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신경전
대강당은 고요하던 게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이미 입사를 했는데 연수 성적만으로 입사가 취소된다니.
겨울 역시 큰일 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번 대한 그룹 신입 사원 연수에 참여한 신입 사원들은 모두 520명 내외.
자신과 송지유, 최준하, 이 세 명을 제외한 다른 신입 사원들은 모두 치열한 경쟁을 뚫고 최종적으로 선발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 520명을 입사 성적순으로 줄을 세운다면, 꼴찌는 보나마나 자기가 될 터였다.
하지만 당황스러워하는 것도 잠시, 겨울은 냉정을 되찾았다.
자신의 뒤에 열다섯 명을 세우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도 평균 70점을 달성해야 하는 문제가 우선이었다.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을 자신의 뒤에 세울지 고민하기보다는 묵묵히 자신의 방식대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겨울이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이종수 이사의 설명은 계속됐다.
“이와 반대로 연수 성적 상위 열다섯 명은 본인들이 원하는 회사, 원하는 부서에 조건 없이 배치시켜 주겠습니다.”
그 말에 웅성거리던 대강당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때, 누군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회장님 비서실에 배치시켜 달라고 해도 들어주실 겁니까?”
“네, 물론입니다.”
“배치시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부서로 전배시키는 것은 아닙니까?”
“최소 3년은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시간 관계상 질문은 더 받지 않겠습니다. 이제 스크린을 주목해 주십시오.”
팟.
대강당에 조명이 어두워지고, 스크린에 ‘신입 사원 평가 점수 배점표’이라는 제목의 장표가 비춰졌다.
“장표에서 보신 것과 같이 평가 점수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반 점수, 팀 점수, 개인 점수, 특별 점수가 바로 이에 해당됩니다. 반은 마흔여덟 명, 팀은 여덟 명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 즉, 반과 팀은 공동 평가고, 개인과 특별 점수는 개인 평가입니다.”
그때, 누군가 눈치 없이 손을 들었다.
분명 이종수 이사가 더 질문을 받지 않겠다 말했음에도 이를 무시한 행동이었다.
이종수 이사는 해당 사원의 아이디카드를 잠시 주시한 뒤 그를 지목했다.
“특별 점수가 무엇인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말 그대로 개인에게 주는 특별 점수입니다. 배점은 모두 1,000점입니다. 대상자는 연수 과정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선정될 예정인데, 불행하게도 대상자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특별 점수는 잊어버리고 현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이종수 이사는 잠시 물을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반은 저희가 임의로 배정해서 강당 밖의 벽에 붙여 놓았습니다. 팀은 각 반에 배정된 신입 사원들끼리 자체적으로 구성하면 됩니다. 참고로 팀원들은 연수 시작과 끝을 같이할 예정이니 신중하게 정하셔야 할 겁니다.”
겨울은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저마다 개개인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닌 단체 평가가 있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잘난 사람들 안에서 과연 자신이 돋보일 수 있을지, 그 사람들에게 괜히 자신이 폐가 되는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겨울이 속으로 노심초사하고 있으나, 이를 모르는 이재성이 태평하게 말을 걸었다.
“한겨울 씨랑 같은 팀이 되면 좋겠네요.”
“…네. 그러면 좋겠네요. 만약 반이 같으면 같이 팀을 이루시죠.”
“좋습니다.”
그 말에 겨울은 한시름을 덜었다.
그래도 자신에게 호감이 있어 보이는 이재성과 한 팀이 되면 부담이 덜하리라.
“모든 평가는 여러분께 투명하게 공개할 겁니다. 반과 팀 평가는 점수 배점 역시 사전에 공지할 예정입니다. 개인 평가는 전일 배운 과목을 다음 날 아침 8시에 시험을 치르고, 이후 결과를 공지할 예정입니다.”
겨울은 결과가 공지된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개인의 성적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겨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이종수 이사가 입을 열었다.
“결과는 매일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 신입 사원 커뮤니티에 업데이트해 놓겠습니다. 결과는 실명이 아닌, 여러분께 배정된 사원 번호로 공개할 예정입니다. 사원 번호는 아이디카드에 적혀 있으니 확인 바랍니다.”
준비된 설명이 다한 것인지, 이종수 이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마무리를 위해 다시 말을 꺼냈다.
“지금부터 30분의 시간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배정된 반으로 이동해서 팀을 구성해 주십시오. 혼잡을 피하기 위해 맨 뒤부터 퇴장하도록 하겠습니다.”
뒷줄에 앉아 있던 겨울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대강당 밖으로 나왔다.
그는 숫자로 빼곡하게 들어찬 배정표부터 확인했다.
‘3반.’
겨울은 옆에 서 있는 장대산에게 물었다.
