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코너로 몰 때는 빈틈없이
비틀거리며 냉장고로 걸어간 겨울은 안에 있는 물병을 들어 단숨에 비워 버린 후, 소파로 이동해서 큰대자로 뻗어 버렸다.
“아이고… 속 쓰려 죽겠네…….”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호영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러시아와 협상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서 대낮부터 폭음한 거야?”
“그게 아니라… 끄응… 러시아와 협상이 너무 일찍 끝나는 바람에 폭음한 거야.”
“아니, 협상이 성공했으면 보드카가 아니라 샴페인을 터트리고 축배를 들었어야지.”
사실 겨울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러시아 정통 요리 음식점에서는 축하주로 샴페인이 아니라 보드카를 내놓았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법이라고 요키치 장관이 권유하는 바람에 어쩔 수없이 보드카로 축배를 들었다.
문제는 식사 중강중간에도 두 사람이 쉴 새 없이 건배를 제안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의도를 빤히 알고 있었기에 사양하지 않고 건배 제의에 호응해 주었고, 한 잔, 두 잔 보드카를 마시다 보니 시나브로 모두 만취 상태에 이르렀다.
겨울은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을 뒤로하고 호영의 질문에 대답했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협상이 어떻게 타결됐는지 얘기해 봐.”
“인도가 러시아로부터 수입할 석유와 천연가스에 대해서 국제유가 대비 10% 할인해 수입하기로 결정했어.”
“세르게이 러시아 국방부 장관이 꽁지에 불이 붙은 채 이곳으로 날아오고 있겠군.”
“아마도 그렇겠지.”
“우리는 언제부터 협상에 투입되는 거야?”
“아직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빨라야 모레 오전일 거야.”
“그렇다면 이제 슬슬 협상 준비를 시작해야겠네.”
* * *
같은 시각.
총리 관저에서는 샤르마 장관과 데사이 국장이 싱 총리로부터 심한 꾸중을 듣고 있었다.
“만취하도록 술 마실 시간은 있으면서 나한테 협상 결과를 보고할 시간이 없던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저희가 총리님께 협상 결과를 보고하지 않은 이유는 계약서와 합의서에 아직 사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점심에 식사하러 이동하는 도중에 중간 보고를 했으면 됐잖아요.”
“저희도 그러고 싶었지만, H&J 컨설팅 측과 협상 전략을 수립하느라 미처 시간이 없었습니다.”
“협상이 타결됐다면서 무슨 전략을 수립했다는 말입니까?”
“세르게이 국방부장관이 지금 우리나라로 날아오고 있는 중입니다. 그를 상대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했습니다.”
“흐음,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그래서 계약서와 합의서는 언제 사인할 예정입니까?”
“내일 오전 시간으로 미뤄 놓은 상태입니다.”
“러시아 측에서 엉뚱한 소리하지 않겠지요?”
“협상 실무진에 계약서 작성 상황에 대해서 수시로 체크하고 있는데, 합의한 내용과 변동 없이 작성하고 있답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강인하게 생긴 60대 남자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싱 총리에게 절도 있는 자세로 인사하고 중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총리님, 찾으셨습니까?”
“어서 오세요. 앉아서 얘기합시다.”
메흐타 국방장관이 비어 있는 자리에 앉자, 싱 총리가 말을 이어 나갔다.
“오늘 오전에 우리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석유와 천연가스 수입 협상이 있었습니다. 협상 결과를 메흐타 장관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이 자리에 불렀습니다.”
“총리님, 러시아 놈들과 거래를 중단하고 부족한 물량을 나이지리아에서 수입하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애초부터 우리나라는 그럴 계획이 없었습니다.”
“저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 샤르마 장관과 데사이 국장이 그동안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설명해 줄 겁니다. 당연히 그렇겠지만, 이곳에서 나눈 대화 내용은 비밀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샤르마 장관, 이제 얘기해 주세요.”
본인에게 주어진 역할을 모두 끝낸 싱 총리가 2선으로 물러났다.
