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작전 변경 (1)
딩…….
느닷없이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호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늦은 시간에 연락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숙소를 찾아올 사람들은 없었다.
“룸서비스 시켰냐?”
“아니.”
“그럼 누가 초인종을 잘못 눌렀나?”
아무 생각 없이 문을 뎐 호영은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문 앞에는 은센기 사장이 건장한 체구의 30대의 남자와 까만 피부가 매력적인 20대 아가씨와 같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센기 사장님,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하하하. 정 이사님, 깜짝 놀라셨죠?”
“놀랐다 뿐입니까?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놀란 호영이와는 달리, 일찌감치 연락을 받은 겨울은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은센기 사장 일행을 맞이했다.
동행한 사람은 얼마 전에 부장으로 승진한 루암바와 사촌동생인 디아타였다.
“은센기 사장님, 몰디브에는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한 시간 전쯤에 도착했고 짐을 풀자마자 곧바로 찾아왔습니다.”
“부투야 실장님께 얘기 들었습니다. 나이지리아 등에서 발주한 물량이 많습니까?”
“콩고민주공화국을 포함한 네 개 나라가 발주한 물량에 비해서 약간 적은 정도입니다.”
즉, 엄청난 양이라는 뜻.
“아이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호영이 탄식을 내뱉었다.
그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은센기 사장이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호영에게 말했다.
“정 이사님, 저희는 SH무역의 능력을 믿고 있습니다.”
“은센기 사장님, 우리나라에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저희의 발등은 찍지 않을 거잖아요.”
“하하, 그렇긴 하죠. 시간이 없으니까, 세 나라로부터 발주 받은 품목 리스트를 저한테 건네주십시오.”
만만의 준비를 하고 왔는지 루암바 부장은 주저하지 않고 클리어 파일과 USB를 호영에게 건네주었다.
호영은 클리어 파일 속의 서류 내용을 꼼꼼하게 읽어 본 후, 은센기 사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오늘밤에 저희 회사 사장님과 상의해 보고, 내일 중에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정 이사님, 저희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도 될까요?”
“피곤하지 않으세요?”
“아무리 피곤해도 비즈니스가 먼저인 것 같습니다.”
“일단 사장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호영은 정상호 사장에게 전화 걸어서 현재까지의 상황에 대해서 간단하게 보고하고 은센기 사장의 요청을 전했다.
“…대책 회의에 은센기 사장님이 참석하고 싶어 합니다.”
[임원들을 소집해야 하니까, 10분 뒤에 내 숙소로 모시고 와.]
“H&J 컨설팅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바쁠 테니까 실무자인 가쿠타 부장 정도만 부르는 것으로 하자.]
“가쿠타 부장한테는 제가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딸깍.
호영이 전화를 끊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은센기 사장이 질문을 던졌다.
“정 이사님, 사장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저희 회사 사장님의 숙소로 이동하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한 부사장, 너희 쪽에서는 가쿠타 부장만 참석하는 것으로 했어.”
“잘했다. 수고해라.”
다음 날 아침.
다크서클이 눈 밑까지 내려온 호영이 문을 열고 들어와 쓰러지듯 소파에 드러누웠다.
“밤을 꼬박 샌 거야?”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어떻게 됐니?”
“지금 업체들과 협의하고 있는 중이라서 아직 결론 난 것은 아무것도 없어. 잠깐 쉬었다가 오전 10시에 다시 모여서 회의하기로 했어.”
“아침밥은 어떻게 할래?”
“피곤해 죽겠다. 룸서비스 시키자.”
“그래.”
윙윙―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던 도중에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겨울은 액정에 표시된 전화번호를 확인하자마자,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루퍼트 장관님.”
[한 부사장님, 시간 괜찮으면 커피나 한잔하실까요?]
“좋습니다. 저희가 어디로 가면 될까요?”
[저는 밖에 돌아다닐 수 없으니까, 부사장님이 몰디브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안가로 오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딸깍.
겨울이 전화 끊자, 호영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가지 않아도 되겠지?”
“루퍼트 장관님을 만나 보고 싶다며?”
“만나 보고 싶기야 하지만, 지금은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할 것 같다.”
“하긴…….”
“지금가면 밤늦게나 돌아오겠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다.”
“하여간 수고해라.”
“너도.”
* * *
몰디브 정부 안가 회의실에서는 루퍼트 장관이 몰디브의 하마드 부통령, 인도의 데사이 정보국장 등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겨울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마드 부통령님, 아예 이번 기회에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희도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명분이 없어서 고민입니다.”
“명분은 한 부사장한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면 될 겁니다.”
“한 부사장님이 그럴 능력이 있습니까?”
“나이지리아를 포함한 다섯 개 나라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할 때, 모든 계획이 한 부사장의 머리에서 나왔습니다.”
“네? 그게 정말입니까?”
하마드 부통령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지난달에는 중국의 완커건설이 콩고민주공화국,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에 133억 달러를 기부했는데, 이 또한 한 부사장의 작품입니다.”
“저는 전혀 믿기지 않습니다.”
데사이 정보국장은 어제 겨울과 미팅을 끝내고 정보국 요원들과 별도로 대책 회의를 진행했다.
그 자리에서 천유런 외교부장의 몸값으로 얼마를 요구할지에 대한 얘기가 나왔고, 요원들 대부분은 1억 달러가 적당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자기 또한 그 정도 금액이면 적당하다고 생각했으나,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생각을 바꿔 먹었다.
‘천 외교부장, 이번에 어디 한번 죽어 봐라.’
