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복잡한 남녀관계
“부사장님, 어서 오세요.”
겨울이 집에 도착하니, 지난 4월 말에 입주 도우미로 채용한 황정혜 여사가 대문까지 달려 나와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녀가 입주하고 난후부터 집안에는 늘 온기가 감돌았다.
“여사님, 가을이는 아직 퇴근 안 했어요?”
“요즘 회사에 업무가 많은지 제 시간에 퇴근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아, 그렇군요.”
“부사장님, 저녁 식사 하셨어요?”
“여사님이 끓여 주는 된장찌개가 먹고 싶어서 저녁 식사 약속을 뿌리치고 허겁지겁 달려왔습니다.”
“호호, 얼른 저녁 식사를 준비할 테니까, 씻고 나오세요.”
식탁에 앉은 겨울이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떠서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가을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겨울을 발견한 가을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반갑게 말을 건네 왔다.
“오빠, 언제 왔어?”
“30분 전에. 저녁은 먹었어?”
“아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빨리 옷 갈아입고 와라.”
“알았어.”
두 남매는 오랜만에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식사를 했다.
겨울은 한동안 입을 닫고는 시원하고 칼칼한 된장찌개를 폭풍 흡입했다.
그러고는 한참 만에 가을에게 질문을 던졌다.
“요즘 이재성 대리와 연애 사업은 잘되어 가니?”
“서로 똥오줌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바빠서 일주일에 한 번 얼굴을 볼까 말까야.”
겨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투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투자분석 검증팀에 근무하고 있는 가을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은 이해되었다.
하지만 인사팀에 근무하고 있는 이재성 대리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을 텐데, 가을에게서 예상외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 대리는 왜 바쁘대?”
“설마… 모르고 묻는 건 아니겠지?”
순간, 겨울의 머릿속에 지난달 말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남우영 인사팀장이 자기를 찾아와서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의 보고 내용을 바탕으로 정명훈 사장, 장대산 부사장과 협의한 끝에, 직원들을 추가로 채용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서류 접수 마감 날짜는 아직 많이 남았잖아?”
“그렇기는 한데, 채용공고를 낸 다음 날부터 지원서가 쇄도하고 있는 중이래.”
“우리 회사가 그다지 지명도가 높지 않은 회사인데, 지원자가 폭주한다고?”
“지명도가 무슨 소용 있어? 연봉을 많이 받으면 장땡이지.”
“우리 회사의 연봉은 대한 그룹보다 약간 많을 뿐이잖아.”
“오빠는 참. 우리 회사는 성과급 제도가 빵빵하잖아. 이번에도 성과급을 얼마나 많이 받을지 직원들이 잔뜩 기대하고 있는 중이야.”
“그렇단 말이지”
숟가락을 놓고 식탁에서 일어난 겨울은 소파로 이동해서 누군가에게 전화 걸었다.
[네, 부사장님.]
“하 실장님, 저희가 몰디브 출장에서 얻은 성과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몰디브에서 김 전무님과 신 실장님, 그리고 제가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내일 출근하시면, 사장님께 보고드릴 예정입니다.]
“직원들한테 지급할 성과급은 계산해 보셨어요?”
[성과급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정해야 할 것이 있어서 계산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 문제는 저도 알고 있으니까, 내일 토론을 통해서 결론 내리도록 합시다.”
[네, 부사장님.]
딸깍.
겨울이 전화를 끊자, 언제 다가왔는지 가을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오빠, 몰디브에서 얻은 성과가 많은가 봐?”
“아직 집계가 안 돼서 정확히 모르지만,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이야.”
“그렇다면… 이번에는 지난 4월 말에 받은 성과급보다 많겠네?”
지난 4월에 H&J 컨설팅은 잉가 3댐 건설 공사를 포함한 3건의 프로젝트를 수주했고, 공언한 대로 모든 직원들한테 0.1%의 성과급을 지급했다.
“지난달에 성과급으로 얼마를 받았어?”
“세금 떼고 9,300만 원.”
“내일 출근해서 정산해 봐야 하겠지만, 최소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와우! 대박.”
가을이 양손을 번쩍 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게 좋아?”
“오빠는 안 좋… 아차! 오빠는 경영자였지?”
“그게 무슨 소리야?”
