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페널티 & 보너스
사실 핸드폰 1만 대를 화물 전세기를 이용해서 운송하는 것은 낭비였다.
그런 이유로 싱칼라 회장은 두 번째 화물 전세기는 임대를 취소하고, 일반 여객기를 통해서 운송받는 쪽으로 변경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명훈 지점장은 자신의 생각을 꿰뚫고 있다는 듯 그럴듯한 제안을 해 오고 있었다.
거기에 덧붙여 대한 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화물기를 사용하게 해 준단다.
“정 지점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싱칼라 회장은 찰리 무손다라는 이름을 가진 변호사를 불러서 계약서를 검토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계약서를 꼼꼼하게 검토하고 있던 무손다 변호사가 느닷없이 정명훈 지점장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정 지점장님, 대한 그룹에서 핸드폰과 가전제품의 공급을 지연시키거나 취소하게 되면 저희는 피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은행마다 차이는 있지만, LC를 개설하는 데 3개월 단위로 수수료를 지급해야 한다.
3개월마다 0.2%의 수수료를 은행에 지급한다고 가정하면, LC 오픈 금액이 1,300만 달러이기 때문에 수수료는 2,600달러였다.
얼핏 보기에는 많지 않은 금액이지만, 잠비아 사람들의 평균 월급이 125달러라는 점을 감안하면 무시하지 못할 금액이었다.
정명훈 지점장은 무손다 변호사의 지적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그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확실히 그럴 경우에 문제가 생기겠군요. 저희가 어떻게 해 드리면 될까요?”
“납기일인 5월 15일을 초과하면, LC 개설 비용의 두 배를 페널티로 지급받았으면 합니다.”
“음, 모호하게 그러지 말고, 아예 페널티 금액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괜찮군요. 5,000달러 정도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문제점은 없습니까?”
“네, 없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명훈 지점장은 안정혁 법인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바이어의 요구 사항을 보고했고, 그다지 어렵지 않게 컨펌을 받았다.
“계약서에 페널티 조건을 삽입하도록 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계약서를 수정하기 위해서 정명훈 지점장, 무손다 변호사, 그리고 말라마 과장이 사무실을 떠나 옆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 짬 시간 동안 겨울의 머릿속은 얼마 전에 가쿠타 과장과 나눈 대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싱칼라 회장에게 말을 걸었다.
“싱칼라 회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말씀해 보세요.”
“계약서에 페널티 조건을 삽입하는 반대급부로 보너스 조건을 삽입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보너스라… 어떤 조건인지 말해 주세요.”
“저희가 핸드폰과 가전제품을 납기보다 일주일 앞당긴 5월 8일까지 루사카 국제공항에 도착시켜 주면 보너스로 5,000달러를 지급해 주십시오.”
싱칼라 회장은 겨울의 제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6월 말에 단종 예정인 X 시리즈 핸드폰은 빨리 받을수록 이익이 발생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10달러 정도 올려서 810달러에 팔아도 중간 딜러들은 별다른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취하는 이익은 18만 달러가 추가된다.
이대로만 순조롭게 흘러간다면 그깟 5,000달러 정도는 얼마든지 보너스로 지급해 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부지점장님,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떨까요? 핸드폰과 가전제품을 5월 8일까지 루사카 국제공항에 도착시키면 약속대로 5,000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하고, 하루 앞당길 때마다 1,000달러의 보너스를 추가로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지점장님께 상의드려 보고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겨울은 옆 사무실에서 계약서 수정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정명훈 지점장에게 조용히 다가가서 싱칼라 회장과 나눈 대화 내용을 보고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계약서에 보너스 조건을 삽입하도록 하지.”
“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점장님.”
“괜찮아. 이런 식의 접근은 아주 훌륭해. 기본적인 선만 지키면 이런 행동은 환영이야. 계속 이대로만 해.”
수정된 계약서 내용을 확인한 싱칼라 회장은 주저하지 않고 펜을 들고 계약서에 사인했다.
곧이어 정명훈 지점장도 계약서에 사인을 하면서 거래가 확정되었다.
무손다 변호사는 공증을 위해서 계약서를 들고 사무실 밖으로 퇴장했다.
“정 지점장님, 계약서 공증이 끝나면, 곧바로 LC를 오픈하도록 하겠습니다. 핸드폰과 가전제품은 최대한 빨리 공급해 주십시오.”
“회장님께 보너스를 받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서둘러 보겠습니다.”