“우리는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러시아의 버릇을 고쳐 주기 위해서 예전부터 벼르고 있었습니다.”
샤르마 장관과 데사이 국장은 번갈아 가며 ‘러시아 손봐주기’ 계획을 설명해 갔지만, 메흐타 장관의 질문이 쏟아졌기 때문에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결국 보다 못 한 싱 총리가 한마디 한 뒤에야 진도를 쭉쭉 뺄 수 있었다.
“…절감하는 금액만큼 러시아산 무기를 구입해 줘야 합니다.”
“데사이 국장님, 금액이 얼마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평균적으로 85억 달러 정도 됩니다. 이 정도 금액이면 러시아산 무기를 수입하는 데 충분하지 않을까요?”
“어디 충분하다뿐이겠습니까?”
“내일 오전에 H&J 컨설팅 측과 협력해서 세르게이 장관을 상대하시면 될 겁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진심으로 기쁜지 메흐타 장관의 화통한 웃음소리가 싱 총리의 집무실에 가득 들어찼다.
“이제부터 H&J 컨설팅 측과 수립한 계획을 말씀드릴 테니까, 국방부에서 적극 협조해 주십시오. 우리 정보국이 조사한 결과…….”
데사이 국장의 설명을 듣고 있던 메흐타 장관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의 요청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주어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국장님, 내일 러시아 측과의 미팅 시간을 몇 시간 더 늦춰 주면 안 되겠습니까?”
“러시아 측과 협상을 마무리 짓고, 곧바로 한국에서 오신 분들과 협상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늦출 수는 없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밤을 새서라도 자료를 만들겠습니다.”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싱 총리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메흐타 장관, H&J 컨설팅과 한국은 우리 인도의 전략적 동반자입니다. 반드시 그들에게 예의를 지켜 주세요.”
* * *
영빈관.
요키치 장관의 입에서도 싱 총리가 얘기한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르게이 장관님, H&J 컨설팅 사람들을 가볍게 대하는 순간 매년 85억 달러가 허공으로 날아간다고 생각하십시오.”
“요키치 장관님, 너무 허풍이 센 것 아닙니까?”
“허풍이 세다니요?”
“일개 브로커인 H&J 컨설팅이 어떤 힘이 있어서 우리나라를 협박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세르게이 장관님이 잘 몰라서 하는 소리 같은데, 그 회사는 싱 총리로부터 자원 및 무기 거래에 관련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고에프 대통령님도 H&J 컨설팅에 깊은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자코프 대사도 한마디 거들었다.
“결정적으로 지금 한국의 무기 제조 회사들의 관계자들이 인도에 입국해 있는 상황입니다.”
요키치 장관의 말에 한국산 무기의 성능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세르게이 장관은 걱정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그들이 인도에 입국해 있는 이유는 인도 무기 시장에서 자신들을 밀어내고, 한국산 무기를 판매하기 위함이리라.
“요키치 장관님,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저도 H&J 컨설팅 사람들을 하찮게 봤다가 큰 코 다칠 뻔했으니까 충분히 이해합니다.”
“인도가 우리나라에 요구한 것 중에서 제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게 있습니까?”
“중국에 수출하는 자원들의 가격을 현실화시켜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세르게이 장관은 오늘 아침의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자고에프 대통령의 호출을 받아 크레물린 궁에 들어가니, 비서실 전체가 매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고에프 대통령에게 이유를 물었으나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제 알고 보니 중국에 무언가 조치를 취하기 위해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던 것 같았다.
“요키치 장관님, 제가 오늘 아침에…….”
그때, 요키치 장관의 핸드폰이 요란스런 벨소리를 토해 내는 바람에 세르게이 장관의 얘기는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
액정에 떠 있는 번호를 확인한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쑹 장관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요키치 장관님,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무언가 불쾌한 일이 있었다는 듯 쑹쩐밍 장관의 격앙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정말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이것 보세요, 쑹 장관님.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 주지 않으면, 전화를 끊겠습니다.”
