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특단의 조치
“태워 줘서 고맙다.”
“고마워요, 오빠.”
저 멀리 목적지인 연수원 정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겨울과 조강희가 보내오는 인사에 호영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퇴소할 때도 지금처럼 밝은 모습으로 봤으면 좋겠다.”
“물론이지. 밝은 모습 보여 줄 테니까 그때도 우리 픽업하러 와라.”
겨울의 말에 호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연수원 정문에서 내린 겨울과 조강희는 캐리어를 끌고 목적지인 대강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빠, 그럼 같이 면접 본 송지유 씨도 연수에 참석한대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 나도 잘 모르겠네.”
“면접 이후로 연락 안 했어요?”
“어. 딱히 통화할 용건도 없고.”
“예뻐요?”
뜬금없는 조강희의 질문에 겨울은 무심코 두 사람의 미모를 견주어 보았다.
송지유는 이목구비가 큼지막한 서구형 미인이었고, 조강희는 은은한 미를 가진 동양형 미인이었다.
굳이 취향을 따지자면 송지유가 더 취향이었지만, 굳이 이런 얘기를 꺼내서 괜히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예쁘지. 관리를 잘 받은 티가 나더라.”
“흐음, 그렇구나.”
별로 만족할 만한 대답은 아니었는지, 조강희의 표정이 무심해졌다.
‘얘 지금 질투하나?’
조강희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했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겨울은 무신경한 성격에도 의외로 연애 경험이 많았다.
6년 전의 교통사고로 인생이 180도 바뀌었지만, 그전까지는 한 달이 멀다하고 여자 친구를 갈아 치웠다.
사고가 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변변한 연애조차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여성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는 시도 자체가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도무지 조강희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겨울은 대놓고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왜 물어봤는데?”
“음, 아까 차 안에서 송지유 씨 얘기할 때 오빠 눈빛이 달라져서요.”
“응? 진짜?”
겨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에게 가진 감정이라곤 미안함과 고마움뿐이었다.
연애 감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거야 뭐… 어려운 부탁을 들어줬으니 고마워서 그런 거지.”
“흠, 진짜요?”
“그럼. 내가 뭐라고 그런 여자를 좋아하냐.”
그 말에 조강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겨울을 쳐다보았다.
“네? 오빠가 어때서요?”
“아니, 그야… 스펙도 변변치 않고 외모도… 흔히 말하는 루저지, 뭐.”
조강희는 어이가 없었다.
겨울이 축구를 하던 당시만 해도 그는 연예인이나 다름없었다.
괜히 겨울이 한 달에 한 번씩 여자 친구가 바뀐 게 아니었다.
축구를 잘하는 것은 물론, 외모 역시 훌륭했다.
그런데 루저라니.
스펙이 변변치 않은 건 사실이지만, 외모만큼은 아니었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네…….”
대강당에 도착한 겨울과 조강희는 기다리고 있던 연수원 직원에게 다가가서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신입 사원 연수에 참가한 한겨울이라고 합니다.”
“저는 조강희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연수를 담당하고 있는 박병철 대리입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혹시 몰라서 조금 일찍 출발했습니다.”
“하하,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지각하는 것보다는 일찍 도착하는 것이 훨씬 낫죠. 여기, 리스트에서 본인 이름을 찾아 확인란에 체크하고 사인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겨울이 먼저 사인하고, 조강희가 뒤이어 펜을 잡았다.
일련의 과정이 끝나자, 박병철 대리는 겨울과 조강희의 증명사진이 인쇄된 아이디카드와 제법 부피가 큰 종이가방을 두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아이디카드는 연수가 끝날 때까지 목에 계속 걸어 놓고 계셔야 합니다. 종이가방에는 운동복과 운동화가 들어 있습니다. 일과 시간 이후에 입으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아이디카드 뒷면을 확인해 보시면 여러분의 생활관이 적혀 있을 겁니다. 거기서 짐 풀고 잠깐 쉬다가 10시 25분까지 여기로 다시 오시면 됩니다.”
조강희와 헤어진 겨울은 배정된 생활관으로 이동했다.
겨울이 신입 사원 연수 기간 동안 사용하게 될 생활관은 B동 203호였다.
생활관 문을 열고 들어간 겨울은 내부를 꼼꼼히 둘러보았다.
방은 생각한 것보다 컸다.
