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흙수저 성공 신화-163화 (163/328)

[163화]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린 그녀

“강희야, 여기야.”

손을 흔들고 있는 겨울을 발견한 조강희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서 깍듯하게 인사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사장님,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회사 밖에서는 편하게 불러.”

“그래도 돼…요?”

조강희가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에야 반가운 마음에 평소처럼 대했지만, 조금씩 겨울이 거물이라는 사실이 와닿기 시작하자 괜히 어색해진 그녀였다.

“그럼. 너랑 나 사이에 그런 불편한 관계는 나도 싫어.”

“으, 응. 그런데 대산 오빠는 동기 모임에 같이 안 가는 거야…요?”

“그냥 말 편하게… 됐다… 할 일이 있다고 우리 먼저 가라고 하더라.”

겨울과 함께 지하주차장으로 이동한 조강희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한눈에 봐도 엄청 비싸 보이는 대형 승용차가 자신들 앞으로 다가와서 멈추고는 운전기사가 내리더니 겨울과 자신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는 게 아닌가.

“오, 오빠… 이게 뭐야? 몰카나 그런 거 아니지?”

크게 놀랐는지 존댓말 하는 것도 잊고 조강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몰카는 무슨… 뭐해? 빨리 타지 않고.”

“알, 알겠어…요.”

그녀가 문을 열려고 손을 뻗자, 서 있던 운전기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겨울이 먼저 타고 그 옆에 착석한 조강희가 문을 닫으려고 손을 뻗자, 운전기사가 한발 앞서 빠르게 문을 닫았다.

그녀는 운전석으로 돌아와 벨트를 매고 있는 운전기사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 인사말을 건넸다.

“기사님, 감사합니다.”

“하하, 별말씀을요.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홍 기사님, 장 부사장은 위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겨울의 지시에 짧게 대답한 홍석훈 기사가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떼고 액셀러레이터를 살짝 밟았다.

육중한 몸을 자랑하고 있던 벤츠 마이바흐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지상으로 올라온 자동차가 DH빌딩 정문 앞에 정차하자, 기다리고 있던 장대산 부사장이 조수석 문을 열고 착석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조강희는 모든 것이 자기를 배려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H&J에 입사가 결정된 이상, 세 사람이 같이 이동하면 당연히 자기가 조수석에 앉아야 한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장대산 부사장이 일부러 늦게 합류해서, 자기를 뒤에 앉히고 본인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착석한 것이다.

그의 의도를 눈치챘는데, 이대로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장 부사장님, 제가 조수석에 앉겠습니다.”

“됐어. 이미 앉았는데 뭘. 홍 기사님, 출발하시죠?”

안절부절못하는 조강희에게 겨울이 편안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강희야, 너는 나하고 장 부사장이 불편하니?”

“그으… 불편한 건 아니지만, 어려운 건 사실…입니다.”

“조금 전에도 회사 밖에서는 편하게 하라고 했잖아. 그냥 전처럼 해.”

“그래도 어떻게…….”

“그 비글 같던 조강희가 왜 이렇게 변했어? 오히려 예전의 나보다 더 소심해진 거 같은데?”

조수석에 앉아 있던 장대산 부사장이 강희의 말을 자르고 한마디 했다.

“그, 그게…….”

“대한전자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이번에는 겨울이 강희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

“아, 아니야. 그분들은 나한테 잘해 줬어…….”

“후우, 아무튼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네가 다음 주부터 근무할 부서가 결정됐어.”

“어디인데…요?”

“투자분석 검증팀이라고, 장 부사장님을 보좌할 조직이야.”

“어… 정확히 뭐하는 곳인데요?”

“네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게 될지는 장 부사장님이 얘기해 줄 거야.”

겨울이 장대산 부사장에게 발언할 기회를 넘겨주고, 뒤로 물러났다.

“우리 회사는 H&J Investment라는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어. 그 회사는…….”

장대산 부사장은 H&J Investment과 투자분석 검증팀의 비즈니스 영역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단,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은 철저하게 숨겼다.

“…한 부사장님의 친동생인 가을 씨도 그 팀에 근무하고 있는 중이야.”