“회사 돈 몇 백억이 지출되는데, 가슴이 얼마나 쓰리겠냐고.”
“나는 경영자인 동시에 월급쟁이야.”
“아, 됐고. 설마하니… 귀국할 때 빈손으로 온 건 아니겠지?”
겨울은 어제 오후에 호영과 함께 시내에 위치한 기념품 상점들을 다녀 봤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을 찾지 못했다.
결국 몰디브를 상징하는 기념품 몇 개를 구입했을 뿐이다.
“가을아, 몰디브가 어떤 나라인지 알고 있지?”
“수몰 위기에 처해 있고 관광업으로 먹고사는 나라.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지.”
“하나가 더 있는데, 몰디브는 공업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어.”
“…비싼 선물을 사지 않았다는 뜻이야?”
“잘 알고 있네.”
“비싼 선물 필요 없으니까, 대충 기념품스러운 거나 줘.”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다.”
“그건 그렇고, 내 선물만 사 온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있겠냐? 방에서 선물 가지고 나올 테니까, 여사님 불러라.”
겨울에게 작은 종이가방을 건네받은 황정혜 여사는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부사장님, 이게 뭔가요?”
“몰디브 출장 다녀온 기념으로 선물 하나 준비했어요.”
“열어 봐도 되요?”
“여사님 거니까 저한테 허락을 받을 필요 없어요.”
조심스럽게 작은 상자를 열어 본 황정혜 여사는 두 눈을 의심했다.
종이상자 안에는 엄지손톱만 한 진주목걸이가 떡하니 들어 있었다.
“부, 부사장님… 너무 비싼 선물 주신 거 아니에요?”
황정혜 여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울에게 물었다.
“진주목걸이가 우리나라에서나 비쌀 뿐이지, 몰디브에서는 그다지 비싸지 않아요.”
“부사장님, 제가 남편과 함께 5년 전에 몰디브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이런 종류의 진주목걸이가 얼마하는지 대략 알고 있어요…….”
“네? 몰디브에 다녀오셨다고요?”
가을이 뻘쭘한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서 재빨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죽은 남편의 회갑 기념 선물로 아들놈이 몰디브 여행을 보내 줬죠. 제 인생에서 그때가 제일 행복했는데…….”
“아, 그랬군요.”
“제가 실없는 얘기를 꺼낸 것 같네요. 부사장님, 선물 정말 고마워요.”
겨울은 황정혜 여사가 아들부부와 틀어진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별말씀을요.”
다음 날 아침.
회사로 출근하는 차 안에서 겨울은 무언가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가을에게 질문을 던졌다.
“가을아, 너희 팀에 근무하고 있는 이수진 씨 말인데, 남자친구 있냐?”
“없을 걸? 갑자기 왜?”
“그냥.”
“설마… 오빠도 수진 언니를 좋아하는 거야?”
‘도’라는 말은 다른 사람도 이수진을 좋아한다는 의미.
겨울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빤히 알고 있었지만,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그런데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입이 무겁기로 소문난 홍석훈 기사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가을 씨, 제가 알기로 부사장님은 다른 아가씨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홍 기사님, 울 오빠가 좋아하는 여자가 누군데요?”
가을이 급 관심을 나타내며 물었다.
“미안하지만, 거기까지는 대답할 수 없군요.”
“그럼 하나만 얘기해 주세요.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인가요?”
“후후, 그렇습니다. 힌트를 하나만 더 드리면, 정 이사님도 잘 알고 있는 아가씨입니다.”
“그렇다면… 강희 언니밖에 없는데?”
“조강희 씨는 아닙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뭔데요?”
호기심을 느낀 가을이 홍석훈 기사의 얘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 아가씨를 부 사장님과 정 이사님이 동시에 좋아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가을 씨가 정 이사님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도록 만들어 주는 건 어떨까요?”
“제가 어떻게요?”
“정 이사님이 조강희 씨를 좋아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자리를 만드는 겁니다.”
“괜찮은데? 가을아, 나는 너만 믿고 있을게.”
홍석훈 기사의 의도를 눈치 챈 겨울이 재빨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가을은 그런 겨울의 반응이 너무나 생소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몇 년 동안 겨울이 노골적으로 이성에 관심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뭐, 알았어. 최선을 다해 볼게.”
