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그녀의 가슴 아픈 사연
“안 바빠?”
점심 식사를 끝내고 사무실로 들어온 겨울은 뒤따라 들어온 호영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겨울과 호영은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같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소위 불알친구 사이였다.
눈빛만 봐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지 오래였다.
그가 자기를 따라 들어왔다는 의미는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뜸들이다 밥 타겠다.”
호영은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주저했다.
다름이 아니라, 어제 오후에 동대문 쇼핑몰에서 우연찮게 만난 조강희에 대한 얘기였기 때문에.
그녀와 통화는 가끔 하는 편이었으나, 만난 것은 작년 추석 이후 어제가 처음이었다.
밝고 명랑한 성격이 트레이드마크인 그녀였는데, 어제는 매우 어색했다.
자신감 없는 목소리와 그늘진 표정.
무언가 사연이 있음을 간파하고 이유를 캐물었으나, 그녀는 대답하기를 꺼려했다.
결국 근사한 저녁과 시원한 생맥주까지 사 주며 사연을 캐물은 끝에 겨우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의 겨울이 그녀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심사숙고한 끝에 조강희를 지금 이곳으로 부른 상태였다.
“너 강석이 동생, 강희 알지?”
“알지. 걔가 왜?”
“어제 만났는데, 작년 연말에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백수 상태라고 하더라.”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조강희가 찾아왔다고 보고했다.
겨울은 돌아가는 상황을 이제야 눈치채고, 호영에게 레이저를 쏘아 보내며 지시를 내렸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시고, 차는 손님에게 물어보고 얘기해 줄게요.”
“네, 부사장님.”
조강희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리저리 둘러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강희야, 오랜만이다.”
“겨울 오빠,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하, 당연히 아니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호영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놀란 사슴마냥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
조강희가 쭈뼛거리며 비어 있는 소파에 앉자, 호영이 말을 이어 나갔다.
“겨울이한테 네가 백수라는 얘기까지 했으니까, 나머지는 네가 얘기해.”
“…알겠어.”
물을 한 모금 마신 조강희는 대한전자 마케팅 연구소를 그만둘 때까지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녀는 연수 성적 2등이라는 영광의 꼬리표가 자신에게 치명타를 입힐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직장 상사들은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는지, 발령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업무를 떠안겼다.
그래도 나름 신입사원이랍시고 패기롭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업무를 꾸역꾸역 처리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체력의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팀장에게 업무를 줄여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했다.
그러나 신입사원 연수 성적 2등이 그 정도의 업무도 처리하지 못하냐면서 오히려 면박만 당했다.
또다시 이를 악물고 주어진 업무를 처리해 나갔지만… 결국 사표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래서 작년 연말에 입사 1년 만에 사표를 쓰고 퇴사했다.
그렇게 다른 회사에 취업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도중, 바람 쐬러 동대문 쇼핑몰에 갔다가 어제 우연찮게 호영을 만난 것이다.
호영에 의해서 생맥주집까지 끌려가 유도 심문을 당한 끝에 결국 지난 1년 동안의 일을 털어놓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얘기를 끝까지 들은 호영은 겨울과 관련해서 놀라운 소식을 알려 주었다.
밤새도록 깊은 고민한 끝에 호영의 충고대로 부딪혀 보기로 결정을 내리고, 이렇게 겨울을 찾아오게 되었다.
제법 긴 생각을 끝낸 조강희는 작정한 듯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빠 회사에 취직하고 싶은데, 가능할까?”
이미 겨울은 이와 유사한 얘기가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마음속으로도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네 실력을 알고 있는데 당연히 얼마든지 가능하지. 다만, 정해진 절차를 밟았으면 좋겠어.”
“어떻게 하면 돼?”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는 필수로 제출해야 하고, 면접도 봐야 해.”
조강희는 주저하지 않고 가방에서 클리어 파일을 꺼내 겨울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이력서랑 자기소개서야.”
