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찾아가는 서비스
토탈 컨소시엄과 H&J 컨설팅과의 송유관 건설공사 계약서는 새벽 4시 무렵에 완성됐다.
뿌요네 회장, 송훈석 회장, 정명훈 사장은 계약서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작성되었다고 판단하고,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토탈 컨소시엄 대표로는 뿌요네 회장이, H&J 컨설팅의 대표로 정명훈 사장이 계약서에 교차 사인했고, 마사카 부통령과 문두야 부통령이 증인 란에 서명했다.
모든 절차가 끝나자, 서동호 실장이 만족한 웃음을 머금으며 발언권을 요청했다.
“송유관 건설공사 계약을 기념하는 의미로 사진 촬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찰칵!
사진 촬영이 끝나자, 뿌요네 회장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계약서 작성을 위해서 수고해 주신 임직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드립니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숙소로 돌아가서 쉬시고, 다음 주중에 송유관 건설공사 계약을 축하하는 의미로 파티를 열도록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겨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밤을 거의 새다시피 했기 때문에 숙소로 돌아가는 차에 오르자마자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장대산 부사장은 두 시간 전에 입수한 첩보 때문에 잠을 쉽게 이루지 못했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앞자리에서 잠들어 있는 겨울을 흔들어 깨웠다.
“한 부사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얘기해 보세요.”
겨울이 힘겹게 눈을 뜨며 대답했다.
“최성진 부회장과 YCM 그룹의 임지태 회장이 조금 있다가 이곳으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네?! 왜요?”
겨울이 화들짝 놀라며 경악에 가까운 소리를 내뱉었다.
덕분에 잠에 취해 있던 사람들이 눈을 번쩍 떴다.
“송유관 건설공사와 잉가 3댐 건설공사 수주를 지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겨울은 가뜩이나 무거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이곳에 오면 수립해 놓은 계획을 다시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 부사장님, 두 사람이 이곳에 언제 도착할 예정입니까?”
“저녁 6시경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계획을 조금만 수정하면 되니까.
“송 회장님께 소식을 전달해 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연락할 생각이었습니다.”
장대산 부사장은 즉시, 서동호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입수한 정보를 전달해 주고, 통화를 종료했다.
그와 동시에 마음이 조급한 겨울의 질문이 이어졌다.
“장 부사장님, 서 실장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송 회장님께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십니다.”
“알겠습니다. 저는 두 분의 부통령님께 소식을 전할 테니까, 장 부사장님은 사장님께 연락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편, 앞서가는 승합차에서는 송훈석 회장이 서동호 실장과 긴급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회장님, 이번 기회에 최 부회장을 쳐내면 어떨까요?”
송훈석 회장은 최성진 부회장과 언젠가는 결별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은 그가 보유하고 있는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서 실장은 신경 쓰지 말라고.”
“네, 알겠습니다.”
송훈석 회장은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송지유에게 말을 걸었다.
“지유야, 계약서 작성 업무에 참여해 본 소감이 어때?”
“정말 유익하고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어떤 점에서?”
송지유는 이미 큰 틀에서 합의가 끝났기 때문에 계약서 작성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약서 작성에 돌입하자, 양측은 서로에게 유리한 조건을 계약서 삽입하기 위해서 한 치도 밀리지 않는 신경전을 벌였다.
특히 제일 중요한 결제 조건에 대해서 협상할 때에는 험악한 상태에 이를 정도로 상황이 긴박하게 흘러갔다.
다행히도 양측에서 조금씩 양보하는 바람에 결제 조건을 합의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송훈석 회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비즈니스맨들이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이렇게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 몰랐어요.”
“또 다른 점은?”
“한 부사장님의 영향력이 의외로 엄청나다는 점과 정호영 씨의 협상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점도 알게 됐어요.”
“정호영 씨가 그 정도였어?”