“장대산 씨는 몇 반이세요?”
“저는… 2반입니다. 한겨울 씨는요?”
“아쉽게도 저는 3반이에요. 그래도 옆 반이니까 자주 봐요. 종종 놀러 갈게요.”
물론, 공부하느라 그럴 시간은 없겠지만,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장대산도 그런 겨울의 마음을 알았는지,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말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럼요. 일단 강의실로 이동하시죠. 이따가 생활관에서 봐요.”
그렇게 장대산과 기분 좋게 헤어진 겨울은 자신의 반을 찾아 들어갔다.
강의실에는 책상들이 미음자 형태로 간격에 맞게 네 개씩 놓여 있었다.
여덟 명이 한 팀이라 했으니, 한 책상에 두 명씩 앉는 게 맞을 것이다.
겨울은 어디에 앉을까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창가 쪽 자리에 반가운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겨울은 반가운 마음에 조용히 다가가 비어 있는 옆자리에 앉았다.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는지, 핸드폰 삼매경에 빠져 있던 상대방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녀는 겨울을 보고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가씨, 옆에 앉아도 될까요?”
“어? 겨울 오빠!”
조강희가 깜짝 놀란 얼굴로 겨울을 바라보았다.
겨울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오빠도 3반이에요? 진짜?”
“그렇게 됐네. 잘 부탁해.”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서로 돕기로 한 거 잊지 않으셨죠?”
조강희가 윙크하며 애교를 부렸다.
그 모습을 보고 겨울도 장난쳤다.
“물론이지. 그러는 아가씨야말로 다른 팀원을 벌써 구한 건 아니겠죠?”
“호호, 오빠, 말투 뭐예요. 제가 뭐라고 벌써 팀원을 구해요. 앉아 있는 것만 봐도 알잖아요. 저 솔로예요.”
새침하게 머리를 넘기는 조강희를 보고 겨울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겨울에게 말을 걸었다.
“오, 한겨울 씨!”
“아, 이재성 씨. 재성 씨도 3반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하하, 설마 했는데 진짜로 같은 반이 될 줄은 몰랐네요.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아도 되죠?”
겨울은 잠시 고개를 돌려 조강희를 쳐다보았다.
조강희는 별생각이 없는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여기 아가씨도 괜찮다고 하시네요.”
“하하하, 잘 부탁드립니다. 이재성이라고 합니다.”
겨울에게 털털하게 말을 걸던 모습과는 달리, 조강희는 조신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조강희라고 해요. 저도 잘 부탁드려요.”
조강희의 또 다른 모습에 겨울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어차피 고민해도 이유를 찾지 못할 거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제 친구 동생입니다. 강희야, 우리 고등학교 라이벌이던 장원고 알지? 재성 씨가 거기 출신이래.”
“진짜요? 이상하다…….”
“뭐가 이상해?”
“장원고 출신이면 겨울 오빠에게 이렇게 편하게 대할 리가 없는데…….”
조강희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겨울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이재성이 크게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하! 제 모교의 철천지원수지만, 축구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겨울 씨의 팬입니다.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재성의 말과 행동은 거리낌이 없었지만, 그것이 불쾌하기보다는 오히려 유쾌하게 느껴졌다.
그때, 이재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강희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저… 혹시 조강석 씨를 아십니까?”
“아, 네. 제 친오빠예요.”
“역시! 겨울 씨의 친구 동생이라기에 혹시나 했는데 맞았군요. 저 진짜 조강석 선수 팬입니다! 세상에,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의 동생을 만나다니…….”
눈을 빛내며 말하는 것을 보니 이재성의 말은 진심인 듯했다.
겨울은 이재성이 자신을 알아볼 정도이니 조강희도 알아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같이 공감대를 형성해 좋은 팀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여겼지만, 예상외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6년 전의 사고가 아니었다면, 이재성이 지금 보인 반응을 자신 역시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오늘 밤에 매점에서 가볍게 친목 도모라도 하시겠습니까?”
“아, 오늘밤은 아마 시간이 없을 겁니다.”
“네? 시간이 왜 없습니까?”
“왜냐면… 와우!”
이재성은 겨울의 질문에 답하다 말고 고개를 돌려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의 시선은 앞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자를 향해 있었다.
겨울과 조강희의 시선도 그녀에게 향했음은 물론이었다.
당당하게 들어오던 그녀는 잠깐 동안 주위를 둘러보고, 곧장 겨울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겨울에게 말을 건넸다.
“여기 자리 있나요?”
“네. 있습니다만…….”
겨울은 말끝을 흐렸다.
겨울에게 말을 걸어온 그녀가 바로 송지유였기 때문이다.
그는 행여 자신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걱정되었다.
