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동등한 비즈니스 파트너
“두 분의 대통령님께서는 한겨울 씨와 직접 만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문두야 부통령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붙여 왔다.
겨울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자기도 그들을 직접 만나서 얼굴을 맞대고 설득하는 방법이 최고임을 알고 있었으나, 시간이 너무 늦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움직이기는 불가능했다.
겨울이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사이, 심바 과장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대리님, 저한테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있습니다.”
“빨리 말씀해 보세요.”
“우리나라는 마지리 대통령님은 수도인 도도마에 계시고, 문두야 부통령님은 이곳 다르에스살람에 주재하고 계십니다. 두 분은 자주 만나기 어려워서…….”
심바 과장의 설명을 끝까지 들은 겨울은 즉시 문두야 부통령에게 물었다.
“문두야 부통령님, 회의실에 회상회의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습니까?”
“맞아!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문두야 부통령도 묘안이라고 생각했는지, 즉시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그러나 문두야 부통령과는 달리 마사카 부통령은 신중한 의견을 꺼내 놓았다.
“루군다 대통령님이 화상회의를 거절하고, 한겨울 씨를 직접 만나 보고 싶다고 하시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음, 시간은 금이라는 격언으로 루군다 대통령님을 설득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하하하, 그런 방법이 있는지 몰랐네요.”
겨울의 의도를 이해했다는 듯 마사카 부통령이 환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회의실.
겨울은 설치된 카메라를 향해서 정중한 자세로 인사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한 그룹 아프리카 법인에 소속되어 있는 한겨울 대리라고 합니다.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어야 하나, 화상으로 인사드린 점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 말씀드립니다.”
[나는 탄자니아의 대통령인 카심 마자리입니다. 화상으로나마 인사를 나눠서 반갑습니다.]
[나는 우간다의 요웨리 루군다입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별로 없는 관계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 전에 한 대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의 신뢰성부터 검증해 주는 게 먼저 아닐까요?]
즉, 서로 헛수고하지 말자는 말이었다.
겨울은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해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완벽한 대책을 수립해 놓고 있었다.
“마자리 대통령님, 콩고민주공화국의 바통고 대통령님을 알고 계십니까?”
[그럼요. 잘 알고 있습니다.]
“정보의 신뢰성에 대해서 저보다는 바통고 대통령님께 듣는 것이 훨씬 신뢰성이 높을 듯합니다.”
[한겨울 씨는 바통고 대통령을 알고 있습니까?]
다소 쌀쌀했던 마지리 대통령의 목소리에 온기가 조금씩 묻어났다.
“네, 알고 있습니다.”
[알았어요. 내가 바통고 대통령님께 전화해서 신뢰성 검증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순간, 겨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마지리 대통령님,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루군다 대통령님과 다른 두 분의 부통령님을 위해서 스피커폰으로 통화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차, 내가 그 생각을 못했네요.]
마자리 대통령은 즉석에서 바통고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한 대로 그는 제일 먼저 겨울을 알고 있는지부터 물었고, 바통고 대통령은 겨울과 맺은 인연에 대해서 간단하게 풀어놓았다.
겨울의 신분이 확인되자 두 사람의 대화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진행되었다.
다행히 바통고 대통령은 겨울에게 부탁받은 대로 테슬라와 관련된 말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겨울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신뢰성 검증을 완벽하게 끝내고, 물밑 작업 중에 있다는 말을 남기고 통화를 종료했다.
만족한 결과를 얻었는지, 마자리 대통령이 넉넉한 표정을 지으며 겨울에게 말을 걸어왔다.
[한겨울 씨, 의심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제부터 한겨울 씨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들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정보를 공개하기 전에 두 가지 부탁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얘기해 보세요.]
“정보의 출처를 묻지 말아 달라는 것과 정보의 보안을 유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원하는 대로 해 줄게요.]
“네, 알겠습니다. 이제 스크린을 주목해 주십시오.”