[방금 전에 귀국의 자고에프 대통령께서 자국에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을 중단하겠다고 기자회견을 하셨습니다.]
요키치 장관은 어떤 상황인지 단숨에 눈치챘다.
성격 급하기로 소문난 자고에프 대통령이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두 품목의 수출 가격을 정상화시켜 달라고 중국에 선전포고를 날린 것이리라.
이에 대해 쑹전밍 장관은 자기에게 항의하기 위해서 전화를 걸어온 것이고.
자고에프 대통령이 어떤 내용으로 기자회견 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대처할 수는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정말… 모르고 있었습니까?]
묻는 쑹쩐밍 장관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조심스러워졌다.
“저는 지금 인도에 출장 와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자고에프 대통령님이 일을 벌이실 때 참모들한테 일일이 상의하지 않으십니다.”
[아… 그렇군요.]
“그나저나 자고에프 대통령님이 어떤 내용으로 기자회견을 하셨는지 자세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습니다. 자국이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석유와 천연가스의 가격을 7월 1일부터 일방적으로 10% 인상하겠답니다.]
요키치 장관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중국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겨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가 코치한 내용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쑹전밍 장관을 다뤄 보기로 마음먹었다.
“쑹 장관님, 우리나라 대통령님의 기자회견에 대해서 중국의 입장을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는 귀국과 협상을 통해서 적당한 가격으로 인상해 줄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은 자고에프 대통령님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제 말이 맞습니까?”
[요키치 장관님, 우리나라가 귀국의 요구를 들어주면, 추가로 180억 달러 이상 비용이 발생합니다.]
“방금 전에 쑹 장관님께서 하신 말씀은 논리가 맞지 않습니다. 이유는 알고 계실 것 같아서 따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
대답할 거리가 없는지 쑹전밍 장관이 아예 입을 닫았다.
드디어 기회를 포착한 요키치 장관은 그를 거세게 밀어붙였다.
“지난 세월 동안 중국이 우리나라로부터 자원들을 저렴하게 수입함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혜택을 받았는지 알고 계십니까? 무려 1조 달러가 넘어갑니다. 그동안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바로잡자는 우리나라의 주장이 잘못됐습니까?”
[…….]
“자고에프 대통령님은 적당한 타협을 통해서 일을 유야무야 덮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두 품목에 대해서 수입 중단 사태를 맞지 않으려면, 신속하게 움직이셔야 할 겁니다.”
[만약에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귀국도 피해가 심할 겁니다.]
“쑹 장관님, 제가 인도에 출장 온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그, 그럼…….]
“맞습니다. 인도와 거래를 확대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키치 장관이 쑹전밍 장관의 말을 중간에서 가차 없이 잘라 버렸다.
[저는 요키치 장관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습니다.]
“내일 오전에 우리나라와 인도가 계약한 내용이 양국의 언론을 통해서 공개될 예정입니다. 사실 여부는 그때 확인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정말이라는 말씀입니까?]
“당연한 말씀입니다. 추가로 하나만 더 말씀드리면, 다음 달에는 다른 자원들에 대한 가격도 현실화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리미리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요키치 장관님, 우리나라는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6개월 정도 유예 기간을 주면 안 됩니까?]
‘삶은 호박에 이도 들어가지 않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이 말이 식도를 타고 올라와 입안에 머물렀지만,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입 밖으로 끄집어 낼 수 없었다.
“제가 자고에프 대통령님을 설득해 보겠지만, 가능성이 높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게 안 되면, 3개월 정도라도 유예 기간을 주십시오.]
요키치 장관은 쑹전밍 장관의 앓는 소리를 듣는 순간, 드디어 9부 능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쐐기를 박는 일만 남았다.
“쑹 장관님, 자고에프 대통령님께 말씀드려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딸깍.
전화를 끊은 요키치 장관은 밝게 웃으며 세르게이 장관에게 말을 건넸다.
“기분도 좋은데, 보드카를 곁들인 저녁 식사 어떨까요?”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