1인용 침대 두 개와 책상 두 개, 옷장 두 개가 들어가고도 바닥에 누울 수 있을 정도였다.
아직 룸메이트는 오지 않은 것 같아 겨울은 침대 하나를 먼저 차지했다.
그러고는 박병철 대리에게 받은 운동복과 운동화를 한번 입고 신어 보았다.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바꾸러 가려 했지만, 그런 생각이 무심하게도 사이즈는 딱 맞았다.
“…내가 옷 사이즈를 알려 준 적이 있나?”
혼잣말을 내뱉은 겨울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박병철 대리가 눈대중으로 사이즈를 잘 확인한 것으로 대충 납득한 겨울은 캐리어를 열어 개인 물품을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정리를 끝낸 겨울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9시 20분.
집합 시간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이 넘게 남는 상황이었다.
“아차,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겨울은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토익 공부를 시작했다.
책상에 앉아 참고서를 한 장, 두 장 넘기던 겨울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했다.
한참이나 집중하던 중, 누군가 겨울의 어깨를 한 손으로 붙잡고 흔들었다.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몸무게가 족히 100㎏는 넘어 보이는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방해해서 죄송해요. 그래도 이제 슬슬 일어나지 않으면 위험할 것 같아서요.”
덩치에 비해서 목소리는 상당히 부드러웠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겨울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놓아 둔 핸드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10시 15분.
‘큰일 날 뻔했네.’
만약 눈앞의 남자가 말을 걸지 않았다면, 연수 첫날부터 엄청난 사고를 저지를 뻔했다.
겨울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눈앞의 남자에게 말을 붙였다.
“방해라니요. 오히려 알려 주셔서 감사하죠. 203호 배정받은 분이세요?
“아, 네네. 장대산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저는 한겨울이에요. 연수가 끝날 때까지 우리 같이 잘 지내 봐요.”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아,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고, 일단 강당으로 가 볼까요?”
강당에는 빈자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나마 비어 있는 자리는 앞쪽과 뒤쪽밖에 없었다.
“저… 겨울 씨, 제가 체구가 커서 따로 뒤쪽에 앉을게요.”
“네? 그럴 게 뭐 있나요. 같이 뒤로 가서 앉아요.”
겨울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짓자, 장대산도 따라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거의 맨 뒷줄에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10시 30분.
강당 뒷문이 닫혔다.
사회자석에 서 있던 사람이 마이크 전원을 키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입 사원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이번 신입 사원 연수의 총괄 책임자인 이종수 이사라고 합니다.”
이종수 이사는 무대 중앙으로 나와서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정중한 자세로 인사했다.
그러자 객석에서 박수가 일었다.
이종수 이사는 박수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이어 나갔다.
“본격적인 연수를 시작하기 전에 공지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께 5분의 시간을 드릴 테니, 소지하고 있는 핸드폰의 전원은 모두 꺼 주시고 화장실이 급하신 분들은 빨리 다녀오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모든 신입 사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겨울 역시 핸드폰 전원을 끈다고 바삐 움직였으나, 왼쪽에 앉은 장대산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장대산 씨는 핸드폰 끄셨어요?”
“아, 네. 혹시 몰라서 연수원에 들어올 때부터 꺼 두었어요.”
“그렇지 않을 거 같은데 의외로 철두철미하시네요.”
“그런 소리 자주 듣습니다. 아무래도 덩치가 크다 보니 그런가 봐요.”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순박하게 웃는 장대산의 모습에 겨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위협적인 덩치에 비해 유순한 사람이었다.
그때, 겨울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사람이 느닷없이 말을 붙여왔다.
“저, 실례지만, 혹시 영월고등학교를 졸업하시지 않았나요?”
너무도 뜬금없는 질문과 상황에 겨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그렇습니다만, 죄송하지만 저를 아십니까?”
“역시! 안녕하세요, 이재성이라고 합니다. 혹시 8년 전, 금배 전국 고등학교 축구 대회 결승전을 기억하십니까?”
너무도 구체적인 과거를 언급하자 겨울의 궁금증은 더욱 가속되었다.
“네… 꽤나 치열해서 상대 고등학교 이름도 기억합니다. 분명 장원고등학교였죠.”
“맞습니다! 제가 바로 그 학교 출신입니다. 그 당시에 학교 전체가 단체 응원을 갔는데, 한겨울 씨의 어마어마한 활약 때문에 모교가 처참하게 박살 났었죠.”