겨울이 가쿠타 과장과 심바 과장에게 신호를 보내자, 회의실의 조명이 꺼지고, 스크린에 ‘전기자동차 시장 확대 방안’이라는 제목의 장표가 비춰졌다.
“이 자료는 전기자동차 시장 점유율 1위 업체인 테슬라와 미국 상무부가 공동 제작한 기밀문서입니다.”
겨울은 차분한 목소리로 보고서의 내용을 한 장, 한 장 설명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쇄도하는 질문에 대답하느라 어느 순간부터 브리핑은 오뉴월 엿가락 늘어지듯 하염없이 늘어지고 있었다.
특히, 테슬라의 목표 주가를 설명할 때에는 질문공세가 극에 달했다.
[한 대리님, 진짜로 테슬라의 주가가 500달러가 넘어갈까요?]
“루군다 대통령님, 투기 세력들이 생각보다 일찍 개입하는 바람에 최소 600달러는 넘어갈 게 확실합니다.”
[600달러가 넘어가는 시점이 연말이 아닐 수도 있겠네요?]
겨울은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장대산에게 전화를 걸어서 몇 가지 질문을 했고, 다행스럽게도 그의 대답에 질문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가가 본격적으로 상승하는 시기는 2월 말부터고, 4월에서 5월 사이에 크게 조정을 거칠 거라고 합니다. 그 후, 주가는 꾸준히 상승 곡선을 그리다가, 9월에서 11월 사이에 600달러 고지를 넘을 거라고 합니다.”
[한 대리님, 테슬라의 주가가 600달러가 넘어가면, 내가 한턱 크게 쏠게요.]
[나도 한턱낼게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마지리 대통령도 한마디 보탰다.
두 사람의 친근함이 잔뜩 담긴 얘기를 들은 겨울은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마지리 대통령과 루군다 대통령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호칭할 때 직위와 ‘님’자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붙여왔기 때문에.
즉, 두 사람도 자기를 동등한 비즈니스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불러주시면,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하하하! 알았어요.]
바로 뒤이어 마지리 대통령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왔다.
[한 대리님, 내가 친하게 지내고 있는 정치인 중에 모하두 바하리 나이지리아 대통령이 있습니다. 그 친구한테만 특별히 정보를 제공해 주면 안 될까요?]
“제가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조금 부끄러운 얘기지만, 몇 년 전에 우리나라가 국가부도 위기에 처했을 당시에 나이지리아로부터 도움을 받아 위기를 넘긴 적이 있습니다.]
겨울은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
MTN이 핸드폰 기지국 증설과 업그레이드와 관련한 입찰을 진행할 때, 바하리 대통령의 도움을 받으면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을 것이기에.
하지만 자신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마지리 대통령님, 바하리 대통령님께 정보 제공자가 저라는 사실을 밝혀 주시면 동의하겠습니다.”
[네? 그게 전부입니까?]
의아해하는 마지리 대통령의 표정이 모니터에 생생하게 비춰졌다.
“지금은 생각나는 것이 그것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있을 수도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사실인가요?]
역시 마지리 대통령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이럴 때는 정공법을 택하는 것이 최고였다.
“이렇게 엄청난 정보를 공짜로 제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하, 알았어요. 한 대리님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시면, 바하리 대통령에게 전달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문두야 부통령님이 알고 계십니다.”
[이번 기회에 핸드폰 번호를 교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좋습니다. 제 핸드폰 전화번호는…….”
공식적으로 핸드폰 번호 교환을 끝내고, 겨울은 속도를 내서 남은 브리핑을 마무리했다.
“…투기 세력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최고의 수익률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급적 빨리 서두르시기 바랍니다.”
[한 대리님, 마사카 부통령에게 들었는데, 꼭 5억 달러만 투자해야 하는 겁니까?]
“5억 달러는 단순히 예를 들은 금액일 뿐입니다.”
[하하하, 무슨 말씀인지 알았습니다.]
