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낭중지추(囊中之錐)
각 회사의 비서실마다 그만의 고유한 업무를 가지고 있다.
서동호 비서실장의 주요 업무 중에 하나는 지난주에 각 계열사에서 일어난 중요한 업무들을 취합 정리해서 송훈석 회장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오늘도 그는 아침 일찍 회사에 출근해서 비서실 직원들이 올린 업무 보고서를 검토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해외에 위치한 법인들을 관리하는 이진호 사장이 보내온 업무 보고서에 특히 눈길이 갔다.
“아프리카 잠비아에 1,260만 달러를 수출한 걸 왜 올린 거지? 중요한 업무라 판단한 건가?”
그냥 보고 넘기기에는 살짝 애매한 마음이 들던 서동호 실장은 이진호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구체적인 내용 파악에 들어갔다.
[네, 실장님.]
“이 사장님께서 보고한 업무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는 중입니다만, 궁금한 것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아, 혹시 아프리카 잠비아에 핸드폰과 가전제품을 수출한 건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것 참… 저도 황당한 경험이라서 업무 보고서에 첨가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게, 지난주 월요일 오후에 아프리카를 관장하고 있는 안정혁 법인장한테 전화가…….]
이진호 사장의 설명을 듣고 있던 서동호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 감사합니다. 죄송하지만, 30분 뒤에 회장실로 건너와 주시겠습니까? 이번 수출 건에 대해서 회장님께 직접 보고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 * *
송훈석 회장은 아침부터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다.
오늘은 어버이날이라 송지유가 카네이션을 선물해 주지 않을까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그녀는 오전에 급한 회의가 있다면서 아침도 먹지 않고 회사로 출근해 버렸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
송훈석 회장의 꽁한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후우… 나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할머니께는 챙겨 드렸어야…….”
그렇게 혼잣말을 내뱉는 사이, 서동호 실장이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서동호 실장은 비어 있는 자리에 앉으며 송훈석 회장에게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저… 회장님, 오늘 컨디션이 별로이신 것 같은데,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프기는 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동호 실장은 송훈석 회장이 이토록 처져 있는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카네이션을 받지 못하신 겁니까?”
“에이… 자식 키워 봐야 하나도 소용없다니까.”
“크흠, 제가 넌지시 눈치를 줘 볼까요?”
“됐어. 엎드려 절 받아 봐야 무슨 소용이야. 자식을 제대로 못 키운 내 잘못이지.”
크게 한숨을 내쉬는 송훈석 회장.
그 모습을 보는 서동호 실장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만 갔다.
“음, 그렇지 않아도 지유에게 전할 말이 있었는데, 잠시 불러서 눈치라도 줘 보겠습니다.”
“뭘 그렇게까지… 아니다. 그래. 그렇게 해.”
서동호 실장의 호출에 급히 회장실로 불려온 송지유는 송훈석 회장에게 먼저 고개 숙여 정중히 인사를 했다.
“찾으셨습니까?”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
“집이 아니라, 일터라는 뜻이냐?”
“네, 그렇습니다.”
“알았어. 일단 앉아.”
송지유가 비어 있는 소파에 앉자, 송훈석 회장이 잔뜩 언짢은 기색을 실어서 한마디 내뱉었다.
“너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냐?”
“화요일로 알고 있습니다. 아, 그전에 잠깐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뭐?”
송지유는 말과 함께 주머니에서 카네이션을 꺼내 송훈석 회장의 가슴팍에 달아 주었다.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송훈석 회장.
“너… 아침에는 아무런 말도 없더니…….”
“저녁때까지 아껴 두었다가 깜짝 파티를 하려 했는데, 실장님이 웃음 참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셔서요.”
“이봐, 서 실장.”
송훈석 회장이 싸늘한 목소리로 부르자, 서동호 실장은 옆에서 굳은 표정으로 몸을 움찔 했다.
“…네, 회장님.”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지난주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하고 있지만, 송훈석 회장의 얼굴에는 기분 좋은 듯 미소가 어려 있었다.
“할머니께는 달아 드렸니?”
“네. 어젯밤에 카네이션을 달아 드렸습니다.”
“네 엄마는?”
“본래 예정대로 오늘 저녁 식사 때 달아 드리려 합니다.”
“저녁 식사? 본래 예정? 아까 말한 깜짝 파티인가 뭔가냐?”
송지유는 빙긋 웃으며 가방에서 작은 봉투를 꺼내서 송훈석 사장에게 건네주었다.
