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비밀은 없다
그때, 한 남자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화이트보드에 큼지막하게 본인의 이름과 핸드폰 번호를 적고 신입 사원들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신입 사원 연수팀 소속으로 5주 동안 여러분의 연수를 도와줄 차병훈 과장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아직 팀을 정하지 못해 서성이던 신입 사원들이 아무 빈자리를 골라 서둘러 앉았다.
짝짝짝.
그 외의 신입 사원들은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박수 세례를 받은 차병훈 과장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환영해 줘서 고맙습니다. 연수 기간 동안에 궁금한 것과 요구 사항이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물어봐 주십시오. 강의실에서 지켜야 할 기본예절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그런 기본이 되는 분들만이 이 연수에 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차병훈 과장이 가벼운 말투로 말을 하자 신입 사원들도 긴장을 풀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아, 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언급하겠습니다. 강의 시간 동안에는 핸드폰 전원을 꺼 주십시오. 매년 잘 안 지켜져서 많은 이들이 감점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 믿겠습니다.”
그 말끝으로 차병훈 과장이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신입 사원들도 덩달아 그의 손끝을 따라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 양쪽 끝에 CCTV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보일 겁니다. CCTV의 용도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굳이 뽑으라면 커닝 방지가 주 용도입니다.”
그때, 한 명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혹시 커닝하다가 발각되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퇴소입니다. 연수에서 커닝하는 그런 사람은 우리 대한 그룹이 바라는 인재상이 아닙니다. 물론, 퇴소가 된 인원은 입사할 수 없습니다. 질문자가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커닝하시면 안 됩니다?”
장난스러운 최병훈 과장의 말에 모두가 작게 웃었다.
그런 분위기를 타서 다른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너무 겁주시는 거 아닙니까?”
“겁이라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회장님의 특별 지시도 있기에 더 거리낄 게 없는 상황입니다. 이건 정말로 진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커닝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을 한다면 가차없이 퇴소될 수 있으니 조심해 주세요.”
훈훈하던 분위기도 잠시, 최병훈 과장의 말 때문에 강의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차병훈 과장은 그런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작년까지의 지필 테스트는 전날에 배운 것에 대한 복습 개념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어렵게 출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신입 사원들의 최종 합격 여부가 달려 있기 때문에 상당히 까다롭고 어렵게 출제할 예정입니다. 전체 평균 70점을 생각하고 문제 난이도를 설정했으니 다들 긴장하셔야 할 겁니다.”
겨울은 그 말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잘난 사람들 중 거르고 걸러 모인 사람들이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평균이 70점이 되는 난이도라니.
‘설마 나 때문에 바뀐 건가?’
굳이 올해부터 이렇게 바뀐다는 점이 겨울은 이상하게 느껴졌다.
겨울이 혼자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차병훈 과장의 공지 사항 전달은 계속됐다.
“연수원에는 여러분뿐만 아니라 먼저 온 선배들도 같이 연수를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혼잡을 피하기 위해서 점심과 저녁 식사 시간은 30분씩 늦게 시작할 예정입니다. 아침은 7시부터 배식을 시작하니, 편안한 시간에 가서 식사하면 됩니다.”
최병훈 과장은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적당히 긴장이 잡혀 있는 것이 만족스러운 그는 다시 엷은 웃음을 띤 채 말을 이었다.
“그럼 점심 식사 시간 전까지 여러분은 팀원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팀장을 뽑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과 함께 차병훈 과장이 퇴장했다.
동시에 강의실이 소란스러워졌다.
각 팀원들끼리 자기소개와 함께 팀장 선출을 시작한 것이다.
겨울의 팀도 다를 것은 없었다.
“저부터 소개할게요. 송지유라고 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인사에 모두가 박수를 쳐 주었다.
특히 남자들이 열렬히 환호하며 반겨 주었다.
“그럼 다음으로 제가 하죠.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재성이라고 합니다. 우리 파이팅해서 다 같이 입사할 수 있도록 합시다. 보다시피 털털하고 어려울 것 없는 성격이니 편하게 대해 주세요.”
이재성은 특유의 유쾌함으로 인사했다.