새하얀 이를 드러내는 웃음이 특히 인상적인 루군다 대통령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마지리 대통령이 정말 중요한 얘기를 꺼내들었다.
[한 대리님, 우리에게 엄청난 정보를 제공해 줬는데, 원하는 대가가 너무 적은 것 아닙니까?]
“저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한 대리님의 제안을 들어준다고 하면, 송유관 건설 공사는 수주할 수 있습니까?]
“저희 대한 그룹이 보유한 능력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장 상사들도 많을 텐데, 한 대리님 혼자서 이렇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저희 조직의 특수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겨울은 아프리카 법인에서 운영하고 있는 태스크포스인 FTA 팀의 임무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저하고 가쿠타 과장이 우간다와 탄자니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한 대리님이 송유관 입찰을 위한 선발대라고 판단하면 됩니까?]
“네,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송유관 건설 공사 입찰이 공평한 조건에서 진행되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우리 우간다도 같은 입장입니다.]
탄자니아의 마지리 대통령과 우간다의 루군다 대통령의 지지를 이끌어 낸 겨울은 만족한 미소를 보내며 인사했다.
“두 대통령님의 결단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 대리님이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실을 송훈석 회장님이 알고 계십니까?]
“네? 대통령님께서 저희 회사 회장님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루군다 대통령의 발언에 화들짝 놀란 겨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몇 년 전에 한국 대통령님께서 우리 우간다에 방문하셨을 때 송 회장님이 수행원으로 따라오신 적이 있습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한 대리님은 송 회장님을 만나 본 적이 있겠지요?]
“신입 사원 면접을 볼 당시에 송훈석 회장님이 면접관이셨습니다.”
[그렇군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는 사실을 간파한 겨울은 화상회의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루군다 대통령님, 저는 테슬라의 주가가 600달러가 넘어갈 때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중에 바쁘다면서 빼기 없기입니다.]
“하늘이 두 쪽 나는 일이 있더라도 달려가겠습니다.”
[하하하, 나중에 만납시다.]
루군다 대통령과 인사를 나눈 겨울은 마지리 탄자니아 대통령과도 작별 인사를 나누고, 화상회의를 종료했다.
“아이고, 힘들어라.”
겨울이 앓는 소리를 내뱉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를 본 탄자니아의 문두야 부통령이 푸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왔다.
“한 대리님, 정말 수고 많이 했어요.”
“하하, 아닙니다.”
“이제 중요한 일도 모두 끝났으니까, 간단하게 술이나 한잔하러 갈까요?”
“네, 좋습니다.”
정부청사 인근에 위치한 바.
가쿠타 과장과 심바 과장은 자신들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재빨리 자리를 피해 주는 센스를 발휘했다.
세 사람은 위스키를 마시며, 두서없는 대화를 시작했다.
“한 대리님, 나나 우리나라에 바라는 것이 있으면 얘기해 보세요. 내가 힘껏 도와줄게요.”
문두야 부통령의 질문을 받은 겨울은 어떻게 대화를 풀어 갈까 짧게 생각한 후,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원하는 것을 말씀드리기 전에 탄자니아 정부 차원에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얘기해 보세요.”
“이미 아시겠지만, 중국은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기 위해서 동맹국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일대일로 프로젝트에는 디지털 일대일로 프로젝트가 포함되어 있고, 중국의 대표적인 정보통신 업체인 화웨이가 선두주자입니다.”
겨울은 화웨이가 어떤 회사이고,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가들이 그 회사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조만간에 미국은 서방국가들과 손잡고 정보통신 시장에서 화웨이를 퇴출시키기 위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할 겁니다.”
문두야 부통령은 큰일 났다는 생각뿐이었다.
자기를 포함한 정부의 주요 관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핸드폰이 바로 화웨이에서 생산한 스마트폰이기 때문이었다.
“한 대리님, 백도어(Back Door) 프로그램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