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작전 변경 (2)
비행기 출입문이 열리고 브리지에 첫발을 내디딘 천유런 외교부장은 스멀스멀 화가 치솟아 올랐다.
하마드 부통령이 공항에 마중 나온다는 것을 인사치레 삼아 거절했더니, 좀팽이 같은 인간이 진짜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마중 나오지 말라고 만류했으니, 그에게 꼬투리 잡을 자격은 없었다.
그런 복잡한 자신의 심경을 읽었는지, 뒤따라 내린 왕지쉰 국장이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어 왔다.
“외교부장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무 일도 없어. 빨리 가자고.”
입국 수속을 밟기 위해 통로를 걸어가고 있는 도중에 맞은편에서 강인한 인상의 50대 남자가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천유런 외교부장님, 저는 몰디브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압둘라 파루마 경찰국장입니다. VIP라운지에서 하마드 부통령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가 하마드 부통령님에게 마중 나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꽁해 있던 기분은 순식간에 풀렸다.
“공항 밖의 상황이 심상치 않아서 어쩔 수없이 마중 나왔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도대체 어떤 상황이기에 그럽니까?”
“여기서는 말씀드릴 수 없고, VIP 라운지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알았어요. 앞장서세요.”
VIP 라운지.
하마드 부통령은 천유런 외교부장에게 정중하게 인사말을 건넸다.
“천 외교부장님, 자국으로 휴가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를 환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비행기까지 갔어야 하는데, 지켜보는 사람들 때문에 이곳에서 천 외교부장님을 맞이하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충분히 이해하고 남으니까, 심려치 마십시오.”
“고맙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앉아서 나눴으면 합니다.”
“네. 그렇게 합시다.”
하마드 부통령은 테이블에 놓여 있던 물로 목을 축인 후, 입을 열었다.
“파루마 국장, 천 외교부장님께 현재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 주세요.”
“네, 부통령님. 한 시간 전에 공항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경찰 특공대장으로부터 수상한 사람들이 입국장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혹시… 테러범들입니까?”
묻는 천유런 외교부장의 목소리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저희도 그 점이 의심스러워서 그들을 검문해 본 결과, 테러범들은 아니고 평범한 파키스탄 사람들이라고 확인됐습니다.”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네요?”
“테러범들이 그들에게 천 외교부장님을 감시하라고 사주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저희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테러범들은 얼굴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공항에 함부로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었을 겁니다.”
파루마 경찰국장의 뒤를 이어서 하마드 부통령이 한마디 거들었다.
“저희가 파키스탄 사람들을 서둘러 공항에서 퇴거 조치를 시켰지만, 찜찜한 것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어떤 점이 찜찜합니까?”
“파키스탄 사람들의 행동이 어느 누가 봐도 수상스러웠다는 점입니다.”
“그, 그럼…….”
“맞습니다. 테러범들은 그들을 버리는 패로 쓰고, 천 외교부장님을 감시할 감시원들은 공항 내 어딘가에 별도로 배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마드 부통령의 말에 천유런 외교부장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겠군요.”
하마드 부통령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 내리고 고삐를 바싹 조이기 위해서 서둘러 입을 열었다.
“테러범들로부터 천 외교부장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외교관 전용통로를 이용할 예정입니다.”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희 몰디브 정부가 천 외교부장님의 안전을 위해서 준비해 놓은 조치를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경청하겠습니다.”
“오늘 밤은 호텔이 아닌 저희가 마련해 놓은 안가에서 주무십시오. 내일 오전에 천 외교부장님 일행을 대통령님의 개인 별장이 있는 섬으로 은밀하게 이동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 섬에서 안전하게 휴가를 보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천유런 외교부장은 하마드 부통령의 제안을 수용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몰디브를 방문한 목적이 사라지는 꼴이니까.
“하마드 부통령님, 성의는 고맙습니다만, 저는 이곳에서 휴가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천 외교부장님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저희의 안전은 저희가 책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아… 그렇다면 하는 수 없군요.”
파루마 국장은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발언권을 요청했다.
“천 외교부장님, 저희가 정부가 제공하는 안가에서 휴가를 보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희 일행들이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안가가 넓습니까?”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좋습니다. 파루마 국장님의 제안을 수용하겠습니다.”
윙윙―
그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파루마 국장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대방과 통화를 시작했다.
불과 몇 초의 시간이 지난 후, 통화를 중단하고 하마드 부통령에게 긴급히 말을 걸었다.
“부통령님, 지금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상황이기에 그럽니까?”
“옴사르 부국장한테 걸려온 전화인데, 말레 시내에 미국의 루퍼트 국무장관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하마드 부통령이 깜짝 놀랐다는 듯 경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옴사르 부국장이 부통령님과 통화하고 싶다고 합니다.”
“알았어요. 나를 바꿔 주세요.”
파루마 국장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은 하마드 부통령은 옴사르 부국장에게 루퍼트 장관이 정말 맞는지부터 물었다.
[100% 확신합니다.]
“루퍼트 장관이 우리나라에 입국했다는 정보는 없었잖아요?”
[출입국 관리소 측에 확인 결과, 가명을 사용해서 우리나라에 입국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들의 통화를 들으면서, 천유런 외교부장은 큰일 났다는 생각뿐이었다.
미국 정부가 루퍼트 장관을 몰디브로 급히 보낸 이유가 무엇인지 빤했기 때문이다.
칠리마 모잠비크 부통령과 루사토 케냐 부통령이 자신의 설득에 넘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위함이리라.