겨울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호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이재성은 첫인상 만들기에 성공한 듯했다.
순서가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듯하자, 다음으로 겨울이 눈치껏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한겨울이라고 합니다. 남성분들이 많아서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이래봬도 운동을 조금 해서 튼실합니다. 힘쓰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맡겨 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아 조금 쑥스러워하며 자리에 앉으려던 겨울에게 이재성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질문 하나 해도 괜찮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운동을 하셨다고 했는데, 무슨 운동을 하셨습니까?”
겨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재성을 바라보았다.
알면서 물어보는 그의 의도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재성은 미소만 방긋 띠우고 있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축구를 좀 했습니다. 그만둔 지 꽤 됐지만, 그래도 운동은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오늘 처음 본 팀원 한 명이 겨울에게 말을 붙여 왔다.
“오, 그럼 좋아하는 팀이 어디십니까? 저도 축구를 좀 좋아해서…….”
“저는…….”
그 외에도 다른 팀원들도 적극적으로 질문해 왔다.
그제야 겨울은 이재성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겨울의 인사가 빈약하다 보니 축구라는 공감대를 통해 팀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안겨 주려는 것이었다.
자신의 차례가 너무 길어지는 듯해 서둘러 자리에 앉은 겨울은 이재성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이재성 역시 밝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은 이재성이 왜 이렇게 자신에게 잘 대해 주는지 의문이었다.
정말 고등학교 때의 자그마한 인연 때문에 이렇게 잘해 주는 걸까 의심스러운 겨울이었다.
겨울의 의심대로 이재성에게는 다른 의도가 있었다.
‘흐흐흐, 이 정도면 충분히 점수 좀 땄겠지?’
이재성은 잠시 머릿속으로 좋아하는 후배를 떠올렸다.
그녀의 이름도 겨울처럼 특이했다.
가을에 태어나서 가을이라는 이름을 얻은 그녀.
그녀는 종종 겨울에 태어난 자신의 오빠 얘기를 하곤 했다.
덕분에 겨울이 축구 선수를 지망하고 있고, 그가 모교의 철천지원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대강당에 앉아 있을 때, 옆을 무심결에 돌아본 이유도 언뜻 들려온 한겨울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로 그녀의 오빠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녀가 은근히 오빠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이재성은 알기에 연수에서 미리 겨울에게 점수를 따 놓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겨울은 그저 이재성이 사람이 참 착하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조강희입니다. 편하게 강희라고 불러 주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수줍게 인사하는 조강희의 풋풋한 모습에 모두 하나같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심지어 송지유마저도 말이다.
뒤이어 강일성, 장근호, 김헌기, 이석순까지는 무난하게 자기소개를 끝냈다.
그렇게 할 말이 없어져 분위기가 어색해지려던 찰나, 이재성이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우리 자기소개도 끝났으니, 팀장을 뽑아 볼까요? 혹시 추천하고 싶은 사람 있나요?”
마치 이런 자리에 많이 서 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말하는 이재성을 겨울이 감탄스러운 눈빛으로 볼 때였다.
“저… 저는 겨울 오빠, 아니, 한겨울 씨를 추천합니다.”
조강희가 손을 들어 겨울을 팀장으로 추천했다.
“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그게, 한겨울 씨랑 제가 안면이 있는 사이인데, 생각보다 꼼꼼하고 듬직한 면이 있어서요. 자원하시는 분이 없다면 한겨울 씨가 맡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겨울은 어이가 없었다.
조강희와 안면이 있는 것은 맞지만, 꼼꼼하거나 듬직한 면을 보여 줄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저 친구인 조강석의 여동생이라는 인식만 있을 뿐이다.
자신을 도와주려고 없는 말까지 지어내는 것인가 싶어 고마우면서도 조금 부담스러운 겨울이었다.
“음, 추천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제가 여러분을 잘 이끌 자신이 없기도 하고 저보다 팀장 자리에 더 어울리는 분이 계시는 거 같습니다.”
“오, 그게 누굽니까?”
이재성은 겨울이 누굴 꼽을지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질문했다.
그의 질문을 받은 겨울의 시선은 이내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저는 송지유 씨를 추천합니다.”