조강희는 가을과 같은 팀에 근무할 예정이라는 얘기를 듣는 순간, 긴장감에 떨리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산 오빠,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

“오, 뭐야? 갑자기 의욕이 생겼나 보네? 어. 가을 씨는 지난 월요일부터 근무하고 있어. 참고로 이재성 씨도 다음 주부터 우리 회사에서 근무할 예정이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와아… 이러다가 부릉부릉 팀원들 모두 우리 회사로 오는 거 아냐?”

“네가 원한다면 가능하지.”

조강희는 장대산 부사장이 자기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농담한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부릉부릉 팀원들은 스카우트가 가능할 수 있지만, 대한 그룹 후계자인 송지유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농담은 농담으로 받는 법.

“지유 언니는 어떤 방법으로 스카우트 하려고 그렇게 자신만만해?”

“아차, 지유 씨가 있었구나.”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겨울은 그동안 잊고 있던 송지유를 떠올렸다.

그녀와는 신입사원 연수 마지막 날에 작별 인사를 나눈 이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프리카 법인으로 떠나기 직전에 가진 송별식에도 그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재성 대리가 가끔 그녀의 근황을 알려 주었으나, 자기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예 기억에 담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상황이 이렇게 바뀌리라고 누군들 예상이나 했을까.

짧은 시간에 이렇게 그녀와 동등하게 맞설 수 있는 자리에까지 올라오리라고는 그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다.

그동안 그녀가 자신의 소식을 듣고 있었는지 문득 궁금했다.

송훈석 회장을 통해서 얘기를 전해 들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겨울이 이런저런 공상에 빠져 있는 사이,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아이고, 아쉬워라.”

“뭐가?”

“말하지 말고 대산 오빠하고 내기할걸. 그럼 내가 이겼을 텐데.”

“날 이겨 먹어서 어디다 쓰려고…….”

“무려 장 부사장님한테서 내기로 이긴 거라고? 소원권이라도 하나 받아 놓으면… 흐흐.”

“…너 아까 긴장한 거 다 연기지? 어휴, 그럼 지유 씨를 너하고 같이 근무할 수 있게 만들면 어떻게 할래?”

조강희는 장대산 부사장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하나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절대로 허언을 내뱉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가 이런 말을 꺼냈다는 의미는 무언가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방법이 무엇인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서, 그가 걸어오는 내기에 응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오? 한 달 동안 오빠의 여자 친구가 되어 줄게. 모쏠 하나 구제시켜 준다 생각하고 희생하지 뭐. 만약 오빠가 지면 어떻게 할 건데?”

“애가 못하는 소리가 없네… 내가 지면 널 대리로 승진시켜 줄게.”

“정말?! 나중에 다른 소리하기 없기다?”

“물론.”

그때, 겨울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큭큭큭. 강희야, 다른 보상을 요구하는 게 좋을걸?”

“어? 왜?”

“어차피 H&J Investment에 입사하는 순간부터 너한테 대리라는 직위가 부여될 예정이거든.”

“뭐?! 대산 오빠, 진짜야?”

사실 장대산 부사장은 송지유를 투자분석 검증팀에 근무시킬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전략기획실의 조병석 실장한테 그녀를 태스크 포스에 합류시켜 달라고 부탁하면 되니까.

그렇게 되면 그녀는 대한 그룹을 퇴사하지 않고도, 투자분석 검증팀에 근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의사를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크흠… 우, 우리 내기는 없던 걸로 할까?”

그렇게 한동안 둘이 투닥거리던 중에 겨울이 입을 열었다.

“이제 좀 마음이 편해졌나 보네.”

“응. 부사장이니 뭐니 해도 역시 오빠들은 오빠들이구나 싶어.”

“그럼 오빠들한테 지난 1년 동안 대한전자 마케팅 연구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좀 해 주면 안 돼?”

조강희는 겨울이 동기 모임에 같이 가자고 제안할 때부터 지금과 같은 일이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럴듯한 답변거리를 만들어 놓았다.

“신입사원 연수성적 2등의 저주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그렇게 뭉뚱그려서 얘기하지 말고, 자세하게 얘기해 봐.”

“그냥… 내 능력을 과대평가한 직장 상사들이 업무를 많이 배정하는 바람에 감당하지 못하고 퇴사한 거지 뭐…….”

조강희의 얘기를 들은 겨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구소 조직의 특성상 그녀 외에도 많은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을 것이다.

조강희가 연수 성적이 2등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3개월 정도는 수습 기간이라고 해서 조직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을 준다.