개인 점수야 송지유 능력껏 알아서 잘 챙기겠지만, 만에 하나 자신 때문에 단체 평가에서 저조한 점수를 받으면 회장 딸이라는 이름에 흠이 가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가뜩이나 면접에서 좋지 않은 인상을 주어 더 자신이 없는 겨울이었다.
하지만 그런 겨울의 마음을 모르고 이재성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자리야 충분히 남습니다. 여기 앉으시죠.”
“고마워요.”
이재성이 의자를 빼 주자 송지유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야, 대한 그룹 회장의 따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를 아시나요?”
“그럼요. 얼굴은 처음 봤지만, 송지유라는 이름은 언론에 간간히 노출되지 않았습니까?”
송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직접적으로 언론에 자신을 노출시킨 적은 없지만, 송훈석 회장의 인터뷰를 통해 간간히 이름만 등장한 적은 있었다.
그래도 그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데, 송지유는 이재성이 대한 그룹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라 판단했다.
“송지유라고 해요. 그룹 회장 딸이 아니라 같은 신입 사원으로 대해 주시면 좋겠어요.”
“물론입니다. 가급적이면 다른 사원들에게도 알리지 않겠습니다.”
이재성이 열의를 불태우며 말했다.
송훈석 회장의 무남독녀와 한 팀이라는 것만으로도 분명 적지 않은 이득이 있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겨울 씨랑 아는 사이 같은데… 무슨 사이십니까?”
이재성은 송지유가 이쪽으로 걸어오자마자 겨울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건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질문에 겨울은 물론, 조강희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송지유를 바라보았다.
“우연히 만나서 차나 한잔한 사이죠. 굳이 말하자면 친구겠네요. 그쵸, 겨울 씨?”
“네? 아, 네. 맞습니다. 친구입니다.”
당황해 잠시 말을 더듬은 겨울이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송지유가 굳이 거짓말을 한 것은 다른 팀원들에게 겨울이 특별 채용으로 들어온 사실을 숨겨 주려는 의도인 듯했다.
슬쩍 눈짓하는 송지유가 고마운 겨울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조강희는 어이가 없었다.
‘관리를 잘 받은 티가 난다고?’
확실히 겨울의 말대로 송지유는 관리를 잘 받은 티가 났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뿐인 외모는 아니었다.
압도적인 미모.
강의실 내부의 모든 사람들이 송지유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과연 그렇게 잘나가던 겨울이 스스로를 루저라 말하며 기 죽을 만한 여자였다.
그런 여자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 인기 스타를 빼앗긴다 생각하니 괜히 쓸데없이 오기가 생기는 조강희였다.
“반가워요, 지유 씨. 조강희라고 해요.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집안 배경도, 스펙도, 외모도 안 되지만, 그런 조강희가 송지유보다 나은 점은 있었다.
바로 나이.
굉장히 유치한 발상이지만, 나름 순수하게 자라 온 조강희에게는 최선의 수였다.
“그럼 나도 말 편하게 할께, 강희야. 잘 부탁해.”
하지만 송지유는 아무런 타격이 없다는 듯, 밝게 웃으며 대응했다.
그녀는 조강희가 어떤 의도로 말을 꺼냈는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다만, 그게 너무 어리숙해 귀엽게만 보일 뿐이었다.
인위적인 미소가 나가기도 전, 정말로 새침한 동생 보는 듯한 마음에 진심으로 미소를 지어 버린 그녀였다.
반대로 조강희는 나름 시도한 공격에도 송지유가 화사하게 웃으니 괜히 아니꼬웠다.
그럼에도 애써 밝게 웃어 보이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두 여성이 서로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자, 주변의 시선도 따라 모였다.
이내 부족하던 자리를 주변에서 서성거리던 몇몇의 사람들이 다가와 채워 넣었다.
여전히 자리가 듬성듬성 비어 있는 다른 팀에 비하면 압도적인 속도였다.
그 때문에 이재성은 앞으로의 연수가 잘 풀릴 것만 같아 싱글벙글 미소를 띠웠다.
“겨울 씨도 참 대단합니다. 연수원에 아는 지인이 있는 것도 흔치 않은데, 그 지인들이 다 저렇게 미인이라니. 부럽습니다, 정말.”
“부럽기는요. 우연입니다.”
겨울은 애써 웃으며 속으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재성이 자신을 부러워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정작 당사자인 자신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자신의 사정을 알고 도와주는 조강희야 그렇다 치더라도, 송지유의 존재는 겨울에게 부담, 그 자체였다.
하다못해 그녀가 다른 팀으로 갔다면 선의의 경쟁을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연수에 임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같은 팀이고, 단체로 점수를 매겨진다는 점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혹여 면접 때처럼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줄까 두려운 그였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