“X 시리즈 핸드폰을 5월 중에 다시 한번 작업이 가능할까요?”
“제가 사장님을 만나러 오기 전에 대한 전자에 근무하는 친구한테 부탁해 봤는데, 워낙 예약되어 있는 물량이 많아서 곤란하다고 합니다.”
“쩝… 아쉽게 됐네요.”
“운이 좋으면 6월 초에는 가능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정명훈 지점장의 말에 싱칼라 회장은 즉시 장고에 들어갔다.
6월 초에는 X 시리즈 핸드폰 단종 소식이 언론에 알려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럴 경우 당연히 유통가격은 하락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하락한다고 해도 700달러 밑으로 내려갈 것 같지는 않았다.
‘대당 500달러에 공급받는다고 가정하고, 부대비용을…….’
그는 이런저런 생각 끝에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정 지점장님, X 시리즈 핸드폰을 6월 10일까지 공급받을 수 있을까요?”
“몇 대를 수입하실 생각입니까?”
“10만 대 정도 수입해 볼까 합니다.”
정명훈 지점장은 100% 무리라고 생각했다.
잠비아 인구는 1,800만 명이 조금 넘고, 1인당 GDP도 1,500달러가 조금 넘는 최빈국에 속한다.
이런 경제 규모로는 비싸기로 소문난 X 시리즈 핸드폰을 구입할 수 있는 소비자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실적이 중요하지만, 이익에 눈이 멀어 싱칼라 회장이 손해 보는 것을 마냥 지켜볼 수는 없었다.
“싱칼라 회장님, 10만 대는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5,000만 달러를 조달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럽니까?”
“그게 아니라…….”
정명훈 지점장은 우려스러운 점을 가감 없이 밝혔다.
“아, 그 점이라면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해법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만.”
“제 지인이 탄자니아에서 유통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한테 염가에 넘겨볼 생각입니다.”
탄자니아는 일인당 GDP가 잠비아에 비해서 400달러 정도 적은 1,100달러 수준이지만, 나라 전체의 GDP는 600억 달러로 잠비아에 비해서 세 배 가까이 많은 곳이었다.
즉, 탄자니아의 인구가 잠비아에 비해서 매우 많다는 뜻이다.
실제로 탄자니아의 인구는 대한민국보다 많은 6,000만 명 정도였다.
만약에 싱칼라 회장이 대부분의 핸드폰 물량을 탄자니아의 바이어에게 판매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였다.
단, 가격 경쟁력을 충분히 갖췄을 경우에 한해서.
서둘러 상념을 정리한 정명훈 지점장은 싱칼라 회장과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갔다.
“사장님, 제가 친구한테 전화해서 X 시리즈 10만 대를 공급해 줄 수 있는지 물어보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정명훈 지점장은 하공식 이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싱칼라 회장의 요청 내용을 전달했다.
“…해서 6월 10일까지 공급받았으면 하는데, 가능할까?”
[이번에도 전세 화물기를 띄울 생각인가?]
“아무래도 그래야 하겠지.”
[아무리 늦어도 5월 말까지는 생산해야…….]
하공식 이사는 말을 하다 말고 생각할 것이 있는지 끝말을 흐렸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윽고 생각을 끝냈는지,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다시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이건 도와줄 수 없을 것 같다.]
“하 이사, 나도 이사로 진급할 수 있도록 도와줘 봐.”
[네가 아무리 떼를 써도 안 돼.]
“이유가 뭔데?”
[5월 말까지 생산되는 X 시리즈 핸드폰은 이미 판매 계획이 잡혀 있어.]
“그럼 6월 초에 생산한 것을 공급해 주면 되잖아.”
반면에 싱칼라 회장은 두 사람이 어떤 내용으로 통화하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해서 통화가 마무리될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겨울에게 조용히 물었다.
“저어… 부지점장님,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X 시리즈 핸드폰 공급 일정 가지고 심하게 다투시는 것 같습니다.”
“6월 10일까지 제가 받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까?”
“그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결국 납기가 문제였다.
“부지점장님 생각엔 납기를 5일 정도 늦추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아 작게 고개를 끄덕인 겨울이 대답했다.
“제가 한번 여쭤볼까요?”
“네, 그래 주세요.”
겨울이 정명훈 지점장에게 다가가 손으로 작게 신호를 주자, 정명훈 지점장이 스마트폰을 한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왜?”
“싱칼라 회장님은 납기를 6월 15일로 연기해도 된답니다.”