“내용물을 꺼내서 읽어 보세요.”
용돈인가 싶어 은근 기대하며 봉투에서 내용물을 꺼내 본 송훈석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이 녀석아, 내가 오늘 저녁에 따른 약속이 있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
“서 실장님께서 아무 약속을 잡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서 실장, 나한테 미리 얘기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송훈석 회장의 물음에 서동호 실장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깜짝 파티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습니까?”
“에이… 하여간 못돼 먹어 가지고.”
서동호 실장의 장난스러운 미소에 송훈석 회장이 혀를 찼다.
“할머니와 어머니께는 어젯밤에 초대장을 미리 건네 드렸습니다.”
“알겠다.”
“회장님, 저는 이제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지유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서동호 실장이 재빨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차, 지유야. 내가 전략기획 실장한테 얘기해 놓은 게 있으니까 조금 있다가 내려가.”
“실장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지금 얘기해 주면 재미없지.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송훈석 회장은 궁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송 실장, 무슨 일인데 그래? 아까 전달할 게 있다는 말이 이건가?”
“네. 해외 법인을 관리하고 있는 이진호 사장이 회장님께 보고할 것이 있어서 올라올 예정입니다. 지유도 같이 듣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남으라고 했습니다.”
“좋은 일이겠지?”
“그렇기도 하지만, 황당한 일이기도 합니다.”
“음, 그렇다는 말이지?”
똑똑.
그때, 노크와 함께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와 이진호 사장이 도착했음을 알려 왔다.
“어서 들어오시라고 하고, 차 좀 내와 줘.”
“네, 회장님.”
송지유는 재빨리 서동호 실장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진호 사장이 들어왔다.
그는 송훈석 회장에게 목례로 인사하고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이 사장, 나한테 보고할 게 있다면서요?”
“네, 그렇습니다.”
“그 얘기는 천천히 차 마시면서 얘기하고, 우선 해외 법인들의 1월에서 4월 실적은 어떻습니까?”
“아프리카 법인이 전년 대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는데, 6월에 제법 큰 수출 건이 예정되어 있어 상반기 안에는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자신하는 이유가 있겠죠?”
“네, 물론입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가 차를 내왔다.
송훈석 회장은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사장, 이제 얘기해 보세요.”
“아프리카 법인의 콩고 지점에서 잠비아에 ZAHA라는 회사에 가전제품을 수출하기 위해서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최종 협상을 끝내고 안정혁 법인장한테 컨펌을 받기 위해서 결재를 올렸으나, 이익률이 낮다는 이유로 부결당했습니다.”
“그게 다는 아니겠죠?”
“네. 다른 사람 같으면 포기할 텐데, 정명훈 콩고 지점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잠비아로 날아가서 ZAHA 회장과 또다시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240만 달러짜리 수출을 1,260만 달러로 늘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호, 어떤 방법으로 늘렸답니까?”
“6월에 단종 예정인 핸드폰을 1만 8,000대를 추가로 수출하기로 계약을 했습니다.”
“흐음…….”
송훈석 회장이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자, 이진호 사장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회장님께서는 가전제품을 전세기를 임대해서 운송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슨 말입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번에 콩고 지점장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핸드폰을 화물기로 항공 운송하는 데 가전제품이 추가된 거겠죠?”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반대입니다.”
“그래요? 어떤 방법으로 바이어를 설득했답니까?”
“회장님,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당사자한테 직접 들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아프리카는 지금 새벽 아닙니까?”
“제가 전화가 갈 수도 있다고 미리 얘기해 놓았습니다.”
“그럼 한 번 전화해 보세요.”
이진호 사장은 정명훈 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뒤, 핸드폰을 송훈석 회장에게 건네주었다.
그때, 서동호 실장이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에 송훈석 회장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스피커폰으로 설정을 바꾸었다.
아까 서동호 실장이 송지유와 같이 들었으면 하는 내용이 이 전화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명훈 지점장, 아프리카에서 고생 많아요. 송훈석 회장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지금 이진호 사장에게 콩고 지점에서 있던 일을 보고받는 중입니다. 화물기를 임대해서 가전제품을 운송하는 방법을 구상하게 된 경위를 들었으면 하는데, 얘기해 줄 수 있나요?”
[네, 회장님. 잠비아의 ZAHA라는 유통 회사에…….]
정명훈 지점장의 보고를 듣고 있던 송훈석 회장은 갑자기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다.
“정 지점장, 말하는 도중에 미안한데, 항공 운송이라는 생각은 어쩌다 하게 된 겁니까?”
