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죽으나 사나 직진
대한민국으로 귀국길에 오른 겨울은 편안한 퍼스트 클래스에 앉아서 지나온 날들의 기억을 반추해 보았다.
뭐니 뭐니 해도 지난 11개월 동안의 아프리카 생활은 자신의 인생에서 백미라고 할 수 있었다.
대한 그룹에 입사할 때 약점이던 영어와 프랑스어를 아프리카에서 완벽하게 습득했다.
동생의 월세방에 얹혀 살 정도로 빈털터리이던 재산도 엄청나게 많이 늘어나 있었다.
또한 콩고민주공화국을 비롯한 네 개 나라의 대통령들뿐만 아니라, 해리슨 상원의원을 포함한 미국의 실력자들과도 교류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결정적으로 H&J 컨설팅과 자산이 1,000억 달러인 H&J Investment의 최대주주로 신분이 바뀌어 있었다.
겨울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승무원의 안내 방송이 시작됐다.
[저희 비행기는 잠시 후, 대한민국의 인천국제공항에…….]
“드디어 한국에 도착했네.”
윙윙―
겨울이 입국 심사를 끝내고, 수화물을 찾으러 이동하던 도중에 점퍼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한 겨울은 빙그레 웃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가 웬일이냐?”
[도착했니?]
“방금 전에.”
[고생했다. 바빠서 공항에 나가지 못했으니까, 저녁때 삼겹살에 소주나 한잔하자.]
장난은 장난으로 대응하는 법.
“오늘은 바빠서 힘들고, 시간 날 때 한번 보자.”
[그러던가.]
뚝.
삐쳤다는 듯 호영이 전화를 먼저 끊었다.
“후후, 네가 아무리 그래 봐야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냐?”
수하물이 담긴 카트를 끌고 입국장 문을 열고 나가자, 예상한 대로 호영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한겨울, 귀국을 환영한다.”
“바쁘다며?”
“농담을 진담으로 받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냐?”
“놈?”
“이 인간이 기내식을 잘못 먹었나? 왜 이렇게 까칠해?”
“빅 바이어를 너무 함부로 대하는 거 아니야?”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따라와.”
* * *
“내가 오는 거 어떻게 알고 있었냐?”
조수석에 올라탄 겨울이 안전벨트를 매면서 물었다.
“부투야 부장이 전화해서 친절하게 알려 주더라.”
“어쩐지.”
“왜 이렇게 귀국이 늦은 거냐?”
애초에 겨울은 지난 주말에 한국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루군다 우간다 대통령과 마자리 탄자니아 대통령이 송별식을 해 준다며 초대하는 바람에, 정명훈 사장 등과 함께 두 나라에 출장 다녀오느라 귀국 일정이 미뤄졌다.
“비즈니스 때문에.”
“일감은 많이 수주했냐?”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곧 진행해야 할 일들이 제법 있어.”
“우리 회사에 나눠 줄 일감은?”
“찾아보면 있을 거야.”
“작은 아버지가 너를 만나 봤으면 하는데, 언제가 좋을까?”
“정 사장님이 내일 귀국하신다고 했으니까, 다음 주쯤에 같이 만나는 게 어떨까?”
“그럼 그렇게 하자.”
윙윙―
그때,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나이지리아에서 오코사 실장과 천유런 외교부장과의 협상을 지켜보고 있는 하도진 이사가 건 전화였다.
“네, 하 이사님.”
[부사장님, 어제 오후부터 천 외교부장이 협상에 진지하게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코사 실장과 천유런 외교부장과의 협상은 지난달 27일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어제 오전까지 중국 측에서 양면 전술을 사용해 오는 바람에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천유런 외교부장은 협상에 성실하게 임하는 척 하면서 각국의 대사관을 동원해서 연합군들을 각개격파 하는 전략을 취해 왔다.
다행히도 단일대오를 형성한 연합군들은 중국의 각개격파 전략에 말려들지 않았다.
중국은 연합군들을 와해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판단했는지, 드디어 협상 전략을 수정한 듯했다.
“오코사 실장님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어젯밤에 중국 측에 아무런 통보 없이 콩고민주공화국으로 출장 떠났습니다.]
협상 대표는 협상이 종료될 때까지 협상 테이블을 떠나지 않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였다.