루퍼트 장관은 말레 시내를 활보하고 다니고 있는데, 자기는 자살 폭탄 테러를 피하기 위해 안가에 숨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한심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숙소를 호텔로 옮길 생각은 없었다.
테러범들에게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는 안가에서 움츠리고 있는 것이 백번 나으니까.
천유런 외교부장이 어이없는 상황에 애써 스스로를 위안하는 사이에도 두 사람의 통화는 끝을 향해 달려갔다.
“루퍼트 장관에게도 파키스탄에서 테러범들이 우리나라에 입국해 있다는 정보를 제공해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나한테 연락하세요.”
[네, 부통령님.]
딸깍.
전화를 끊은 하마드 부통령은 핸드폰을 파루마 국장에게 돌려주며 천유런 외교부장에게 말을 걸었다.
“천 외교부장님을 비롯한 수행원들이 우리나라에 입국한 기록을 남기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출입국 사무소에도 테러범들의 끄나풀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긴… 그럴 수 있겠네요.”
“천 외교부장님, 일행을 안가까지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하마드 부통령님, 루퍼트 장관을 만나 보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오늘 오전에 이미 만나 봤습니다.’
하마드 부통령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천유런 외교부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가명으로 우리나라에 입국한 불청객을 제가 만나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하하하,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제 출발합시다.”
* * *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천유런 외교부장에게 하마드 부통령이 질문을 던졌다.
“천 외교부장님, 저희 둘밖에 없으니까 우리나라로 휴가 오신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천유런 외교부장은 하늘이 반으로 쩍 갈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진짜 목적을 얘기할 수 없었다.
“제가 통화 당시에도 말씀드렸지만, 휴가 목적밖에는 없습니다.”
‘인간아,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라.’
속으로 걸쭉하게 욕 한마디를 해 주고 태연한 표정으로 그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말씀해 주기 싫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하, 미안합니다.”
“살리 대통령님께서 천 외교부장님을 만나 보고 싶어 하시는데, 시간을 내주실 수 있습니까?”
천유런 외교부장은 그의 말이 몹시 반가웠다.
몰디브는 아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인도양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나라이다.
이를 일찌감치 꿰뚫어 본 중국은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부터 몰디브를 손아귀에 넣기 위해 공들였다.
그러나 밀월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두 나라는 작년 11월에 살리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이후부터 급격하게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지금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도달해 있었다.
이곳을 방문한 김에 원흉인 살리 대통령에게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하지 못하도록 경고장을 날려 줄 참이었다.
그래서 하마드 부통령에게 살리 대통령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정말 고맙게도 그가 먼저 말을 꺼내 온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제안을 덥석 물 생각은 없었다.
“하마드 부통령님, 저는 몰디브에 출장 나온 게 아니라 휴가 온 겁니다.”
사실 살리 대통령은 천유런 외교부장을 만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하마드 부통령이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는 천유런 외교부장의 의심을 피해 보려는 목적밖에 없었다.
“천 외교부장님, 제 입장을 봐서라도 살리 대통령님을 만나 주십시오.”
“그렇다면 하는 수 없군요. 내일이나 모레쯤에 시간을 내서 살리 대통령님을 예방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하마드 부통령은 일부러 큰 목소리로 웃으며 만족한 심기를 드러냈다.
윙윙―
그때, 하마드 부통령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기다리고 있던 옴사르 경찰부국장이 걸어온 전화였다.
천유런 외교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옴사르 부국장, 무슨 일입니까?”
[지금 루퍼트 장관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인데, 곤란한 상황이 발생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얘기해 보세요.”
[루퍼트 장관이 천유런 외교부장을 만나 보고 싶어 합니다.]
“천 외교부장님과 상의해서 연락해 줄 테니까,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어요.”
딸깍.
옴사르 부국장과 통화를 끝낸 하마드 부통령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천유런 외교부장에게 말을 건넸다.
“루퍼트 장관이 천 외교부장님을 은밀하게 만나 보고 싶어 한답니다.”
천유런 외교부장은 루퍼트 장관의 의도가 빤히 들여다보였다.
케냐와 모잠비크의 일대일로 프로젝트 탈퇴 건에 대해서 자신과 담판을 지을 생각인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패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나 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을 거부하면 꼬리를 마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와 만나서 담판을 짓는 길밖에 답은 없었다.
“좋다고 하십시오.”
“저녁 식사 후에 천 외교부장님의 숙소인 안가에서 밤 8시쯤에 만나는 게 어떨까요?”
하마드 부통령의 뜻밖의 제안에 천유런 외교부장은 은근히 마음이 놓였다.
홈그라운드에서 협상을 진행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심리적인 안점감이 생긴다.
똥개도 자기 집 앞에서는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말이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마드 부통령이 중립적인 곳을 미팅 장소로 제시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예상과는 정반대로 안가를 미팅 장소로 제안하다니.
“하마드 부통령님, 정말입니까?”
“네? 정말이라뇨?”
“안가에서 루퍼트 장관을 만난다는 것은 제가 주인이라는 뜻이잖아요.”
사실 하마드 부통령이 안가를 미팅 장소로 제안한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얘기해 주지 않기로 했다.
“제가 VIP 라운지에서 천 외교부장님께 말씀드린 것으로 답변을 갈음했으면 합니다.”
“아… 불청객이라고 한 거요?”
“네, 그렇습니다. 이번 기회에 콧대 높은 루퍼트 장관을 제대로 망신 주십시오.”
“하마드 부통령님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버리겠습니다.”
개미지옥에 끌려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천유런 외교부장은 굳은 각오를 다졌다.
“이야, 오늘밤에 재미있는 일이 많이 벌어지겠네요?”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