겨울은 이미 조강희의 스펙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읽어 보지 않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내선 전화로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사장님과 장 부사장의 일정을 체크해 주세요.”
[두 분 모두 사무실에 계십니다.]
“사장님께 조금 있다가 제가 가겠다고 말씀해 주세요.”
[네, 부사장님.]
수화기를 내려놓은 겨울이 조강희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아예 면접까지 끝내 버릴래?”
“어… 그래도 돼?
“그럼. 호영이, 너는 어떻게 할래?”
“나는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은센기 사장이나 만나러 가야겠다.”
“뭐야? 은센기 사장을 기다리게 했어?”
“어쩌다 보니. 아무튼 나는 이만.”
후다닥.
괜히 한소리 들을 것 같았는지, 호영이 재빨리 밖으로 도망쳤다.
“어휴, 언젠가 저놈을 손보던가 해야지.”
* * *
사장실.
겨울에게 조강희를 소개받은 정명훈 사장은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강희 씨, 한 부사장과 어떤 관계인지 물어도 될까요?”
“한 부사장님의 고향 후배고, 대한 그룹 입사 동기이기도 합니다.”
“오, 그럼 장 부사장도 알고 있겠네요?”
“네. 저희 부릉부릉 팀의 아홉 번째 멤버였습니다.”
“아, 강희 씨도 그 팀의 멤버였군요. 그런데 오늘 저를 이렇게 찾아온 이유가 뭔가요?”
“사실은 한 부사장님께 입사를 청탁하러 왔습니다.”
“하하, 너무 솔직한 거 아닙니까?”
정명훈 사장이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제가 1년 남짓 대한전자 마케팅 연구소에서 근무하며 느낀 점은 거짓은 진실을 덮을 수 없다는 겁니다.”
많은 것을 경험한 듯한 그녀의 발언에 정명훈 사장은 깊은 호기심이 일었다.
“흐음, 뭔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말이네요. 1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야기해 줄 수 있나요?”
“저는 작년 신입사원 연수에서 한 부사장님의 도움으로 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배치 받고 싶은 마케팅 연구소에서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조강희의 이야기를 듣던 정명훈 사장은 괜히 가슴이 찡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었다.
큰애가 이제 대학교 4학년이니까, 조강희와 한두 살 정도 차이가 날 것이다.
만약에 자신의 딸이 조강희처럼 1년 가까이 마음고생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면,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녀는 남 탓을 전혀 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본인에게 돌리고 있었다.
짠하던 마음이 시나브로 대견한 마음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문득 정명훈 사장은 그녀의 얘기에서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우선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발령 당시부터 팀장님께 제 능력이 부족하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렸더라면, 아직도 대한전자에서 근무하고 있었을 겁니다.”
“조강희 씨, 정말로 스스로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전에는 아니었습니다만… 대한전자에 다니는 동안 제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는 가지고 왔나요?”
“네. 여기 있습니다.”
조강희에게 건네받은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를 꼼꼼하게 읽어 본 정명훈 사장은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그녀가 졸업한 Y대 경영학과는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명문 학과일 뿐만 아니라, 토익 점수 또한 990점, 만점의 실력자였다.
그 외의 스펙 또한 빠지는 것이 없었고.
서류와 면접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당찬 면모로 보아, 다른 이유로 마음고생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이유는 보나마나 빤했지만, 이 자리에서 언급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조강희 씨, 영어는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다른 외국어는요?”
“일본어와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조강희 씨를 채용하면, 어느 부서에서 근무하고 싶습니까?”
“어디든 상관없지만, 굳이 선택하라고 하면 아프리카 무역팀에서 근무하고 싶습니다.”
“아프리카 무역팀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어제 저녁때 정호영 씨의 소개로 가쿠타 부장님과 인사를 나눴습니다.”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던 정명훈 사장은 이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부서 배치는 한 부사장과 상의해서 알려 줄게요.”