협상 테이블을 부득이하게 떠나야 할 경우에는 당연히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이고.
그런데 오코사 실장은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무단으로 협상 테이블을 이탈해 버렸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행동한 이면에는 무언가 숨은 이유가 있다는 뜻.
겨울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대충 감이 잡혔지만, 혹시 또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이사님, 그가 돌발 행동을 보인 이유가 뭡니까?”
[천 외교부장이 월요일과 어제 오전까지 아무 통보 없이 협상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에 대한 징벌 차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역시 자신의 추측대로였다.
“뿌린 대로 거둔 거네요.”
[하하, 부사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본격적인 협상은 다음 주나 되어야 시작하겠네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수고해 주시고,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연락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딸깍.
겨울이 전화를 끊자, 운전석에 앉아 있던 호영이 질문을 던져 왔다.
“나이지리아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연합군들과 중국의 협상 건은 세상에 알려져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
그런 이유로 겨울은 호영을 의식해서 하도진 이사와 통화할 때도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예상외로 호영은 나이지리아라고 콕 짚어 물어왔다.
그가 나이지리아라고 추측할 수 있는 단서는 오코사 실장이라는 이름뿐이었는데도.
느낌상 그는 오코사 실장을 알고 있는 듯했다.
겨울은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물었다.
“정수기를 대량으로 수입해 주는 바이어의 이름을 모르고 있다면, 직무유기 아니냐?”
“하긴…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은센기 사장이 다음 주에 우리나라를 방문한다고 하더라.”
H&E 트레이딩은 지난 2월에 콩고민주공화국을 비롯한 네 개 나라와 정수기 5만 대를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고, SH무역을 통해 공급받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SH무역은 감사한다는 의미로 한국에서 계약서를 작성하자 제안하고, 은센기 사장을 초청한 상태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은센기 사장은 이번 주에 한국을 방문했어야 한다.
하지만 지난 2월 말에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나이지리아의 대형 유통 회사인 NIGA가 정수기 20만 대를 수입하겠다고 요청해 왔다.
은센기 사장은 NIGA의 모우라 사장과 정수기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3월 하순에 한국을 방문하는 것으로 일정을 조정했다.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은센기 사장이 다음 주에 한국을 방문한다고 한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NIGA와 정수기 20만 대 공급 계약을 체결 완료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겨울은 탱크처럼 밀어붙이는 은센기 사장의 실행력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한 부사장님, 한국에 잘 도착하셨습니까?]
“네, 덕분에요.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네, 말씀해 보세요.]
“NGIA와 정수기 공급 계약을 체결했나요?”
[네. 모우라 사장님이 빨리 계약자고 서두르는 바람에 어제 오전에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모우라 사장이 계약을 서두른 이유가 뭐라고 합니까?”
[나이지리아 정부에서 정수기 10만 대를 최대한 빨리 공급해 달라고 독촉해 왔답니다.]
그때, 겨울의 머릿속에 문득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은센기 사장님, 정수기는 언제까지 공급해야 합니까?”
[늦어도 5월 말까지 나이지리아의 라고스 항구에 도착시켜 달라고 합니다.]
겨울은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에서 라고스까지의 컨테이너 운송 시간은 약 45일 정도.
그렇다면 정수가 10만 대는 아무리 늦어도 4월 15일에는 출발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정수기 제조 회사의 생산 능력이 매월 5만 대밖에 안 된다는 점에 있었다.
게다가 3월 생산분 5만 대는 이미 SH무역에서 매입하기로 결정한 상태였고.
따라서 죽었다 깨어나도 5월 말까지 정수기 10만 대는 공급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떤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용감무쌍한 은센기 사장은 NIGA와 덜커덕 계약부터 체결해 버렸지만.
“은센기 사장님, 이 사실을 SH무역 측에서 알고 있습니까?”
[아니요. 한국에 들어가서 알려 줄 생각이었습니다.]
“아이고…….”
[왜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은센기 사장이 화들짝 놀라며 물어왔다.
“정수기 10만 대는 5월 말까지 공급이 불가능합니다.”
[네? 그럼 어떻게 하죠?]
그때, 운전석에 앉아서 두 사람의 통화를 듣고 있던 호영이도 깜짝 놀라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수기 10만 대는 뭐야?”
