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오해는 오해를 낳고
“겨울 씨, 들으셨어요?”
“네? 뭘요?
다시 강의실 자리로 돌아온 겨울에게 이재성이 물어 왔다.
겨울은 괜히 찔려 움찔했다.
“보니까 송지유 씨의 정체가 완전 까발려진 것 같던데요?”
“아…….”
자신의 자리에 앉은 이재성이 연신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3반의 모두가 겨울과 일행이 앉은 쪽을 흘깃거리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런 것 같네요.”
“하아… 괜히 이런 일로 송지유 씨가 스트레스 받지 말아야 할 텐데 말이죠. 이런 주목은 별로 달갑지 않네요.”
“그러게요.”
겨울은 또다시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주위에 요주의 인물이 있으면, 본의 아니게 옆에 있는 사람들도 주목을 받기 마련이다.
이재성을 비롯한 다른 인물들은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정식으로 대한 그룹에 입사한 인재들일 뿐만 아니라 충분한 실력도 갖추고 있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어떤가.
만약 최준하가 자신에 대해 떠벌리기라도 한다면.
만에 하나 그가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더라도, 주목 받았을 때 선보일 실력이 없다면 곤란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쩐지 신입 사원 연수가 순탄치 않게 흘러갈 것 같은 짙은 예감에 겨울의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그때, 강의실 문이 거칠게 열리고 송지유가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몰렸지만, 송지유는 무표정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겨울과 일행에게로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저… 송지유 씨, 괜찮으십니까?”
“뭐가 말이죠?”
“음… 그게…….”
이재성이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으나 막상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아, 제가 대한 그룹 회장의 외동딸이라는 게 알려진 거요?”
송지유가 큰 목소리로 말하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겨울 역시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송지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게 중요한가요? 회장 딸이든 아니든 저는 지금 연수를 받고 있는 한낱 신입 사원인걸요. 모든 평가는 공정하게 이뤄질 겁니다. 설사 제가 하위 열다섯 명에 속해도 입사가 취소되는 것에는 변함이 없을 거예요.”
그녀의 당당한 말과 태도에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그렇게 강의실이 적막해진 가운데 조강희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언니, 멋지다…….”
* * *
시작은 항상 어수선함을 동반한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차병훈 과장은 담당하고 있는 3반 분위기 역시 당연히 어수선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치 도서관을 연상시킬 정도로 고요한 침묵이 강의실에 내려앉아 있었다.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그는 재빨리 신입 사원들의 표정을 주욱 살폈다.
모두 자신에게 시선에 향해 있으나, 몇몇은 요주의 인물인 송지유를 향해 힐끔거리는 눈치였다.
‘발각됐구나.’
송지유 정체가 언젠가는 탄로 날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 시기가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괜히 논란이 되지 않도록 최대한 공정하고 공평하게 대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차병훈 과장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교탁으로 이동해서 가볍게 헛기침하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네.”
모두가 질문에 한소리로 답했다.
“오후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교재를 나눠 드릴 예정입니다. 선출된 각 팀의 팀장들은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 팀장들이 일어나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탁.
강의실 문이 닫히자, 그간 조용하던 것이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겨울의 팀 역시 다를 것 없었다.
“오빠, 오빠. 봤어요? 지유 언니, 진짜 멋있지 않아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하는 조강희의 모습에 겨울은 피식 웃고 말았다.
처음만 해도 은근 경계하고 있던 그녀가 방금 전 송지유가 보여 준 모습 하나로 이렇게 바뀐 것이 어이 없던 것이다.
“멋있지. 남자인 내가 봐도 멋지더라.”
“그쵸. 회장 딸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봐요.”
이재성도 신이 나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처음엔 조마조마했는데, 정말 멋지더라고요. 저런 사람이 저희 팀의 팀장이라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음, 그래도 괜히 논란이 되거나 그러진 않겠죠?”
조강희가 슬쩍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 과격한 사람들은 좋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희에게 피해가 올 정도로 논란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만약 송지유 씨가 미흡하게 대처했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했으면 좀 문제가 됐을 수는 있지만, 공정성에 대해 침착하게 말을 꺼내서 괜찮을 겁니다.”