“저희와 H&J 컨설팅이 결제 조건 때문에 한창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도중에 정호영 씨가 절충안을 제시했고, 그게 그대로 통과됐거든요.”
“저는 정호영 씨가 그렇게 신박한 아이디어를 제시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협상에 직접 참여한 조병석 실장이 한마디 보탰다.
“우리가 정호영 씨한테 한턱내야겠구먼.”
송훈석 회장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여명이 밝아 오는 동쪽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 * *
최준하는 짜증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평소 같았으면 최성진 부회장이 프랑스에 오는 것을 두 손 들고 반겼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의도치 않았지만 자기는 어젯밤까지 포함해서 이미 세 번이나 사고를 저지른 상태였다.
이미 두 건에 대해서는 최성진 부회장의 귀에까지 들어갔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설 이사님, 아버지의 노기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설영석 이사는 조금 전에 박철헌 사장과 통화하면서 특명을 하나 받았다.
최준하가 최성진 부회장을 피해서 한국, 또는 다른 나라로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고 있으라는 지시였다.
대답은 알겠다고 했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다.
어젯밤에 최준하에게 당한 무시를 되갚아 주고 싶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밝히면 의심할 수 있으니까 듣기 좋은 얘기부터 꺼내 들었다.
“부회장님이 준하 씨를 혼내 주러 프랑스에 오시는 게 아니니까,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우리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서 하시는 말씀 같은데, 제가 사고 친 건에 대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냥 넘어간 적이 없습니다.”
“외삼촌인 임지태 회장님께 SOS를 치면 되잖아.”
“외삼촌도 아버지와 똑같은 분입니다.”
“그러게 사고를 치지 않았으면 됐잖아.”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뭡니까?”
아니나 다를까, 최준하가 발끈하며 덤벼들었다.
설영석 이사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판단 내리고, 조심스럽게 본심을 꺼내 놓았다.
“이럴 때 사용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Out of Sight, Out of Mind’가 무슨 뜻인지 알고 있지?”
자리를 피하라는 얘기였다.
최준하도 최성진 부회장의 눈을 피해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송훈석 회장의 수행원 자격으로 출장 온 상태였기 때문에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이런 마음을 읽고 있었다는 듯 설영석 이사는 생각지도 못한 해법을 알려 주었다.
“내일부터 주말이라는 거 알고 있지?”
즉, 모레까지 어디론가 떠났다가 돌아오라는 의미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성진 부회장이 프랑스에 도착하기 전에 도망치는 게 상책이었다.
“이사님, 제가 보이지 않으면, 도망쳤다 생각하세요.”
“로비를 통해서 호텔 밖으로 나가면 발각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지하 주차장을 통해서 몰래 도망치라고.”
“그렇게 할게요.”
“그런 줄 알고 있을 테니, 이제 가 봐.”
축객령을 받은 최준하가 떠나가자, 설영석 이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놈아,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야.”
* * *
“정호영,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겨울은 깊은 잠에 빠져 있던 호영을 흔들어 깨웠다.
“…몇 시냐?”
호영이 천천히 눈을 뜨며 목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11시.”
“다섯 시간이 이렇게 순식간에 흘러가다니… 아인슈타인 박사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네.”
“아인슈타인 박사님의 상대성 이론을 언급하는 거야?”
“어라? 네가 상대성이론을 어떻게 알고 있는데?”
“E=mc² 이론에 대해서도 설명해 줄까?”
“야, 됐다.”
“송 회장님의 스위트룸에서 식사하기로 했으니까, 참고하고 있어.”
샤워를 끝낸 호영이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와서 앉았다.
그런 호영을 향해 겨울이 궁금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목이 쉰 이유가 뭐야?”
호영은 새벽에 진행된 협상을 떠올리며 겨울의 질문에 대답했다.
“너는 계약서 작성 과정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모르지?”
“그것하고 네 목이 쉰 것하고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데?”