[아, 그 생각은 제가 아니라 올해 1월에 입사한 한겨울이라는 신입 사원이 낸 아이디어입니다.]
“한겨울? 한겨울 씨가 정 지점장 밑에서 일하고 있었나요?”
[네, 그렇습니다만… 외람된 말씀이지만, 회장님께서는 한겨울에 대해서 알고 계셨습니까?]
“음? 정 지점장, 한겨울 씨가 대한 그룹에 어떻게 입사했는지 아무 얘기 듣지 못했나요?”
[그게…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대한 그룹에 입사했다고 하면서, 도움을 준 사람들한테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이유로 말할 수 없다고 본인에게 들었습니다.]
송훈석 회장의 기억 속에는 겨울이 면접을 볼 당시에 허세를 떨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하여 겨울이 누구를 통해서 대한 그룹에 입사했는지 여기저기 떠벌였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고, 그 이유가 의리 때문이라니.
정말 의외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 지점장, 한겨울 씨하고 나하고 약간의 인연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계속 비밀로 해 줄 수 있겠죠?”
[네, 물론입니다.]
“아무튼 이야기, 계속해 보세요.”
[네. 저는 가전제품 항공 운송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겨울이 단종 예정인 핸드폰 얘기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래서 대한전자의 핸드폰 마케팅을 담당하는…….]
송지유는 서동호 실장이 이곳에 남아 있으라고 한 이유를 이제야 명확하게 깨달았다.
자신과 이런저런 이유로 인연이 맺어진 겨울의 활약상을 들려주기 위함이리라.
아프리카라는 오지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겨울이 정말 의외였고, 한편으로는 대견하기까지 했다.
그녀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정명훈 지점장의 보고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다음 달에 5,000만 달러 플러스알파의 수출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정 지점장, 플러스알파는 또 뭡니까?”
[한겨울이 싱칼라 회장한테 TV를 수출해 볼 욕심으로…….]
가만히 설명을 듣고 있던 송훈석 회장은 문득 새로운 사실 하나를 눈치챘다.
보통 이런 일을 상급자, 그것도 회장인 자신에게 보고할 때면, 대부분 자신의 업적을 부풀려 이야기하기 마련이었다.
부풀리지 않더라도, 적어도 조명이 자신에게 집중되게 말이다.
하지만 정명훈 지점장은 그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겨울을 애지중지 자신에게 잘 보이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마치 친아들처럼.
‘한겨울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군.’
송훈석 회장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 동안, 정명훈 지점장의 설명이 끝이 났다.
[…해서 TV와 대한제약에서 생산하는 두 종류의 질병 치료제를 수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정 지점장, 정말 수고했어요.”
[칭찬 감사합니다, 회장님.]
“조만간 성과급을 지급하도록 할게요.”
[주시면 감사하게 받겠습니다만… 안정혁 법인장과 이진호 사장님도 신경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호오, 그런 부탁을 하는 이유가 있나요?”
[사실은 한겨울이 싱칼라 회장에게 보너스…….]
정명훈 지점장의 대답에 송훈석 회장은 물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진호 사장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이진호 사장은 안정혁 법인장이 마이너스 실적을 조기에 만회하기 위해서 자기를 귀찮게 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계약서에 보너스 조건이 삽입되어 있었단다.
이유야 어찌됐든 자기가 힘써 준 덕분에 콩고 지점이 9,000달러라는 보너스를 받았다니 기분은 좋았다.
그렇게 그가 자기만의 상상에 빠져 있는 사이, 송훈석 회장은 정명훈 지점장에게 갑작스럽게 질문했다.
“정 지점장은 한겨울 씨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솔직히 처음에는 부정적이었으나 낭중지추와 같은 인물이더군요. 계속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낭중지추라… 알겠어요. 답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수고해 주세요.”
통화를 끝낸 송훈석 회장은 핸드폰을 이진호 사장에게 돌려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이 사장, 정말 수고 많이 했어요.”
“제가 한 거라고는 전화 몇 번 한 것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겸손해할 필요는 없어요.”
“하하, 알겠습니다.”
“콩고 지점의 모든 직원에게 성과급 100%를 지급하도록 하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제 모두 나가서 일 보세요.”
“네, 회장님.”
모두가 나가 조용해진 회장실.
송훈석 회장은 창가로 이동해서 팔짱을 낀 채 저 멀리 보이는 남산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흘렸다.
“낭중지추라…….”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