“저어… 제가 H&J 컨설팅에 채용된 겁니까?”
조강희는 빠른 결정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네, 맞아요. 우리 회사에서 마음껏 꿈을 펼쳐 보세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언제부터 근무가 가능합니까?”
“다음 주부터 근무하겠습니다.”
“알았어요. 다음 주에 봅시다.”
조강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녀를 향해 겨울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희 씨, 집에 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5시 30분까지 우리 회사 로비로 오세요.”
“네… 네? 출근은 다음 주라고…….”
“후후, 오늘은 부릉부릉 동기 모임이 있는 날이잖아요. 몰랐어요?”
“으음, 대한 그룹을 퇴사했는데, 괜찮을지…….”
“퇴사한 건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뭘.”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대답하고 조강희가 밖으로 나가자, 정명훈 사장은 생각할 것이 있는지 잠시 입을 닫았다.
덕분에 넓은 집무실에는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생각을 끝낸 정명훈 사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한 부사장, 조강희 씨를 아프리카 무역팀에 근무시키는 것보다 투자분석 검증팀에 배치하는 게 어떨까?”
“사장님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장 부사장은 어떻게 생각해?”
“저도 찬성입니다.”
“그리고 조강희 씨가 대한전자에서 근무하는 동안에 마음의 상처를 많이 입은 것 같으니까, 당분간 부담 주지 말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가서 일들 보라고.”
두 사람이 밖으로 퇴장하자, 정명훈 사장은 주저하지 않고 대한 그룹에서 인사담당을 맡고 있는 정재엽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정 사장님.]
“사장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네, 말씀하십시오.]
“대한전자 마케팅 연구소에 작년 12월까지 조강희라는 신입사원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네, 그런데요?]
“방금 전에 조강희 씨가 저희 회사에 면접을 보고 갔는데, 이런저런 대화 끝에 팀장과 팀원들한테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아이고, 저런…….]
정재엽 사장이 안타까워하는 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조강희 씨와 한겨울 부사장이 매우 친하다는 겁니다. 만약에 한 부사장이 회장님께 그녀와 관련된 얘기를 꺼내기라도 한다면, 초대형 사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정 사장님, 조강희 씨가 직장 상사로부터 괴롭힘 당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조강희 씨는 본인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며 자책하더군요.”
[알았어요. 제가 조사해 보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 볼게요.]
“괜한 일로 부탁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럼 나중에 또 전화하겠습니다.]
* * *
딸깍.
정명훈 사장과 통화를 끝낸 정재엽 사장은 소파에 몸을 파묻고 생각에 잠겼다.
“회장님 귀에 들어가기 전에 끝을 내려면…….”
결심을 굳힌 그는 핸드폰을 들어서 누군가와 짧게 통화한 후,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연락을 받은 임용식 대한전자 사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임 사장, 생각보다 빨리 왔네?”
“선배님의 호출인데, 빨리 달려와야죠.”
임용식 사장이 자리에 앉자, 정재엽 인사담당 사장은 시간이 없음을 깨닫고 곧바로 말을 이어 나갔다.
“임 사장, 요즘 회장님이 제일 어렵게 대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H&J 컨설팅의 한겨울 부사장이잖아요.”
“이제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한 부사장과 관련한 얘기야.”
“말씀하십시오.”
심상치 않은 일임을 감지한 임용식 사장은 상체를 정재엽 사장 쪽으로 기울이며 집중했다.
“작년 연말까지 대한전자 마케팅 연구소에 조강희라는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어.”
정재엽 사장은 정명훈 사장에게 들은 얘기를 언급하고 이어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회장님께서 알게 되면, 임 사장한테도 화가 미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최대한 빨리 진상을 정확하게 규명하고, 완벽하게 조치를 취해.”
“네, 알겠습니다.”
마음 급한 임용식 사장이 사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내 역할은 이제부터 시작인 건가?”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