* * *
“겨울 오빠, 왜 지유 언니를 추천한 거예요?”
깨작깨작 젓가락을 놀리고 있는 겨울에게 조강희가 물어 왔다.
결국 송지유는 만장일치로 팀장 자리에 올랐다.
겨울 일행을 제외한 사람들은 그녀가 송훈석 회장의 딸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지만, 그럼에도 반대표는 나오지 않았다.
눈에 띄는 외모가 가장 주요인이었지만, 추천받은 이후 그녀가 보여 준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팀장으로서 포부를 말하는데, 팀원 중 몇몇은 아예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모든 팀을 통틀어 1등 팀을 목표로 힘내 보자는 형식적인 말이었지만, 그녀의 말에는 묘한 설득력과 카리스마가 있었다.
같은 말을 다른 이가 했더라면 그 느낌이 완전 달랐을 것이 분명하다고 겨울은 생각했다.
하지만 조강희는 조금 불만스러웠다.
모처럼 용기 내서 겨울을 팀장으로 추천했는데, 호의를 그가 걷어찬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별 이유 없어. 그냥 그 자리가 어울려서 추천한 거야.”
무덤덤하게 대답했지만, 겨울 역시 팀장 자리가 탐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팀장을 맡게 되면 이득이 있을 터였다.
어쩌면 이종수 이사가 말한 특별 점수라는 게 팀장을 맡은 이에게만 주어지는 걸 수도 있고.
당장 점수 하나하나가 절박하지만, 굳이 어울리지도 않게 허세 부리며 얻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면접에서 비슷한 꼴을 보이기도 했고.
“오빠도 충분히 잘 어울리는데…….”
시무룩해진 조강희를 어떻게 달래 줘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식판을 든 거대한 덩치 하나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어, 대산 씨.”
“안녕하세요. 합석해도 될까요?”
“그럼요. 아, 여긴 저희 팀원인 조강희입니다. 강희야, 내 룸메이트인 장대산 씨야.”
“안녕하세요.”
장대산이 식판을 내려놓으며 정중히 인사했다.
자신의 두 배 가까이 되는 덩치가 인사하자 조금 당황한 조강희였지만, 이내 그녀도 정중히 인사했다.
“그러고 보니 팀은 잘 짜셨어요?”
“네. 여기 강희도 그렇고, 좋은 분들이 많더군요. 괜히 제가 폐를 끼칠까 봐 걱정입니다. 대산 씨는요?”
어느 정도 예의상 되물은 질문이었다.
다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시간 안에 팀을 잘 짰는지 아닌지를 파악하기는 너무도 짧기 때문이다.
당연히 잘 짰다거나 모르겠다는 답변을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장대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아무래도 전 큰일 난 거 같아요.”
“네? 팀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장대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팀에 관종이 한 명 있어서 걱정입니다.”
“관종이요?”
“네. 자기소개하면서 자기 아버지가 대한 그룹 최성진 부회장이라고 자기 앞에서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던데… 하아…….”
겨울은 단번에 그가 말하는 관종이 누구인지 눈치챘다.
‘최준하.’
녀석은 꿈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예의라곤 1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초면인 자신에게 부모님을 가지고 시비를 걸 정도이니, 회사 신입 사원들에게는 더하면 더했을 것이다.
“많이 피곤하셨겠네요.”
“네… 그러고 보니 겨울 씨네 반에도 비슷한 사람이 하나 있지 않나요?”
“네?”
겨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준하처럼 3반에 소란을 일으킨 사람은 없었다.
“그 관종 말로는 3반에 대한 그룹 회장님의 외동딸이 있다던데… 모르시나요?”
“아니, 그걸 그 사람이 말하고 다녔어요?”
“네. 저희 팀뿐만 아니라 그냥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는 것 같던데요. 어차피 다른 신입 사원들은 둘을 띄워 줄 엑스트라나 다름없다고 그러더라고요.”
겨울은 괜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송지유에 대한 얘기도 했으니, 자신의 얘기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터였다.
편법으로 서류 전형에 통과한 자신을 과연 사람들이 좋게 볼까.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최준하의 입을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하는 그였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