“일단 은센기 사장과 통화를 끝내고 얘기할게.”
호영이와 대화를 중단한 겨울은 은센기와 통화를 이어 나갔다.
“은센기 사장님, 혹시 선수금을 받았습니까?”
[네. 물품 대금 20만 대 값을 모두 받았습니다.]
이제 한 가닥 남아 있던 희망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사실 겨울은 은센기 사장이 선수금을 받지 않았다면, 계약을 파기하라고 얘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은센기 사장은 10만 대도 부족해서 정수기 20만 대 값을 모두 받아 버렸다고 한다.
계약 파기에 따른 위약금이 무서워서라도, 이제는 죽어도 직진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황.
순간, 겨울은 불길한 생각 하나가 치솟아 올랐다.
“혹시… 나머지 10만 대는 6월 말까지 공급해 달라고 하는 것은 아니겠죠?”
[맞아요. 6월 말까지 공급해 줘야 합니다.]
역시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
이제는 한가하게 은센기 사장과 통화할 때가 아니었다.
“은센기 사장님, 나중에 전화 줄게요.”
[알았어요.]
겨울이 통화를 종료하기 기다렸다는 듯 호영이 급하게 질문을 던져 왔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자세하게 얘기해 봐.”
“정수기 20만 대를 5월과 6월에 나눠서, 나이지리아에 공급해 줘야 해.”
“아이고, 돌아 버리겠네.”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대책을 세워 봐라.”
“차를 갓길에 세울 테니까, 네가 운전해.”
호영은 조수석으로 옮겨가자마자 급하게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통화를 시작했고, 겨울은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운전에만 몰두했다.
월세집에 도착한 겨울은 캐리어를 좁은 거실에 던져 놓고, 호영과 함께 SH무역으로 출발했다.
윙윙―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가을이었다.
“왜?”
[오빠, 어디 있어?]
“급한 일이 생겨서 호영이네 회사로 이동하고 있는 중이야.”
[알았어. 그나저나 캐리어 비밀번호가 뭐야?]
문득 겨울은 궁금했다.
가을은 지난 설 연휴가 끝난 직후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규모가 큰 회계 법인에 당당하게 입사했다.
때문에 지금 이 시간에는 회계 법인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가을은 집에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팍팍 풍기고 있었다.
겨울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사실 확인에 들어갔다.
[규모가 상당히 큰 투자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안 받아서 회계 법인을 그만뒀어.]
“투자회사?”
[그 얘기는 한가할 때 하고, 캐리어 비밀번호나 알려 줘.]
“왜?”
[빨래해야 하잖아.]
“내 생일이야.”
* * *
SH무역 임원 회의실.
호영의 전화를 받은 정상호 사장은 급하게 임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생수병을 들어 목을 축이고, 침착함을 가장한 채 입을 열었다.
“임원 여러분, 갑자기 회의를 소집해서 미안합니다. 한 시간 전에 제 조카인 정호영 사원에게서 긴급 전화가 왔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정수기 5만 대를 수입해 갈 예정인 콩고민주공화국의 H&E 트레이딩이 정수기 20만 대를 추가로 발주했답니다.”
“오오! 잘됐네요.”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하나 발생했습니다.”
“어떤 문제입니까?”
“5월 말과 6월 말까지 각각 10만 대씩 나이지리아 라고스 항에 도착시켜 줘야 합니다.
“아이고…….”
심각한 상황임을 깨달은 임원들이 여기저기서 탄식 소리를 내뱉었다.
“H&E 트레이딩은 최종 바이어로부터 선수금을 이미 받아 놓은 상태라고 합니다. 때문에 계약 파기는 불가능합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H&E 트레이딩과 정수기 수출 계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사실 정상호 사장도 그 점을 1순위로 고려해 봤지만, H&E 트레이딩이 어떤 회사임을 알고 있었기에 곧바로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구명수 전무는 H&E 트레이딩이 어떤 회사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인 것 같은데, 그 회사의 주요 고객은 콩고민주공화국, 나이지리아, 탄자니아, 우간다 정부입니다. 우리 회사가 아프리카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서라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회사입니다.”
“그럼 죽으나 사나 직진밖에 없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고 보시면 됩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