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못 먹어도 고
토요일 오전, 싱칼라 회장 사무실.
“정 지점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싱칼라 회장이 진심을 담아서 고마움을 전달했다.
정명훈 지점장은 싱칼라 회장이 고마워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지난 월요일에 그와 계약 체결 후, 불과 4일이 지난 어젯밤에 핸드폰과 가전제품을 떡하니 루사카 국제공항에 도착시켜 주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움직인 결과였다.
납기일인 5월 15일보다 무려 11일이나 단축시켜 주었으니 이렇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회장님, 저희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렇게까지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고마워하지 말라니요?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회장님께서 핸드폰과 가전제품을 빨리 공급받으면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정명훈 지점장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의뭉을 떨며 물었다.
사실 싱칼라 회장의 관심사는 오로지 단종 예정인 핸드폰에 꽂혀 있었다.
내심으로 5월 8일까지 도착할 것으로 예상하고, 중간 딜러들에게 대당 810달러 정도에 판매할 계획도 세워 놓았다.
그런데 그의 예상을 벗어나 어젯밤에 일찍 핸드폰이 도착해 버린 것이다.
하여 급하게 임원들을 호출해서 긴 회의를 거친 끝에 5달러를 올려 중간 딜러들에게 핸드폰을 815달러에 공급하기로 확정지었다.
즉, 납기가 11일 빨라짐으로 인해서 이익이 27만 달러가 늘어난 셈.
그러나 이익이 얼마가 발생했는지 상세하게 밝힐 필요는 없기에 에둘러 표현했다.
“중간 딜러들에게 핸드폰 공급 가격을 조금 높게 책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 그렇다면 통관을 서둘러야겠네요?”
“네. 그렇지 않아도 세관에 미리 손을 써 놓았기 때문에 아마 오늘 늦게까지는 통관이 마무리될 겁니다.”
“이번 기회에 대박을 터트리기를 바랍니다.”
“아무렴요. 그렇게 될 겁니다. 덕분에 말이죠.”
싱칼라 회장이 훈훈한 미소를 입가에 띠웠다.
정명훈 지점장과 겨울 역시 마주 미소를 지었다.
겨울은 싱칼라 회장을 만나러 오는 도중에 스스로 생각하기에 기막힌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 냈다.
그러나 이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제법 많았다.
하지만 이전처럼 떠오른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것에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대규모의 비즈니스 거래가 성사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감이 생겨나고 있던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뒤에는 천년고목처럼 든든한 정명훈 지점장이 버티고 있지 않은가.
겨울은 다시 한번 생각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말문을 열었다.
“싱칼라 회장님, 다음 달에 핸드폰 10만 대는 어떤 방법으로 공급받으실 예정입니까?”
핸드폰 10만 대는 가격에 비해서 부피는 상당히 작다.
싱칼라 회장은 대한 그룹 화물 전용기를 임대하면 낭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항공사가 운영하는 화물기를 통해서 운송받는 것으로 결정한 상태였다.
“핸드폰 10만 대는 항공사 화물기를 통해서 공급받을 생각입니다.”
“대한 그룹 화물 전용기를 임대할 때보다 어느 정도 비용이 절감됩니까?”
“전용기를 임대하면 저희가 지불한 비용은 모두 26만 달러인데, 항공사 화물기를 통해서 운송받으면 20만 달러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6만 달러라면 그렇게 많은 가격 차이는 아니었다.
어차피 일을 저지르기로 결정한 상태였기에 겨울은 못 먹어도 고라는 심정으로 싱칼라 회장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저는 회장님이 대한 그룹 화물 전용기를 이용해서 핸드폰을 운송받는 것을 적극 추천 드립니다.”
싱칼라 회장은 자신의 결정에 반하는 의견이었지만, 일단 겨울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겨울이 항공 운송이라는 엉뚱한 아이디어를 제안해 준 덕분에 엄청난 이익을 올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있겠죠?”
“회장님이 항공사 화물기를 통해서 공급받는 경우를 가정하고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먼저 대한민국에서 잠비아까지 직항으로 운항하는 화물기는 없기 때문에 운송 시간이 많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그러나 그래 봐야 하루 정도 차이 아닐까요?”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여기서 힘없이 물러날 거라면, 애초부터 시작도 하지 않았어.’
속으로 각오를 다진 겨울은 또 다른 문제점을 꺼내 들었다.
“사장님은 10만 대 모두를 잠비아로 운송받을 겁니까?”