“그나저나 강희가 정 이사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을까 모르겠네.”
“내가 강희 언니한테 물어볼까?”
“아니야, 됐어. 그런데 이수진 씨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
“있어. 우리 팀에 조규원 대리라고.”
“뭐! 삼각관계였어?”
깜짝 놀란 겨울이 가을의 말을 중간에서 가차 없이 잘랐다.
“오빠, 수진 언니를 좋아하는 사람이 또 있단 말이야?”
가을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
“그 얘기는 조금 있다가 하고, 조 대리가 어떤 사람인지 얘기해 봐.”
“전형적인 호남형의 얼굴에 몸매도 괜찮고… 성격도 무난해.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을 졸업했다더라. 집안도 빵빵해서 할아버지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대학의 재단 이사장이고, 아버지는 정부의 고위 관료래.”
겨울은 장대산 부사장과 조규원 대리를 비교해 보았다.
장대산 부사장도 MIT 공대를 졸업했기 때문에 학벌로는 전혀 밀리지 않는다.
미국 대통령에 가장 근접해 있는 해리슨 상원의원을 양아버지로 두고 있으니, 집안은 오히려 더 낫다고 볼 수 있다.
약간 살집이 있어서 신체적인 조건이 조금 밀리기는 하지만, 그는 H&J 컨설팅의 대주주이자, H&J Investment의 실질적인 수장이다.
객관적으로 봐도 모든 면에서 장대산 부사장이 경쟁 우위에 놓여 있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당사자인 이수진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가의 여부였다.
“이수진 씨와 조 대리 사이는 어때?”
“조 대리님이 수진 언니를 일방적으로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어.”
“다행이네.”
“오빠가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군데.”
“그 사람의 프라이버시 때문에 얘기하기가 좀 그러네. 강희한테 직접 물어봐.”
“강희 언니가 지금까지 얘기해 주지 않았는데, 물어본다고 대답해 주겠어?”
“그럼 이수진 씨한테 직접 물어보든가.”
“뭐야! 수진 언니도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
“적어도 나는 그렇게 알고 있어.”
“으으, 이 엉큼한 언니 같으니라고.”
가을은 이 말과 함께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한가을, 회사가 코앞인데 지금 전화하려고?”
“왜? 하면 안 돼?”
“너 이제 내려야 하잖아.”
“우리 회사 직원들도 내가 오빠 동생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더라고. 그래서 앞으로 불편하게 중간에 내리지 않으려고.”
“아이고…….”
* * *
“이제 말씀해 보세요.”
장대산 부사장이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겨울은 가을에게 들은 얘기를 장대산 부사장한테 알려 주기 위해서 모닝커피를 핑계 삼아 그의 집무실을 급히 찾았다.
“장 부사장님, 강력한 연적이 나타났는데, 알고 계십니까?”
“…수진 씨를 좋아하는 사람이 저 말고 또 있다는 말씀입니까?”
“네. 제가 가을이한테 들었는데…….”
겨울은 출근 도중에 가을과 나눈 대화 내용을 설명해 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러다가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볼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경쟁자를 떼어 내야 할 것 같아요.”
“후우, 좋은 정보를 알려 줘서 고마워요.”
“장 부사장님, 대신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어떤 부탁인데요?”
“찰거머리보다 더한 정호영 이사를 지유 씨한테 떼 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겨울의 얘기를 들으면서 장대산 부사장의 궁금증은 더욱더 커져 갔다.
과연 조강희의 마음이 정말 호영에게 가 있는지에 대한 여부였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겨울이 수립한 작전은 한낱 공염불에 불과할 테니까.
이 점을 언급하며 겨울의 생각에 대해 물었다.
“강희의 마음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정 이사가 강희를 생각하는 마음은 아주 조금은 있는 것 같아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정 이사는 지난달에 프랑스 출장을 다녀왔을 때 강희한테 향수를 선물해 주었죠. 몰디브에서도 제법 괜찮은 선물을 사는 모습을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고요. 강희에게 아예 마음이 없으면, 뭐하러 그렇게 챙기겠어요?”
“하여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번 기회에 각자 원하는 사람을 쟁취해 보십시다.”
“하하하, 좋습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