그런데 발령받자마자 그녀에게 과중한 업무를 맡기는 것은 뭔가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이유를 캐묻고 싶었으나, 괜히 그녀가 스트레스를 받을 거 같아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어휴, 능력이 뛰어나서 문제가 되는 건 또 처음이네.”

“아니야. 거품이 끼어 있던 게 들통난 거지…….”

“내가 너를 모르냐?”

그때,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장대산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장 부사장이 웬일이야?]

“회장님, 부탁드릴 게 하나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얘기해 봐.]

장대산 부사장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송훈석 회장의 목소리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한 부사장이 친동생처럼 여기는 조강희 씨라고 있는데, 작년 연말까지 대한전자 마케팅 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퇴사했습니다. 본인은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하는데, 퇴사 이유가 석연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음, 실제로 능력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지 않나?]

“조강희 씨가 어떤 사람인지 송지유 씨도 잘 알 겁니다.”

[우리 지유가 조강희 씨를 어떻게 알고 있어?]

“입사 동기입니다.”

[흐음, 장 부사장이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눈여겨보고 있던 인재이기도 하고, 이번 일을 계기로 저희 회사에 입사하기로 했습니다.”

[알았네. 나중에 통화하자고.]

뚝.

다급했는지 송훈석 회장이 전화를 먼저 끊었다.

그와 동시에 조강희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서, 설마… 대한 그룹 회장님하고 통화한 거 아니지?”

“설마가 맞아.”

“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냐……?”

“나는 네가 대한전자에서 퇴사한 정확한 이유를 알아보려고 한 것뿐이야.”

“그래도…….”

끝말을 흐린 조강희는 불안한 표정으로 노을이 붉게 타고 있는 서쪽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 * *

장대산 부사장과 통화가 끝내기를 기다리고 있던 서동호 실장이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회장님, 장 부사장이 뭐라고 했습니까?”

“한 부사장이 친동생처럼…….”

송훈석 회장은 장대산 부사장과 통화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얘기를 전해 들은 서동호 실장은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즉시 송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실장님.]

“지유야, 혹시 조강희라고 아니?”

[어… 제 입사 동기 중에 같은 이름이 있긴 한데, 그 사람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

[알고 있어요. 강희한테 무슨 문제가 있나요?]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해 줄 테니까, 급한 것부터 물어보자.”

[네, 말씀하십시오.]

상황이 심각함을 깨달았는지, 송지유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사무적으로 변했다.

“조강희 씨와 한겨울 부사장과의 사이가 어떠니?”

[친한 사이입니다. 특히 강희가 한 부사장님을 많이 좋아했어요.]

서동호 실장은 송지유의 대답에서 귀중한 힌트를 하나 얻었다.

그녀도 겨울의 근황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조강희 씨의 능력은 어떤지 알고 있니?”

[신입사원 연수 성적 2등이 강희였습니다.]

“성격은 어때?”

[밝고 명랑한 성격이고, 뭔가 집중할 때는 의외로 독종인 면도 있습니다.]

“최근에 조강희 씨를 만나거나 통화한 적이 언제니?”

[작년 연말에 회사를 그만둘 때 만난 게 마지막입니다.]

“그 당시에 조강희 씨가 뭐라고 했는지 얘기해 줄 수 있니?”

[능력이 부족해서 퇴사한다는… 아차, 매우 지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알았다. 나중에 통화하자.”

[실장님,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조강희 씨가 H&J 컨설팅에 입사했는데…….”

서동호 실장은 송훈석 회장에게 들은 얘기를 가감 없이 전달했다.

[실장님, 한 부사장님이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최대한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용건을 마친 서동호 실장은 송지유에게 궁금하게 여기던 점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너는 한 부사장의 동향을 누구를 통해서 들었냐?”

[당연히 아빠죠. 요즘 아빠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하고 있어요.]

‘뭐야? 벌써 작업에 들어갔다는 말인가?’

속으로 혼잣말을 내뱉고, 송지유와 통화를 이어 나갔다.

“오늘 한 부사장을 만나면, 나하고 통화한 얘기는 절대로 언급하지 마라.”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이제 진짜로 나중에 통화하자.”

[네, 실장님.]

서동호 실장이 송지유와 통화를 끝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송훈석 회장이 입을 열었다.

“대한전자의 임용식 사장을 불러 올려.”

“네, 회장님.”

흙수저 성공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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