“누군가 협상을 중재해야 하는데, 그 역할을 수행할 사람이 나밖에 없었어.”
“하긴… 잘했다.”
딩동.
그때,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호영이 숙소 문을 열자, 장대산 부사장이 앞에 서 있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장대산 부사장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뭔가 용건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가 소파에 앉자마자, 겨울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장 부사장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최준하가 한 시간 전에 짐을 챙겨서 호텔을 빠져나갔습니다.”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설영석 이사한테 최성진 부회장이 이곳에 온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최 부회장한테 혼날까 봐 도망친 것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겨울은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최준하가 눈에 뵈는 것 없이 행동하는 안하무인이라도, 지금은 대한 그룹에 소속되어 있는 일개 직원에 불과하지 않은가.
게다가 놀러온 게 아니라 출장 온 상태였고.
절차상 출장지를 이탈하기 위해서는 책임자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무단결근처리 되기 때문에.
겨울의 물음에 장대산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최준하가 누군가에게 허락받았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하여간 가지가지 하는 놈이네요.”
* * *
같은 시각.
송훈석 회장의 스위트룸에서도 최준하와 관련된 대화가 오고가고 있었다.
“양 과장, 최준하가 어떤 내용으로 메모를 남겨 놨나?”
“내일과 모래가 휴일이기 때문에 스위스에 여행 다녀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송훈석 회장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들은 지금 두 건의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서 프랑스에 출장 온 상태였기 때문에 직원 모두 휴일을 평일과 다름없이 쓰고 있었다.
그런데 신입사원에 불과한 최준하가 휴일을 내세워 돌연 스위스로 떠나 버렸단다.
‘음, 최준하가 그 정도로 막나가는 놈은 아닌데… 돌발행동을 벌인 이유가 뭘까? 맞아! 그게 있었지?’
어렵지 않게 이유를 짐작해 낸 송훈석 회장은 양경운 과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인사팀에 얘기해서 무단결근 처리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피곤할 텐데, 돌아가서 편하게 휴식을 취하도록 하고.”
“네, 회장님.”
양경운 과장이 자리를 뜨자, 서동호 실장이 입을 열었다.
“최준하가 도망친 이유가 최성진 부회장 때문이겠죠?”
“아마도 그렇겠지.”
“최준하가 갑자기 망나니가 됐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가 뭘까요?”
“서 실장도 그렇게 생각했나?”
두 사람의 대화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조병석 실장이 말문을 열었다.
“회장님, 저는 한 부사장에 대한 열등감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군.”
“최준하가 한 부사장을 상대로 사고치지 못하도록 미리 대책을 수립해 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부사장은 미국 정보기관이 은밀하게 경호하고 있으니까 우리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아차, 제가 그 점을 깜빡하고 있었네요.”
딩동.
초인종 소리와 함께 점심 식사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송훈석 회장의 룸으로 찾아왔다.
모든 사람들이 모여들자, 장대산 부사장은 새벽에 입수한 정보를 입 밖으로 꺼냈다.
“…따라서 저희가 수립해 놓은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두 사람이 갑자기 프랑스에 방문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들은 두 건의 프로젝트를 어렵지 않게 수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면 될까요?”
“한 부사장님이 설명해 주실 겁니다.”
장대산 부사장이 2선으로 물러나고, 그 자리를 겨울이 차고 들어왔다.
“최성진 부회장은 두 분의 부통령님들을 만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할 겁니다. 그들의 수고를 덜어 주기 위해서 이번에는 찾아가는 서비스를 진행해 볼까 합니다.”
겨울은 수정된 계획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수고스럽겠지만, 칼리마니 실장님 또는 무세베니 실장님께서 움직여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너무 쉽게 그들의 요청을 수락하면 의심할 수 있으니까, 적당히 애간장을 태워 주셔야 합니다.”
“만약에 그들이 선물을 주겠다고 제안해 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푼돈은 받지 마십시오.”
“하하하, 알겠습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