“당연히 그럴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잠비아에서 탄자니아까지의 운송비용을 산출해 보셨습니까?”
“흐음…….”
싱칼라 회장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핸드폰 7만 대를 탄자니아로 보낼 예정이기에 항공 운송비는 어림잡아 14만 달러가 추가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한 그룹 화물 전용기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저렴한 상황.
겨울의 제안대로 대한 그룹 화물 전용기를 이용할까 생각하다가 또 다른 방법이 생각났다.
“핸드폰을 탄자니아와 우리나라, 이렇게 두 군데로 나눠서 운송받으면 되지 않을까요?”
겨울도 그 점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무릎 꿇게 되면 죽도 밥도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즉시 싱칼라 회장의 논리를 깨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 두뇌를 혹사시킨 겨울이었다.
그 끝에 어설프지만 논리를 하나를 만들어 냈다.
“회장님이 두 나라에서 동시에 핸드폰을 운송받았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몸이 두 개가 아닌 이상 두 나라에서 통관 작업을 진행하실 수는 없을 겁니다.”
“물론 그렇겠지요.”
“회장님께서는 핸드폰 숫자가 많은 탄자니아에서 통관을 지켜볼 것이고, 잠비아는 직원들한테 맡길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음,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요.”
“회장님은 잠비아 세관과 회사 직원들을 믿고 계십니까?”
겨울이 결정적인 한 방을 꺼내 들었다.
회사 직원들을 믿고 있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싱칼라 회장에게는 치명적이었다.
그는 세관은 모르겠지만, 직원들만큼은 믿지 않았다.
무장 반군들에게 컨테이너를 강탈당했을 당시에 회사 직원들이 개입된 경우가 무려 네 번이나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조사를 통해서 밝혀졌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이런 일이 발생했을 것이다.
만약에 직원들 중 누군가가 세관 직원과 범행을 공모해서 핸드폰을 1,000대 정도만 빼돌린다면…….
아니, 무장 반군들과 결탁해서 공항세관에서 창고로 이동하는 동안에 핸드폰을 강탈당하기라도 한다면…….
싱칼라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간담이 서늘해져 왔다.
분명히 겨울은 이에 대한 해법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생각한 방법이 완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고 들어 주십시오. 대한 그룹 화물 전용기가 탄자니아에 먼저 들려서 핸드폰을 하역하고, 잠비아로 오면 될 것 같습니다. 회장님께서는 탄자니아에서 핸드폰 통관을 진행하고, 화물기를 타고 잠비아로 넘어오시면 어떻습니까.”
“맞아! 그러면 되겠네요.”
싱칼라 회장도 묘안이라고 생각했는지 무릎까지 탁 치며 좋아했다.
지금까지는 애피타이저였고, 지금부터가 본게임이었다.
겨울은 자신의 구상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싱칼라 회장과 대화를 계속했다.
“회장님, 그런데 그 방법을 사용하게 되면, 문제가 두 개 발생합니다.”
“두 가지나? 어떤 문제입니까?”
“먼저 대한 그룹 화물 전용기가 탄자니아 국제공항에서 적어도 하루 이상은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공항 사용 비용을 제가 부담하면 해결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 주신다면, 첫 번째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핸드폰만 수입하게 되면, 화물기에 화물을 적재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이 남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명훈 지점장은 겨울이 완벽하지 않은 논리를 내세워 싱칼라 회장에게 대한 그룹 화물 전용기를 임대하도록 유도한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그는 싱칼라 회장에게 대한 그룹 제품을 추가로 수출하고 싶은 욕심에 이렇게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리라.
부지점장인 겨울이 이렇게나 열심히 싱칼라 회장을 꼬시고 있는데, 지점장이 뒷짐 지고 나 몰라라 쳐다볼 수만은 없었다.
싱칼라 회장도 산전수전 모두 겪은 노련한 사업가이기 때문에 겨울의 의도를 모르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럴 때는 정공법을 사용하는 것이 제일이었다.
“싱칼라 회장님, 한 부지점장의 의도를 대충 눈치채셨죠?”
“하하, 그럼요. 제가 화물기 빈 공간을 빈틈없이 채워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차, 제가 깜빡하고 있었네요.”
자리에서 일어난 싱칼라 회장은 책상 서랍에서 두툼한 봉투를 가지고 와서 정명훈 지점장에게 건네주었다.
“정 지점장님, 제가 드린 것이 무인지 알고 계시죠?”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핸드폰과 가전제품을 납기보다 11일 단축시킨 것에 대한 보너스.
