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더 이상의 의심은 사치
문두야 부통령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뗄 수도 있었지만, 절친인 부투야 실장을 생각해서 사실 그대로를 얘기해 주기로 결정했다.
“한겨울 씨, 안타깝게도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조차도 없어진 상태입니다.”
그의 말은 즉, 국제입찰 공고를 띄우기 전에 송유관 건설 공사를 수행할 건설 회사가 이미 결정됐다는 뜻이었다.
겨울은 실망감이 물밀 듯 몰려왔지만, 손에 쥐고 있는 카드가 워낙 강력했기에 실망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문두야 부통령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문두야 부통령님, 송유관 건설 공사를 수행할 건설 회사는 중국 회사입니까?”
“내가 대신 대답해 줄게요.”
문두야 부통령보다 마사카 부통령의 입이 먼저 열렸다.
“네, 경청하겠습니다.”
“중국 건축공정 총공사(CSCEC)가 수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겨울도 CSCEC가 어떤 회사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CSCEC는 중국 정부가 운영하고 있는 국영 건설 회사로 미꾸라지처럼 국제 건설 시장의 물을 흐리고 있는 대표적인 회사였다.
그 이유로 CSCEC는 모든 건설 회사들로부터 기피 대상 1호로 찍혀 있는 상태였고.
그렇게 악명이 자자한 회사가 송유관 건설 공사를 수행한다고 한다.
겨울은 자존심이 강하기로 소문난 토탈이 CSCEC를 선택한 이유가 진심으로 궁금해서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송유관 건설 비용은 토탈이 66.7%, CNOOC가 33.3%를 부담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즉, 건설 비용이 적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토탈의 입장에서도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돈이 모든 문제의 발단이었다.
“CSCEC의 시공 능력이 뛰어나지 않아서 클레임이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만약에 하자가 발생하면 CNOOC가 책임지기로 했답니다.”
“그렇다면 수의계약으로 진행하지, 굳이 국제입찰을 진행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최저 가격을 산출하기 위함이라고 들었습니다.”
“건설사들이 투찰한 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CSCEC가 송유관 건설 공사를 수행한다는 뜻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송유관 건설 공사 수주를 위해서 입찰에 참여하는 건설 회사들이 불쌍할 따름이네요.”
“어차피 승자는 하나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마사카 부통령의 표정에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겨울은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을 할까 말까 짧게 고민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내정 간섭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질문이었다.
‘이미 게임이 끝난 마당에 질문해서 뭐 하냐. 훌훌 털어 버리고, 다른 일에 집중하자.’
주저하는 겨울의 표정을 읽었는지 문두야 부통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해 보세요.”
“질문이 있기는 합니다만, 듣기에 따라서 상당히 기분이 나쁠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판단할 테니까, 편히 질문해 보세요.”
“송유관 건설 공사와 관련해서 우간다와 탄자니아의 발언권은 없습니까?”
“어떤 의도로 질문해 왔는지 알고 있습니다만, 거기에는 말 못할 사연이 있습니다.”
겨울은 그 사연이 무엇인지 대충 감 잡았다.
토탈과 CNOOC가 두 나라에 거액의 기부금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발언권을 회수해 버린 것이리라.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겨울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한겨울 씨가 잘못 알고 있습니다.”
“네? 잘못 알고 있다니요?”
“CNOOC 측에서 송유관 건설 공사를 CSCEC에 주는 조건으로 우리나라의 마자리 대통령님과 우간다의 루군다 대통령님께 거액의 뇌물을 제공하기로 합의된 상태입니다.”
“그렇게 민감한 내용을 저한테 말씀하셔도 됩니까?”
“한겨울 씨가 입이 무겁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겨울은 문두야 부통령과의 대화 속에서 자그마한 틈을 하나 발견했다.
“문두야 부통령님, 마자리 대통령님이 CNOOC 측에서 받는 뇌물 액수가 얼마인지 알 수 있습니까?”
“대한 그룹에서도 그만큼의 뇌물을 주겠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됩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겨울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문두야 부통령은 실망감이 몰려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뇌물을 주지 않겠다면서 물어봐 달라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까?”
“저는 마자리 대통령님께 뇌물이 아닌 떳떳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릴 생각입니다. 당연히 두 분도 마찬가지이고요.”
“혹시… 부투야 실장이 언급한 근사한 선물이 그것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문두야 부통령이 흥미를 느꼈는지 겨울에게 상체를 기울이며 물었다.
“제가 알려 드릴 방법보다 마자리 대통령님이 받을 뇌물 액수가 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즉, 질문에 대한 답변을 먼저 하라는 얘기였다.
마사카 부통령은 핸드폰을 들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가 한참 만에 돌아왔다.
그러고는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겨울에게 금액을 알려 주었다.
“두 대통령님은 각각 5,000만 달러를 뇌물로 받기로 했답니다.”
“생각보다 액수가 적네요?”
“네? 5,000만 달러가 적다고요?”
마사카 부통령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제가 판단하기에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나저나 마사카 부통령님은 CNOOC 측에서 얼마를 받기로 했습니까?”
“자그마한 선물을 준다고만 했기 때문에 많아야 500만 달러일 겁니다.”
“이번 질문은 상당히 민감합니다만, 꼭 대답해 주셔야 합니다.”
“어떤 질문인지 얘기해 보세요.”
“두 대통령님과 부통령님들은 당장 사용 가능한 비자금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습니까?”
“으음, 정말로 민감한 질문이네요.”
“답변해 주시지 않으시면, 제가 큰돈을 벌수 있는 방법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일주일 내로 1억 달러까지는 조성할 수 있습니다.”
마사카 부통령과 대화를 끝마친 겨울은 문두야 부통령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고, 우연찮게 같은 금액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당연히 실제로는 아니겠지만.