“그런가요.”
“그럼요. 듣자 하니 면접도 치르고 온 거라 하더군요. 크, 멋지지 않습니까? 재벌 2세인데도 편법을 부리지 않고 당당히 입사하는 모습이.”
이재성이 순수하게 감탄하며 송지유를 칭찬했다.
겨울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이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특히 편법이라는 단어가 그의 양심을 콕콕 찔러 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병훈 과장과 각 팀장들이 교재를 가지고 돌아왔다.
교재 배포가 끝나자, 차병훈 과장은 화이트보드에 큼지막하게 다음과 같이 적고 입을 열었다.
― 팀명, 팀 구호, 팀 기, 팀 노래(퍼포먼스 포함)
“지금부터 내일 점심 식사 전까지 여러분은 팀워크를 다지기 위한 활동을 전개할 예정입니다. 각 팀은 제가 하는 얘기를 귀담아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팀명은 여러분이 연수가 끝날 때까지 사용해야…….”
차병훈 과장은 팀명부터 팀 노래까지 만드는 방법과 기준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팀 노래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노래를 개사하는 편이 좋은 평가를 받을 겁니다. 이제부터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평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각 반마다 경연 대회를 진행해서 1등을 차지한 팀은 100점이 부여됩니다. 그리고 각 반에서 1등을 차지한 팀은 대강당 모여서 또다시 대회를 진행합니다. 최종적으로 1등을 차지한 팀에게는 특별 점수로 500점이 부여됩니다.”
차병훈 과장은 숨이 찬지,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작년까지는 없던 페널티 규정이 하나 생겼습니다. 각 반에서 경연을 제일 못한 Worst, 최악의 팀을 선정해서 마이너스 100점을 적용할 예정입니다.”
“네?!”
거의 모든 신입 사원들이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연수 시작부터 마이너스 100점을 받는다고 하는데, 좋아할 사람들이 누가 있겠는가.
순식간에 입사가 취소될 하위 열다섯 명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럼 질문 받겠습니다.”
다들 궁금한 게 많은지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왔다.
차병훈 과장은 그중 하나를 지목했다.
“과장님, 평가는 누가 합니까?”
“반에서의 평가는 여러분이 직접 할 예정입니다. 1등 팀들이 벌이는 경연 대회는 심사 위원들을 초빙할 예정입니다. 다른 분.”
“2등과 3등은 점수 배점이 없습니까?”
“네, 없습니다.”
“500점은 어떻게 백분율로 환산합니까?”
“100점짜리 지필 시험을 다섯 개 치른 것으로 환산할 예정입니다.”
순식간에 강의실이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중에는 당연히 겨울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수 성적 평균 70점을 넘기기 위해서는 경연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는 것이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할 터였다.
하지만 1등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관문도 많았다.
경연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65개 팀을 뒤에 줄 세워야 한다는 뜻.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 해서든지 1등을 차지하려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래도 겨울은 의욕이 넘쳤다.
경연 대회만큼은 이 잘난 사람들과 충분히 겨뤄 볼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몸을 쓰는 일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좋았어! 경연 대회에서 승부를 보자.’
그렇게 겨울이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질 때, 건너편 자리에 앉아 있던 이재성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를 본 겨울은 문득 이전에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잠시 눈을 마주치자, 그가 조용히 겨울의 귓가에 속삭였다.
“겨울 씨, 제가 대강당에서 한 말을 기억하시죠?”
노하우.
학교 선배들에게 받은 노하우가 이재성에게 있었다.
겨울은 갑자기 이재성의 존재가 든든해지는 것만 같았다.
“설마 선배분 중에서 1등을 하신 분이 계십니까?”
겨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이재성이 말없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둘이 속닥이는 중에도 최병훈 과장과 신입 사원의 질의응답은 계속되었다.
“과장님, 저희가 선정한 팀명이 다른 팀과 겹치면 어떻게 됩니까?”