9,000달러.
하지만 자신들이 받아야 하는 금액에 비해서 봉투가 너무 두꺼웠다.
“싱칼라 회장님, 얼마가 들어 있는지 확인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예상대로 봉투에는 9,000달러가 아닌, 무려 2만 달러가 들어 있었다.
정명훈 지점장은 주는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 모두 받고 싶었으나, 곧 이를 사양했다.
“성의는 감사하지만, 저희는 계약한 대로 9,000달러만 받겠습니다.”
“음,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욕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정기적으로 본사에서 감사를 받다 보니 이런 점에서는 조심하게 됩니다.”
“제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되잖습니까?”
“회장님이 그래 주시리라는 것은 믿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다른 직원들의 입까지 믿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아쉬운 대로 9,000달러만 지급하겠습니다.”
싱칼라 회장과 업무를 마무리하고 현지 사무실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정명훈 지점장은 겨울에게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것을 물었다.
“만약에 말이야, 싱칼라 회장이 핸드폰을 이삼 일 간격으로 운송받는다고 했으면 뭐라고 대답할 생각이었나?”
“X 시리즈 핸드폰이 곧 단종될 예정이라는 점을 강조하면 싱칼라 회장이 수긍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흠…….”
다소 단순한 면이 있었지만 충분히 가능한 논리였다.
6월 중순이 되면 X 시리즈 핸드폰은 하루가 다르게 가격이 하락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핸드폰 말고도 다른 걸 팔 수 있게 됐는데, 싱칼라 회장한테 무엇을 팔아야지 이익을 많이 남길 수 있을까?”
“음, 아무래도 TV를 수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피를 많이 차지하지 않기도 하고…….”
“그건 나도 한 부지점장의 의견에 동의하네만, 아무래도 싱칼라 회장 입장에선 구미가 당기지 않을 듯싶은데…….”
“TV도 이번 X 시리즈처럼 단종 모델인 경우에는 가격이 많이 하락하지 않을까요?”
“음… 확실히…….”
이 말과 함께 정명훈 지점장은 핸드폰을 꺼내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저어… 지점장님, 우리나라는 지금 밤 9시가 넘었습니다만.”
“그게 뭐 어때서.”
정명훈 지점장은 겨울의 대답을 가볍게 일축하고, 기어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 부장… 토요일 밤은 좀 쉬자.]
“최홍주 이사, 단종 예정인 TV가 필요한데, 저렴하게 공급해 줄 수 있나?”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얘기하지 말고, 바이어가 누구인지, 크기별로 몇 대가 필요한지, 좀 설명을 덧붙여서 자세하게 얘기해 봐.]
“바이어는 잠비아 사람이고, TV를 수출할지는 아직 제안하지 않은 상태야. 다음 달에 핸드폰 10만 대를 우리 회사 전용 화물기로 운송할 예정인데, 그때 같이 끼어서 수출해 볼 생각이야.”
[흠, 화물기의 그 넓은 공간을 다 채우려면, 물량이 많아야겠는데?]
심드렁하던 최홍주 이사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서리기 시작했다.
“최 이사, 바이어의 눈이 돌아갈 정도로 획기적인 가격을 제안해 줘 봐.”
[사장님한테 컨펌 받을 시간을 주면 안 되나?]
“컨펌은 나중에 받고, 대충 할인율만 얘기해 줘.”
[음, 일단 공장 출하 가격 대비 30% 정도 할인율을 제시해 봐.]
“설마하니 30%에 우리 법인의 이익도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프리카 법인은 최소 10% 마진은 보장해 줄게.]
“오케이, 이제부터 작전을 짜 보자.”
최홍주 이사와 10분 이상 작전을 수립한 정명훈 지점장은 싱칼라 회장에게 즉시 전화를 걸었다.
[음? 정 지점장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이것 참. 헤어지자마자 다시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한 부지점장이 저한테 또 엉뚱한 아이디어를 얘기하는 바람에 이렇게 전화를 드릴 수밖에 없더군요.”
[하하, 괜찮습니다. 물론, 돈이 되는 아이디어겠지요?]
정명훈 지점장이 슬쩍 미끼를 투척하자, 싱칼라 회장이 곧바로 반응을 보여 왔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회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가지 않고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정명훈 지점장은 겨울에게 말을 걸었다.
“한 부지점장, 이제부터 작전을 수립해 보자고.”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