그 말을 들은 정명훈 지점장은 겨울에게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주고, 하공식 이사와 통화를 이어 나갔다.
“바이어님께서 6월 15일로 납기를 연장해 줄 수 있단다.”
[으이고, 징그러운 놈. 그래. 내가 졌다, 졌어.]
“고마워. 내가 귀국하면 거하게 한잔 쏠게.”
[…언제 올 건데?]
“글쎄다. 죽기 전에는 들어가겠지.”
뚝.
하공식 이사가 그의 말이 가당찮다는 듯 전화를 끊어 버렸다.
“녀석, 성질은…….”
혼잣말을 내뱉은 정명훈 지점장은 하공식 이사와 통화한 내용을 싱칼라 회장에게 사실 그대로 전달했다.
“…제가 어떻게 해서든지 납기를 최대한 앞당겨 보겠습니다.”
“그럼 계약서를 작성할까요?”
“네? 너무 서두르시는 것 아닙니까?”
“그래 봐야 납기가 45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아… 알겠습니다.”
얼떨결에 X 시리즈 핸드폰 10만 대 수출 계약을 체결한 정명훈 지점장은 싱칼라 회장과 나중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현지 사무실로 이동하던 차 안에서 정명훈 사장은 겨울에게 넌지시 물었다.
“한 부지점장, 돈이 필요한가?”
지금 정명훈 지점장은 계약서에 보너스 조건을 삽입한 것에 대해 묻고 있는 중이다.
“네, 필요합니다.”
“보너스를 받게 되면 어디에 사용하려고?”
“계약 성사를 위해서 고생한 현지 직원들에게 인센티브로 나눠 줄 생각이었습니다.”
쾅!
겨울의 대답에 정명훈 지점장은 커다란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현지 직원들이 월급이 적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기가 나서서 신경 써 줘야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발령이 나고 현재까지 보너스를 운운할 정도로 큰 규모의 거래를 성사시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프리카에 발령 받은 지 불과 한 달밖에 되지 않은 겨울은 생각뿐만 아니라 아예 행동으로 옮기고 있었다.
선입견 없는 젊은이의 시각이 이래서 필요한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음, 그런 생각을 하기 쉬지 않을 텐데… 왜 그런 생각을 했나?”
“큰 뜻은 없습니다. 그저… 여기서 받는 월급 가지고도 생활하기가 버겁다는 말을 언뜻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문득 저희 직원들이 생각나더군요.”
가쿠타 과장과 나눈 대화에서 얻은 생각이었지만, 굳이 이런 대화에서 이름을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느낀 겨울이었다.
괜히 이상한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싱칼라 회장한테 보너스를 받아 보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현지 사무실로 복귀한 겨울은 계약서를 스캔 떠서 정명훈 지점장에게 전송했고, 이를 받은 그는 즉시 안정혁 법인장에게 전송했다.
윙윙―
채 5분도 지나지 않아서 정명훈 지점장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정명훈 지점장은 한껏 여유로운 자세로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법인장님.”
[정 지점장, 이게 뭔가?]
“X 시리즈 핸드폰 10만 대 수출 계약서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당연한 것을 왜 묻는 거야?]
“계약서 내용 그대로입니다. 납기에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법인장님께서 힘 좀 써 주십시오.”
[물론이지!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지겠네.]
“그리고 오늘 오후까지 싱칼라 회장이 LC를 오픈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번 주까지 핸드폰과 가전제품을 운송받을 수 있도록 법인장님이 도와주십시오.”
[뭐? 납기가 5월 15일이 아니었나?]
“운송이 앞당겨질수록 싱칼라 회장한테 보너스를 받기로 했습니다. 계약서에도 삽입되어 있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잠시 후, 안정혁 법인장은 보너스 사용 용도에 대해 물어왔고, 정명훈 지점장은 겨울에게 들은 얘기 그대로 대답했다.
[허어, 이것 참. 알겠네. 내가 사장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한이 있더라도, 납기를 앞당겨 보겠네.]
“법인장님, 고맙습니다.”
[고맙긴 무슨… 이 친구야, 현지 직원들도 내 식구인 거 모르나?]
“하하하, 알겠습니다.”
[사장님하고 통화해야 하니까, 이만 끊자고.]
안정혁 법인장과 통화를 끝낸 정명훈 지점장은 바쁘게 일하고 있는 겨울을 향해 흐뭇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한겨울, 고맙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