“예를 들어서 세 개의 팀이 대한민국이라는 팀명을 선정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이 세 개의 팀은 별도로 모여서 제비뽑기를 실시합니다. 그러고 대한민국 1, 2, 3팀으로 나눌 예정입니다. 거의 매년 이런 사태가 발생하니, 주의해서 팀명을 정하시길 바랍니다.”
“연습은 어디서 합니까?”
“저녁 시간 이후에는 비어 있는 강의실이 제법 있습니다. 그중 하나를 골라 그곳에서 하시면 됩니다.”
“내일 지필 테스트는 없습니까?”
“네, 없습니다.”
“반에서 실시하는 경연 대회는 몇 시에 시작할 예정입니까?”
“오전 9시에 시작할 예정입니다.”
“경연 대회와 관련해서 필요한 준비물이 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청하면 최대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연습 잘 하시고, 내일 오전 8시에 뵙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차병훈 과장이 가볍게 목례하고 강의실에서 나갔다.
그와 동시에 강의실은 토론의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자, 제가 선배님들께 받은 노하우를 개방하겠습니다.”
이재성의 말에 모두가 잔뜩 기대가 어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재성 씨, 아무래도 노하우는 접어 두는 편이 좋을 거 같아요.”
“네?”
송지유의 단호한 말에 팀원 모두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수를 성공적으로 보낸 선배님들이 주신 노하우라고 들었어요.”
“네, 맞습니다. 허세가 아니라 진짭니다. 무려 책자까지 만들어서 주셨습니다.”
이재성은 괜히 당황해서 자료를 꺼내 들었다.
제법 두께가 있고 종이 끝이 너덜너덜한 것이 꽤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간 듯했다.
송지유는 고개를 저었다.
“팀을 위해 준비하신 노하우를 꺼내 주셔서 감사하지만, 그게 팀에 좋은 영향을 주진 않을 거 같아요.”
“무슨 말씀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면접도 그렇고, 이번 경연 대회도 그렇고, 정해진 답은 없어요. 회사는 우리가 어떤 답을 어떻게 내놓는지가 궁금한 거예요. 우리가 만약 과거 선배님들이 해 온 것들을 그대로 따라한다면, 결국 그것밖에 안 되는 인물이라 평가받을 거예요. 심사 위원들은 바보가 아니에요. 이재성 씨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 책자를 주신 선배님이라는 분은 조금 의심이 되네요. 정말 1등을 차지하신 게 맞나요?”
“…….”
이재성은 그녀의 물음에 명쾌히 답할 수가 없었다.
첫 작성자가 1등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이걸 준 선배가 좋은 성적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기 때문이다.
그저 통과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말뿐이었다.
“물론, 참고할 만한 것은 참고해야겠지요. 하지만 결코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내놓은 결과물이 그것보다 못하리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네요.”
그녀의 말에 팀원들이 하나씩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다들 어디 가서 영재라는 소리는 한 번씩 들어 본 사람들이기에 노하우가 없어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노하우를 꺼내 든 이재성마저도 그녀의 말에 납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는 지금 멤버가 상당히 마음에 들어요. 이 멤버끼리 같이 고민해서 만든 결과물이 어떨지 무척이나 궁금해요. 재성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재성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렇게 깔끔하게 몰렸음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선배가 준 노하우보다도 자신이 더 낫다는 말처럼 들려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이재성은 책자를 다시 가방 안에 구겨 넣고는 그답게 털털한 웃음을 지었다.
“동의합니다. 저도 괜히 불안해서 얄팍한 수를 생각한 거 같습니다. 그래도 팀장님 덕에 든든합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이 결정에 이의 있으신 분 있나요?”
송지유가 팀원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불만을 가진 사람은 없어 보였다.
다들 의지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겨울 한 명만이 자괴감에 찬 눈빛일 뿐이었다.
면접 때도 생각한 것이지만, 참 솔직한 사람이었다.
송지유는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없으면 팀명부터 정하도록 할게요. 의견 있으신 분?”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