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최선의 방법은 정면 돌파
사실 이기수 부사장이 필요한 자금은 프리미엄 정수기 10만 대 발주분인 3,000만 달러였다.
나머지 4,300만 달러는 다음 주에 은센기 사장이 방문했을 당시에 계약을 체결하면서 받아도 되니까.
그런데 겨울은 예상외로 7,300만 달러 전부를 지급해 준다고 한다.
정수기 수출 대금 전부를 준다고 하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감사합니다, 한 부사장님.”
“SH무역이 선수금 7,300만 달러를 받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조건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최종 바이어인 NIGA 측에서 SH무역의 제안을 동의해야 합니다.”
이기수 부사장은 당연히 NIGA 측에서 동의할 것으로 예상했다.
프리미엄 정수기를 일반 정수기 가격으로 공급해 주겠다는데, NIGA 측에서 싫다고 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자신의 생각을 겨울에게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일에는 항상 예상치 못하는 변수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물론 그래야겠지요.”
“제가 H&E 트레이딩의 은센기 사장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제안서가 급하게 필요한 상황입니다. 지금 최대한 빨리 제안서를 작성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정상호 사장이 입을 열었다.
“구명수 상무, 제안서 작성하는 데 시간을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아무리 늦어도 한 시간을 넘기지 않겠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제안서를 심혈을 기울여서 작성해야 한다.
이런 관례에 따라 겨울은 제안서를 작성하려면 적어도 몇 시간은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구명수 상무는 한 시간 안에 제안서를 작성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는 중이었다.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상황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겨울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정상호 사장의 발언은 계속 이어졌다.
“청우정수기의 장영호 부사장님은 구 상무를 도와서 제안서를 작성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박 사장님과 한 부사장님은 제안서가 작성될 동안에 제 방에서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
“네, 사장님.”
“회의에 참석해 주신 임원 여러분은 일터로 돌아가서 업무를 보시기 바랍니다.”
* * *
사장실.
겨울은 임원 회의실에서부터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던 점을 정상호 사장에게 물었다.
“사장님, 제안서를 한 시간 안에 작성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까?”
“다른 회사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회사는 제안서 양식을 상당히 많이 보유하고 있어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제안서 양식에 프리미엄 정수기의 이미지 사진과 특장점 등을 삽입하면 되니까, 한 시간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아, 저는 그런 방법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나저나, 가격이 20달러가 올라간 것은 어떻게 커버할 생각입니까?”
겨울은 딜레마에 빠져들었다.
H&E 트레이딩의 이익이 25%라고 밝히면, 두 사람은 크게 오해할 것이 확실하니까.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사실과 일부 거짓을 섞어서 설명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H&E 트레이딩에 배정된 이익을 줄이려고 합니다.”
“은센기 사장이 반발하지 않을까요?”
“정수기와 관련한 비즈니스는 제가 수주해서 H&E 트레이딩에 넘겨준 것이기 때문에 크게 반발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반발한다는 얘기잖아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 회사의 이익을 5달러 정도 줄이면 어떨까요?”
SH무역이 정수기를 FOB 조건으로 H&E 트레이딩에 수출할 때 발생하는 이익률은 6.7% 수준.
무역회사는 광고 선전비 등의 부대 비용이 많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이 정도 수익률이면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SH무역의 이익이 5달러 정도 줄어들면, BEP(Break―Even Point,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기는 수준으로 이익률이 급감한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겨울은 정상호 사장의 제안을 수용할 수 없었다.
“사장님, H&E 트레이딩에 책정된 이익이 생각보다 많은 편입니다. 그러니까 그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알았어요.”
윙윙―
그때,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에 표시된 전화번호를 확인하니, 가쿠타 부장한테 걸려 온 전화였다.
느낌상 은센기 사장한테 SOS를 받은 것 같았다.
겨울은 정상호 사장한테 양해를 구하고, 사장실 밖으로 이동해서 통화를 시작했다.
“네, 가쿠타 부장님.”
[지금 H&E 트레이딩 사무실에 와 있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NIGA이 H&E 트레이딩에 공급해 달라고 요청한 정수기 20만 대는 납기를 지킬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아이고…….]
가쿠타 부장이 낙담하는 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생생하게 들려왔다.
“SH무역 측과 정수기 제조 회사 측과 대책 회의를 통해서…….”
겨울은 현재까지 결정된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한 시간 안으로 프리미엄 정수기와 관련된 제안서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NIGA의 모우라 사장과 최대한 빨리 협의해서 컨펌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통화하겠습니다.”
* * *
딸깍.
가쿠타 부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그의 옆에 앉아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은센기 사장이 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가쿠타 부장님, 한 부사장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정수 성능이 뛰어난 프리미엄 정수기를 공급해 주겠다고 하는데,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점이요?”
“제일 중요한 정수기 공급 가격을 얘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가격은 대당 280달러에 고정시킨 것이 아닐까요?”
“만약에 그렇다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문제라뇨?”
“NIGA의 모우라 사장님의 입장에서 설명해 보면 …….”
은센기 사장은 가쿠타 부장의 설명에 충분히 공감이 갔다.
만약에 일반 정수기와 프리미엄 정수기의 공급 가격이 같다면, 모우라 사장이 자신들로부터 바가지를 썼다고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가쿠타 부장님, 한 부사장님도 그 문제를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급 가격을 일부러 오픈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한 부사장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요?”