데사이 정보국장이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지는 사이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하마드 부통령님, 한 부사장은 이미 몰디브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할 수 있는 명분을 생각해 놓고 있을 겁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네요.”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정명훈 사장 등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루퍼트 장관님,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그럼요. 정 사장님과 한 부사장님 덕분에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신지훈 실장은 정명훈 사장이 루퍼트 장관과 친밀한 사이라고 얘기를 들었을 때, 약간의 허세가 끼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전에 두 사람이 격의 없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본 순간,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직속상사가 미국의 국무장관과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루퍼트 장관님, 제 일행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제 비서실장을 맡고 있는…….”
소개가 끝나자마자 하마드 부통령의 질문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안건으로 들어갔다.
“한 부사장님, 우리 몰디브도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하고 싶어 하는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사실 겨울은 하마드 부통령에게서 이런 부탁을 받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고, 지금까지 묘안을 찾기 위해 골몰하고 있었다.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하기 위한 가장 최선의 방법은 중국에서 빌린 돈을 당장 상환하는 것이지만, 몰디브가 그렇게 많은 외화를 보유하고 있을 리 없었다.
다른 방법이 있긴 했으나, 작전을 송두리째 바꿔야 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만…….”
겨울은 새로 구상한 작전을 조심스럽게 꺼내 놓았다.
사실 루퍼트 장관은 자기에게 부여된 역할이 내키지 않았다.
세계 최강대국의 국무장관이 중국의 외교부장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는데, 기분이 좋을 리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의 제안을 수용한 이유는 케냐와 모잠비크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큰 무리 없이 탈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겨울은 자기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는 듯 역할 변경을 요청해 왔다.
너무 기쁜 나머지 실례를 무릅쓰고 겨울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끼어들었다.
“한 부사장님, 나한테 부여된 역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수행하겠습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제가 괜히 말을 끊은 것 같네요. 계속 말씀하십시오.”
“이번 작전의 성패는 인도 정보국이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루퍼트 장관님에 의해서 뚜껑이 열린 천 외교부장은 틀림없이…….”
겨울의 설명을 듣고 있던 데사이 정보국장은 처음에 계획한 것보다 이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사실 무력을 사용해서 천유런 외교부장을 납치할 때 사상자라도 발생한다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테니까.
그렇다고 새롭게 부여된 임무가 수행하기 쉽다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임무를 깔끔하게 클리어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 봤지만, 마음만 앞섰을 뿐 기발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 때는 묘안을 제시한 사람에게 물어보는 방법이 최고였다.
“한 부사장님, 천 외교부장을 손쉽게 납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미인계를 사용하는 것이 어떨까요?”
“하하하,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천 외교부장을 납치하는 데 성공하면…….”
겨울의 설명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데사이 정보국장이 질문을 던졌다.
“한 부사장님, 우리 인도는 천 외교부장의 몸값으로 얼마를 받아 내야 합니까?”
“제가 어제 최대한 많이 받아 내라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아무리 천 외교부장이 중요 인물이라도 그렇게 많은 몸값을 중국 정부가 지불하려고 할까요?”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겨울보다 타일러 미국대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천 외교부장이 우리나라로 망명한다는 얘기가 시쥔량 중국 주석의 귀에 들어가게 하면 어떨까요?”
“시쥔량 주석이 과연 믿으려고 들까요?”
데사이 국장이 즉시 회의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루퍼트 장관님이 몰디브에 계신다는 소문을 살짝 흘려 주면, 믿기 싫어도 믿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아하, 그러면 되겠군요!”
“저희가 파악하고 있는 정보로는 천 외교부장이 상당히 많은 재산을 축적해 놓고 있답니다.”
“하하하, 그렇다는 말이지요?”
만족할 만한 수준의 대답이 나왔는지, 데사이 국장이 선홍색 잇몸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때는 왔다라고 생각한 하마드 부통령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데사이 국장님, 우리 몰디브에도 몸값을 일부 나눠 주십시오.”
“그럼요. 넉넉하게 나눠 드리겠습니다.”
* * *
천유런 외교부장은 몰디브에 출장 가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지금까지 케냐와 모잠비크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할 수 없던 배경에는 자국에서 빌려간 엄청나게 많은 돈이 있었다.
그런데 지난달 말에 두 나라는 자국에서 빌려간 돈을 모두 상환하겠다는 내용의 친서를 시쥔량 주석 앞으로 보내왔다.
그럴 리가 없다며 해당국의 대사관을 통해서 확인 작업에 돌입했지만, 결국 사실로 확인되었다.
미국이 제로 금리에 가까운 수준으로 두 나라에 차관을 제공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자국이 두 나라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문제는 두 나라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카드가 너무 빈약하다는 것에 있었다.
“하아…….”
천유런 외교부장이 내뱉는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왕지쉰 국장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 왔다.
“외교부장님, 걱정거리라도 있습니까?”
“왕 국장, 우리가 두 나라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문전박대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겁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칠리마 모잠비크 부통령과 루사토 케냐 부통령에게 뇌물을 주는 방법은 어떨까요?”
“두 부통령이 1,000만 달러에 만족하지는 않겠지?”
“네? 1억 달러도 아닌 겨우 1,000만 달러라고요?”
사실 천유런 외교부장은 시쥔량 주석에게 뇌물 액수로 1억 달러를 컨펌 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지쉰 국장에게 1,000만 달러라고 언급한 이유는 틈을 노려 나머지 돈을 챙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으로 보니 뇌물 액수를 줄이면 안 될 것 같았다.
“왕 국장, 처음부터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패를 보두 보여 줄 수는 없잖아.”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천유런 외교부장과 왕지쉰 국장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여객기는 말레 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