“문두야 부통령님, 두 분의 대통령님은 아마 5억 달러 정도는 조성하실 수 있겠죠?”
“…아마도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부통령님께서 제가 제시하는 조건을 수용해 주신다면, 최소 1년 이내에 원금을 제외하고 4억 달러를 벌수 있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겨울의 말에, 문두야 부통령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1억 달러를 투자하면 4억 달러를 벌게 해 주겠다는데, 흥분하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 말을 믿어도 됩니까?”
“제 말이 의심스러우면, 부투야 실장님께 전화해서 물어보시면 되잖습니까?”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문두야 부통령이 핸드폰을 집는 순간, 마사카 부통령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문두야 부통령님, 한겨울 씨의 제안부터 먼저 들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으음,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흥분했군요. 한겨울 씨, 제안이 무엇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별것 아닙니다. CSCEC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세워 주는 조건입니다.”
“네? 그게 전부입니까!?”
문두야 부통령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한겨울 씨의 제안에 대해서는 부투야 실장하고 통화한 후에 답변해 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잠깐만 기다리고 계십시오.”
문두야 부통령은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서 부투야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생각보다 일찍 전화했네?]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한겨울 씨가 언급한 얘기를 믿지 못해서 전화한 거잖아.]
“맞아. 1억 달러를 투자하면, 1년 안에 4억 달러를 벌 수 있다고 하더라.”
[최소라는 말이 빠진 것 같은데?]
“뭐야? 더 될 수도 있다는 말이야?”
[당연한 얘기지.]
“흐음, 믿어도 되는 이야기 맞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 하는 소리야?]
부투야 실장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널 정도로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가 겨울이 언급한 방법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말은 이미 완벽하게 검증을 끝냈다는 의미였다.
문두야 부통령은 더 이상의 의심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어떤 정보인지 나한테 슬쩍 얘기해 줄 수 있어?”
[한겨울 씨한테 직접 듣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으음, 알겠어. 그렇게 할게. 그건 그렇고, 너는 언제부터 행동에 들어갈 생각이야?”
[지금 자금을 조성하고 있는 중이고, 늦어도 다음 주 안에는 행동으로 옮길 예정이야.]
“시간이 촉박하다는 뜻인가?”
[그건 아니야. 시간이 지체되면 지체될수록 이익률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야.]
“나한테 귀중한 정보를 알려 줘서 정말 고마워.”
[한겨울 씨한테 얻은 정보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지급하고.]
즉, 송유관 건설 공사를 대한 그룹이 수주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하라는 말이었다.
“한겨울 씨는 우리가 돈을 벌게 해 주는 대가로 별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던데?”
문두야 부통령이 겨울과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사실 그대로 전달해 주자, 부투야 실장은 핀잔부터 늘어놓았다.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네가 순진했냐?]
“오케이. 무슨 말인지 알았어.”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해 줄게. 한겨울 씨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알고 있는 사람이 전 세계에 100명이 안 될 정도로 초특급 기밀이야.]
“여기저기 떠벌이지 말라는 말이지?”
[잘 알아듣는구먼.]
전화를 끊고 집무실로 돌아간 문두야 부통령은 겨울에게 말을 건넸다.
“한겨울 씨, 마사카 부통령과 상의할 게 있는데, 잠시 자리를 비워 주실 수 있습니까?”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저희는 그동안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한 시간 뒤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겨울이 일행들과 함께 집무실에서 빠져나가자, 문두야 부통령은 부투야 실장과 통화한 내용을 토시 하나 빠트리지 않고 사실 그대로 전달했다.
“…초특급 기밀이라면서 여기저기에 퍼트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문두야 부통령님,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플랜 A와 B가 있습니다. 플랜 A는…….”
마사카 부통령은 송유관 건설 공사와 관련한 칼자루는 토탈과 CNOOC가 쥐고 있었기 때문에 플랜 A는 실현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문두야 부통령님, 플랜 A는 없었던 것으로 하시고, 플랜 B에 집중하는 것이 어떨까요?”
“플랜 A를 실현하는 데 어려울까요?”
“저희가 무리수를 사용하면 가능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로 인해서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해서 그렇습니다.”
“하긴… 무산되게 놔둘 수는 없지요.”
* * *
한편, 겨울은 가쿠타 과장, 심바 과장과 함께 정부청사 앞에 위치한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로 간단하게 저녁을 때웠다.
빨대로 콜라를 한 모금 빨아들인 심바 과장은 궁금한 것이 있다는 듯 겨울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 대리님,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송유관 건설 공사를 우리한테 달라고 하면 안 될까요?”
“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습니다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한 발 뒤로 뺐습니다.”
“두 가지 이유라고요?”
“하나는 제가 아까 말한 것과 같이 탄자니아와 우간다는 송유관 건설 공사 입찰의 주체가 아니라는 점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저희가 무리수를 두게 되면, 토탈과 CNOOC에 밉보여서 입찰에 참여조차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때, 가쿠타 과장이 할 말이 있다는 듯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 대리님, 엄청난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치고 저희가 얻는 결과물이 너무 약소한 거 아닙니까?”
“우리나라에는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럼… 뭔가 노림수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후후, 물론입니다.”
가쿠타 과장은 겨울이 노리는 것을 이것저것 생각해 보다가, 머지않아 탄자니아에서 진행될 핸드폰 기지국 증설과 업그레이드 입찰 정보가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겨울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럼 우간다에서는 무엇을 대가로 얻어 낼 생각입니까?”
“언젠가는 하나 얻어걸리지 않겠습니까?”
“하하, 나중을 생각하자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지금 저하고 나눈 대화는 모두 비밀입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