가쿠타 부장은 겨울과 1년 가까이 생활하면서 확실하게 파악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겨울이 본인의 욕심을 채우기보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이타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낌상 그는 본인에게 배정된 이익 중에서 일부를 포기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신의 추측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 말을 아끼기로 결정했다.
“제안서를 받아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약 30분 정도 지난 후.
겨울이 제안서를 이메일로 보내왔다.
은센기 사장은 재빨리 제안서를 출력해서 가쿠타 부장한테 가져다주었다.
가쿠타 부장은 제안서를 꼼꼼하게 살펴본 후, 겨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센기 사장도 통화 내용을 들을 수 있도록 스피커폰으로 전환해 놓고서 말이다.
[네, 가쿠타 부장님.]
“부사장님, H&E 트레이딩이 SH무역 측에 프리미엄 정수기 수입 가격으로 300달러를 지급해 주면 됩니까?”
[네, 그렇습니다.]
“H&E 트레이딩이 NIGA 측에 추가로 청구해야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럼 오른 20달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받는 이익에서 차감하면 됩니다.]
역시 자신의 추측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가쿠타 부장은 겨울의 뜻이 관철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부사장님, H&E 트레이딩이 SH무역으로부터 프리미엄 정수기를 280달러가 아닌 300달러에 수입하면, 심각한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어떤 문제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H&E 트레이딩이 나이지리아 세관에 지급해야 할 관세를 비롯해서 각종 부대 비용이 상승합니다.”
[그 비용이 얼마정도 될까요?]
“어림잡아 계산해 봤는데, 적어도 50만 달러는 추가될 것 같습니다.”
[음…….]
겨울은 생각할 것이 있는지 끝말을 흐렸다.
가쿠타 부장은 겨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해결책을 내놓을지 빤히 예상되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겨울의 해결책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면 돌파가 최선인 상황.
당연히 그 역할은 자기, 또는 은센기 사장이 수행해야 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겨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왔다.
[가쿠타 부장님, 그 비용도 제가 받는 이익에서 차감하는 것으로 합시다.]
“부사장님, 또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네, 말씀해 보세요.]
“프리미엄 정수기를 일반 정수기와 같은 가격으로 NIGA에 공급하면, 모우라 사장님이 저희를 색안경 끼고 볼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희가 바가지를 씌웠다고요?]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모우라 사장님께 사정을 얘기하면 안 될까요?]
“당연히 시도해 보겠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네? 또 있습니까?]
“콩고민주공화국 등에서 일반 정수기를 프리미엄 정수기로 바꿔서 공급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아이고… 산 넘어 산이네요.]
이제 9부 능선까지 넘었다.
눈앞에 보이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가쿠타 부장은 하고 싶은 말을 꺼내 들었다.
“부사장님, 저희가 모우라 사장님과 통화해서 대책을 논의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딸깍.
겨울과 통화를 끝낸 가쿠타 부장은 은센기 사장한테 말을 건넸다.
“SH무역에서 보내온 제안서를 수정해서 NIGA에 발송합시다.”
“가격 기준은 어떻게 할까요?”
“SH무역에서 300달러로 견적서를 보내왔잖아요.”
“하하, 무슨 말인지 감 잡았습니다.”
은센기 사장은 루암바 과장을 불러서 기존의 280달러를 300달러로 수정하고 바뀐 내용을 적용하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수정된 제안서를 확인한 그는 모우라 사장에게 보내 주고, 전화를 걸어서 이를 알렸다.
윙윙―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제안서 검토를 마친 모우라 사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네, 모우라 사장님.”
[은센기 사장님, 일반 정수기를 프리미엄으로 변경해서 제안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까?]
“일반 정수기는 NIGA 측에서 요구하는 납기를 맞출 수 없어서 부득이하게 프리미엄 정수기로 변경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프리미엄 정수기를 일반 정수기 가격으로 공급해 달라고 주장하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은센기 사장은 가쿠타 부장한테 코치받은 내용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모우라 사장과 통화를 이어 나갔다.
“한겨울 부사장님이 배분받는 이익을 차감하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한 부사장님의 이익은 얼마나 줄어들게 됩니까?]
“최소 450만 달러는 넘어갈 것 같습니다.”
모우라 사장에게서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기존가보다 20달러 올라간 제품을 수입해야 할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 중일 것이다.
하지만 겨울의 위상을 알고 있는 은센기 사장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 모우라 사장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은센기 사장님, 이 문제는 제가 결정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오코사 실장님과 상의한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30분 정도 지난 후, 은센기 사장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네, 모우라 사장님.”
[내일 중으로 계약서를 변경하러 우리나라에 오십시오.]
“감사합니다.”
[결정은 제가 아니라 오코사 실장님께서 내리신 겁니다.]
즉, 오코사 비서실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라는 얘기였다.
“제가 오코사 실장님께 별도로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더욱 고맙고요. 내일 봅시다.]
“네, 알겠습니다.”
은센기 사장은 곧바로 겨울에게 전화를 걸어서 모우라 사장과 합의한 내용을 전달했다.
“…오코사 실장님께 고맙다고 꼭 전화해 주세요.”
[은센기 사장님, 정말 수고 많이 했습니다.]
“제가 사고 친 것을 완벽하게 뒷수습해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맨입에는 곤란하고,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네, 말씀하십시오.”
[정수기 수입 대금 7,300만 달러를 최대한 빨리 SH무역으로 보내 주세요.]
“염려 마십시오. 통화 끝나는 대로 송금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