“하하… 이것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닙니다. 사과를 받고자 말을 꺼낸 건 아니었습니다. 아이디카드를 보고 반가워서 실례를 무릅쓰고 말을 걸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유럽 리그를 잘근잘근 씹어 드셔야 할 분이 왜 여기에 계십니까?”
이재성의 물음에 겨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대학교 2학년 당시에 큰 부상을 입어서 축구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이야기를 꺼냈군요.”
“다 지나간 과거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때, 앞서 말한 5분이 지났는지, 이종수 이사가 다시 한번 마이크 전원을 키고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2018년 대한 그룹 신입 사원 연수를 정식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정재엽 연수원장님을 모시겠습니다.”
VIP석에 앉아 있던 정재엽 원장이 무대 위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서 이종수 이사에게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그러고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방금 소개받은 정재엽이라고 합니다. 제가 대한 그룹에 입사한 것이 올해로 만 35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동안에 대한 그룹은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해서 대한민국의 경제를 지탱하는…….”
정재엽 원장이 장황하게 환영사를 늘어놓았지만,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대한 그룹이 원하는 인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신입 사원 연수를 받아라’였다.
그렇게 기나긴 정재엽 원장의 환영사가 끝나자, 이종수 이사가 연수 일정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연수는 오늘부터 5주에 걸쳐 진행될 예정입니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습득해야 하기 때문에 일정이 빠듯할 겁니다. 평일은 오전 9시부터 저녁 8시 30분까지, 토요일은 오후 3시까지 교육을 실시하는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때, 객석 중간에 앉아 있던 누군가 손을 번쩍 들고 발언권을 요청했다.
“질문 있습니다.”
“네, 얘기해 보세요.”
“주말에 외출은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의 수가 적은 편이 아니다 보니 그렇게 결정이 났습니다. 연수가 종료될 때까지는 일체의 외출이 불가능하지만, 원활한 통제를 위해 양해 바랍니다.”
“연수 기간에 설이 끼어 있는데, 그때는 어떻게 합니까?”
“설 연휴 기간 동안에는 교육을 중단할 예정입니다만, 그래도 외출은 불가능합니다. 또 다른 질문 있습니까?”
신입 사원들은 이때다 싶었는지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을 물었고, 이종수 이사는 귀찮은 내색 없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음주는 매점에서만 가능합니다. 만약 생활관에서의 음주가 발각되면 이유 불문하고 퇴소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이종수 이사의 엄포를 듣고 있던, 이재성이 겨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붙여왔다.
“저거, 다 허셉니다. 여태껏 여기서 수많은 사람이 생활관에서 술을 마시다 발각됐지만, 퇴소 당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네? 이재성 씨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저희 학교 졸업 선배 몇몇이 대한 그룹에 근무하고 계십니다. 다 그분들한테 얻은 정보죠.”
“아, 그렇군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서로 유용한 정보는 공유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도 선배들에게 전수받은 노하우를 알려 드릴게요.”
“저야 환영이죠.”
겨울과 이재성이 소곤거리는 도중에도 이종수 이사와 신입 사원들의 질의응답은 계속되었다.
“흡연은 반드시 지정된 장소에서만 가능합니다. 더 질문 없으십니까?”
저마다 궁금증을 해결했는지, 객석은 조용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이종수 이사는 다시 말을 이었다.
“송훈석 회장님의 특별 지시로 올해부터 적용되는 규칙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중요한 내용이니 귀담아들어 주십시오.”
진지한 그의 표정에 모든 신입 사원들이 입을 닫았다.
넓은 대강당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옆 사람이 꼴깍 침을 삼키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였다.
“회장님께서는 신입 사원 연수 커리큘럼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시고, 이에 특단의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이종수 이사는 신입 사원들에게 긴장감을 심어 주기 위해 일부러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객석에 앉아 있는 신입 사원들의 표정을 주욱 훑어본 후,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저희는 해당 조치에 맞는 커리큘럼을 다시 짰고, 지난주 금요일에 최종 결재를 득했습니다. 이제부터 그 특단의 조치가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연수 기간동안 여러분의 성적은 종합적으로 평가될 겁니다. 그리고 하위 열다섯 명은 대한 그룹에 입사할 수 없습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