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대를 위해서 소를 포기할 수도 있는 법
겨울과 호영이 상기된 얼굴로 임원 회의실로 들어와서 비어 있는 자리에 착석하자, 정상호 사장이 입을 열었다.
“임원 여러분, 정호영 사원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우리 회사와 파트너십을 체결할 예정인 H&J 컨설팅의 한겨울 부사장입니다. 한 부사장께 H&J 컨설팅이 어떤 회사인지 간략하게 들어 보는 게 어떨까요?”
“네, 좋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겨울은 SH무역 임원들에게 허리 숙여 정중하게 인사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방금 전에 정상호 사장님께 소개받은 한겨울이라고 합니다. 저희 H&J 컨설팅은…….”
겨울은 H&J 컨설팅 설립 배경 및 비즈니스 영역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당연히 민감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은 철저하게 숨길 수밖에 없었다.
“…나이지리아의 NIGA에 정수기 20만 대를 수출하는 건도 제가 관여되어 있습니다.”
“콩고민주공화국에 홍삼 선물 세트 등을 수출하는 건도 한 부사장님이 관여해서 수주한 겁니다.”
겨울의 뒤를 이어서 호영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한 부사장님, 저는 아프리카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구명수 전무라고 합니다. 정수기 20만 대의 납기를 촉박하게 결정한 이유가 있습니까?”
“지난달 말에 제가 NIGA의 모우라 사장님과 만나서 협상할 때에는 4월 말부터 4만 대씩 5회에 걸쳐서 선적하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SH무역의 정수기 공급 능력을 확인하지 않고, 은센기 사장이 덜커덕 일을 저질러 버린 상태입니다.”
“음, 그렇군요. 정수기 공급 시기를 조절하면 안 되겠습니까?”
사실 겨울도 그 문제에 대해서 호영과 진지하게 의견을 나눴고,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결론을 도출해 놓은 상태였다.
“먼저 해결 방안을 찾아보고 도저히 방법이 없으면, NIGA 측에 SOS를 치도록 하겠습니다.”
“한 부사장님께서는 생각해 놓은 해결 방안이 있습니까?”
“저는 같은 성능을 가진 다른 회사의 정수기를 공급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저도 한 대리님과 생각이 같기는 합니다만, 과연 바이어가 동의할까요?”
겨울은 그 문제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모우라 사장은 정수기 브랜드보다 성능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제가 책임지고 바이어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50대와 40대로 보이는 남자들이 급하게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상호 사장이 벌떡 일어나서 나이가 많은 사람한테 말을 건넸다.
“박종훈 사장님, 급하게 오시라고 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일단 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호영이 현재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자세하게 언급했다.
“제가 지난달 말에 전화로 말씀드린…….”
청우정수기의 박종훈 사장은 정수기 20만 대를 바이어가 원하는 납기에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부지런히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정수기 제조 회사에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방식, 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을 주는 방법이 최고였으나, 이 방법도 결정적인 문제가 두 가지 있었다.
OEM으로 정수기를 제조할 때 사용되는 부품들은 발주자가 공급해 주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워낙 납기가 촉박하다 보니 짧은 시간 동안에 모든 부품들을 준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설령 부품을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원하는 가격에 OEM으로 생산해 줄지는 미지수였다.
그렇다고 H&E 트레이딩에 정수기 20만 대 공급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포기하는 순간, SH무역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른 정수기 제조 회사에 오퍼를 보낼 것이기 때문에.
그가 머리를 쥐어짜내며 해법을 고민하고 있는 사이, 호영의 긴 설명이 끝이 났다.
“…저희는 아프리카 시장 확대를 위해서라도 죽으나 사나, H&E 트레이딩에 정수기 20만 대를 공급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SH무역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저희 회사는 죽었다 깨어나도 납기에 맞춰서 정수기를 공급할 수 없습니다.”
“다른 정수기 제조 회사에 OEM 주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저도 그 생각을 해 봤지만…….”
겨울은 플랜 B를 가동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매몰차게 얘기할 수는 없어서 박종훈 사장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눠 보기로 마음먹었다.
조용히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박종훈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H&J 컨설팅의 한겨울 부사장이라고 합니다.”
“아, 네.”
박종훈 사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았다.
겨울은 그의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H&E 트레이딩에 정수기 20만 대를 H&E 트레이딩에 수출하는 건은 제가 당사자이기 때문에 급하게 대화에 끼어들었습니다.”
“혹시… 정수기 5만 대를 수출하는 건도 한 부사장님이 관여하셨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제가 미국 출장 당시에 최종 바이어들과 직접 상담했습니다.”
“어이쿠, 몰라봐서 정말 죄송합니다.”
박종훈 사장이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히며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정수기 20만 대 수출 건에 대해서 추가로 부연 설명해 드리면, 최종 바이어는 나이지리아 정부입니다. 저희 회사와 나이지리아 정부와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이 제법 많기 때문에 최대한 납기를 맞춰줘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사장님께는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청우정수기 측에서 획기적인 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으면, 다른 정수기 제조 회사와 접촉할 수밖에 없습니다.”
청우정수기에서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는 장영호 부사장은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는 것이 진심으로 아쉬웠다.
급성장을 보이고 있는 아프리카 정수기 시장에서 자사 제품의 판매를 증대하기 위해서는 겨울과 지속적인 거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결정적으로 계약서 작성과 동시에 물품 대금을 전액을 지급해 주는 양질의 바이어를 어디서 만난다는 말인가.
대를 위해서 소를 포기할 수도 있는 법.
결심을 굳히고 손을 번쩍 들고 발언권을 요청했다.
