 S―400과 SU―35 전투기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요키치 장관의 얘기를 듣고 있던 세르게이 장관은 커다란 의문점이 생겼다.
두 사람이 왜 한국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해서 대화를 주고받았는지에 대해.
이 점에 대해 물으니, 요키치 장관은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꺼내 놓았다.
“화장실에 제가 있다는 사실을 한 부사장이 아마 알고 있었을 겁니다.”
“인도 측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이 제 귀에 들어오도록 일부러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는 말입니까?”
“저는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 됩니다.”
“두 사람이 어떤 내용으로 대화를 나눴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결론만 말씀드리면, 인도 측은 기존에 수입하던 무기들은 다른 나라에 수출하는 무기들에 비해서 10% 저렴하게 수입하기를 원했고, S―400 5개 포대와 SU―35 전투기 30대에 대해서는 모두 100억 달러에 수입하기를 원했습니다.”
“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이용해서 자코프 대사가 입을 열었다.
“세르게이 장관님, S―400 5개 포대와 SU―35 전투기 30대를 100억 달러에 수출할 수 있습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실무자들과 대화를 나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실무자들을 안으로 부를까요?”
실무자들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자, 세르게이 장관이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도 들었다시피 우리는 오늘까지 인도 측에 S―400 5개 포대와 SU―35 전투기 30대의 가격을 통보해 줘야 하는 상황입니다. 요키치 장관님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인도 측은 두 무기의 도입 비용으로 100억 달러를 지출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부터 가능성 여부에 대해서 토론해 봅시다.”
“네, 장관님.”
* * *
그 시각.
영빈관 근처에 위치한 인도 정보국의 안가에서는 러시아 측과 협상에 참여한 인원들이 다시 모여서 대책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한 부사장님, 결과가 어떻게 날 것 같습니까?”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겠지만, 기존에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던 무기들의 가격은 저희가 원하는 대로 결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S―400 5개 포대와 SU―35 전투기 30대에 대해서는 자고에프 대통령의 결단에 따라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자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는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들은 지금 S―400과 SU―35 전투기에 집중하느라, 기존에 수출하던 무기들에 대해서는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겁니다.”
“그들이 할인해 주는 금액만큼 다른 무기들을 수입해 준다는 점도 한몫 차지하고 있을 겁니다.”
겨울의 뒤를 이어서 하도진 실장이 한마디 보탰다.
“하하하,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러시아 측은 오늘 저녁때까지 결론 내리기 힘들 겁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우리나라에서 출장 온 무기 제조 회사 관계자들과 점심 식사를 같이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데사이 국장님께서 인도 전통요리를 사 주신다고 하셨는데, 기억하고 계시죠?”
“그야 물론입니다. 제가 오늘 풀코스로 모시겠습니다.”
윙윙―
그때, 메흐타 장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급하게 밖으로 뛰어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그는 곤혹스런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우리나라 전통 요리는 다음에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장관님, 긴급 상황이라도 발생했습니까?”
“그게 아니라… 총리님께서 한국에서 오신 손님들께 점심 식사를 대접하시겠답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저희는 총리 공관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12시 30분까지 오십시오.”
메흐타 장관 일행이 떠나가자, 겨울은 즉시 호영에게 전화 걸었다.
어지간히 심심했는지 한 번의 신호가 채 끝나기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정 이사, 지금 즉시 총리 공관으로 출발해야겠다.”
[싱 총리님한테 초대 받았냐?]
“어.”
[참석 대상과 시간은?]
“우리나라에서 출장 온 사람들 모두. 그리고 아무리 늦어도 12시까지는 와야겠다.”
[아이고…….]
뚝.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호영이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겨울이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자, 정명훈 사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한 부사장, 정 이사한테 30분 이른 시간을 알려 준 이유가 뭐야?”
“늦게 가는 것보다 일찍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만약을 대비하려면 우리도 지금 출발해야겠네?”
“아무래도 그게 나을 것 같습니다.”
총리 공관으로 이동하는 자동차 안.
뉴델리 시내의 거리를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정명훈 사장이 시선을 안으로 옮기며 겨울에게 물었다.
“한 부사장, 러시아 측이 우리의 도움 없이도 중국의 꼼수를 원천봉쇄 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우리 회사에 셀러 맨데이트 역할을 맡기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희가 45억 달러를 절감시켜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가 아닐까요?”
“그럼으로 인해서 러시아는 매년 27억 달러가 넘는 커미션을 우리 회사에 지급하잖아.”
“사장님, 2년 차에는 커미션을 지급해 주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으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윤중 전무가 발언권을 요청했다.
“사장님께서 잘못 알고 계신 것이 있습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커미션은 1.5%이지만, 셀러와 바이어가 어떻게 합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리고 커미션도 셀러 아닌 바이어가 지급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김윤중 전무의 얘기를 듣고 있던 겨울의 머릿속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재빨리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장님, 제 생각은…….”
* * *
총리공관 접견실.
먼저 도착해 있던 호영은 겨울을 보자마자 원망의 소리부터 내뱉었다.
“약속 시간을 30분이나 빨리 알려 준 이유가 뭐야?”
“뉴델리의 교통 사정이 워낙 개판이라서 만약을 대비한 거야.”
“아니… 하, 교통 때문이라고 하니 할 말이 없네.”
“그나저나 생각보다 일찍 왔네?”
“우리도 만약을 대비해서 오토릭샤(Auto Rickshaw, 인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의 대중교통)를 타고 왔거든.”
“하여간 잘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싱 총리가 보좌관들과 함께 접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먼저 도착해 있던 겨울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 그를 맞이했다.
상석에 앉은 싱 총리는 주위를 둘러본 후, 정명훈 사장에게 천천히 말을 건넸다.
“정 사장님, 우리나라가 H&J 컨설팅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인도를 대표해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는 바이어 맨데이트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입니다.”
“하하, 알았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식사하면서 나누는 게 어떨까요?”
“네, 좋습니다.”
정명훈 사장은 러시아와의 협상 과정에서 있던 일들을 싱 총리에게 사실에 입각해서 설명해 주었다.
물론 그의 설명이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겨울, 메흐타 장관 등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러시아 측은 S―400 5개 포대와 SU―35 전투기 30대라는 숲을 쳐다보느라고 나무는 쳐다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 사장님이 무슨 말씀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S―400 5개 포대와 SU―35 전투기 30대의 가격은 넉넉잡고 120억 달러 내외일 겁니다. 그들이 100억 달러에 가격을 맞춰 준다면, 20억 달러를 할인해 주는 꼴입니다. 이에 반해서 인도 측이 수입하고 있는 기존 무기들을 10% 할인해 주면, 연간 8억 5,000만 달러를 할인해 주는 꼴입니다. 약 3년 정도만 할인을 받는다면, 25억 달러가 훌쩍 넘어갑니다.”
“으하하하!”
정명훈 사장의 설명을 이해했다는 듯 싱 총리가 화통한 웃음을 터트렸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