“한겨울 부사장님, 저는 청우정수기의 장영호 부사장이라고 합니다. 급하게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나이지리아 정부에 반드시 동일 성능의 정수기를 공급해야 합니까?”
“가급적이면 그러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사실은 저희가 기존 정수기에 비해서 정수 능력이 뛰어난 프리미엄 정수기 재고를 제법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프리미엄 정수기를 나이지리아 정부에 공급하면 어떻겠습니까?”
“기존 정수기와의 가격 차이는 어떻습니까?”
“20달러 정도 비싼 편입니다.”
즉, 400만 달러의 이익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였다.
겨울은 정수기의 이익 구조를 알고 있었다.
SH무역은 청우정수기로부터 공장 출고 조건으로 정수기를 대당 260달러에 매입하기로 했다.
H&E 트레이딩에는 FOB(Free on Board, 수출자는 바이어가 지정하는 항구의 정박된 선박에 선적해 주는 조건)조건으로 대당 280달러에 수출하기로 했고.
20달러의 마진 속에는 청우정수기 공장에서 부산항까지 육상 운송 및 각종 부대 비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이익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여기에 H&E 트레이딩은 이익 25%에 해운 운송비, 관세 등을 추가해서 NIGA에 납품하는 것이고.
느낌상 청우정수기도 정수기 판매 이익을 많이 책정하지 않은 것 같았다.
“장 부사장님, 민감한 질문이 될 수 있는데, 정수기를 SH무역에 공급할 때의 이익을 얼마를 책정했습니까?”
장영호 부사장은 컨펌을 받기 위해서 박종훈 사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실대로 얘기해 주세요.”
“네, 사장님.”
짧게 대답한 장영호 부사장은 겨울의 질문에 대답했다.
“대당 25달러 이익을 책정한 상태입니다.”
즉, 10.6%의 영업 이익을 책정했다는 뜻.
이 중에서 인건비를 비롯한 각종 부대 비용을 제외하면, 순이익은 5달러 정도로 대폭 줄어든다.
프리미엄 정수기를 260달러에 SH무역에 공급하면, 대당 15달러 정도 적자라는 결론이 나온다.
겨울은 양심에 털이 나지 않은 이상, 청우정수기 측의 제안을 액면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었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장영수 부사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장 부사장님, 프리미엄 정수기 공급 계획을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먼저 1차로 선적해야 할 10만 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재고로 5만 대 정도를 보유하고 있고, 3월 말까지 공장을 풀가동하면 약 5만 대 정도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4월 초에는 SH무역에 넘겨줄 수 있습니다.”
“2차로 선적해야 할 10만 대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일반 정수기 생산 라인을 프리미엄 정수기로 전환하면 아무리 늦어도 5월 10일까지는 10만 대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프리미엄 정수기 생산 라인을 일반 정수기 생산 라인으로 전환하면 안 됩니까?”
“저도 그 생각을 잠깐 해 봤지만, 일반 정수기 부품을 조달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좋습니다. 청우정수기 측의 제안을 수용하겠습니다.”
겨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마치 사전에 짰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박종훈 사장과 장영호 부사장이 겨울에게 정중한 자세로 인사를 해 온 것이다.
“감사합니다, 한겨울 부사장님.”
“아직 드릴 말씀이 남아 있으니까, 앉아서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겨울이 말을 이어 나갔다.
“자금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니까, 제 말씀을 잘 들어 주십시오.”
“네, 말씀하십시오.”
“SH무역 측은 최대한 빨리 제안서를 작성해서 저한테 발송해 주십시오. 이때의 단가는 대당 300달러입니다.”
“네?! 정말입니까?”
겨울의 얘기를 듣고 있던 호영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회사의 이익이 너무 많습니다.”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겁니다.”
호영은 겨울의 의도를 단박에 눈치챘다.
“저희는 청우정수기 측에 기존의 260달러가 아니라 대당 280달러를 지급하면 되겠네요?”
“역시 제 의도를 정확하게 눈치채셨네요.”
박종훈 사장이 긴급하게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한 부사장님의 제안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만, H&E 트레이딩에서 심하게 반발하지 않을까요?”
겨울은 그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진즉에 수립해 놓고 있었다.
자기에게 배정된 이익 중에서 일부를 덜어 내서 청우정수기 측에 되돌리는 방법이었다.
자기 몫이 대폭 줄어들기 때문에 당연히 아깝기는 했지만, 그 방법이 현재로서는 최선이었다.
“박 사장님,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도록 할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한편, SH무역에서 자금을 담당하고 있는 이기수 부사장은 큰일 났다는 생각뿐이었다.
청우정수기 측에 선급금으로 지급할 자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콩고의 H&E 트레이딩 측과 최대한 빨리 계약을 체결하고 선수금을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은센기 사장은 다음 주에나 우리나라에 입국해서 계약서를 작성할 예정에 있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겨울에게 사정을 얘기해 보기로 결정했다.
“한 부사장님, 저는 자금을 담당하고 있는 이기수 부사장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이 부사장님.”
“긴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경청하겠습니다.”
“저희는 지난달에 H&E 트레이딩으로부터 일반형 정수기 5만 대를 발주받은 상태입니다만, 아직 정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청우정수기 측에 선급금으로 1,300만 달러를 지급한 상태입니다.”
겨울은 이기수 부사장의 의도를 정확하게 캐치했다.
청우정수기 측에 프리미엄 정수기를 발주하기 위해서는 선급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당장 자금이 부족하다는 얘기였다.
어차피 지급해야 할 선급금이었기 때문에 차일피일 미룰 필요는 없었다.
“이 부사장님, H&E 트레이딩에서 SH무역에 7,300만 달러를 선급금으로 지급하면 됩니까?”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