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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선배, 친절한 미소 천사 이영우의 곁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선후배 할 것 없이 죄다 그를 따랐다. 그런 영우가 혼자 있는 모습은 보기 드물었기에 단둘이 대화를 나눌 기회는 거의 없었다.
살짝 어색해지기 전, 영우 쪽에서 먼저 웃는 얼굴로 손짓했다.
“안 그래도 출출하다고 간식 사러들 나갔어. 애들 오기 전에 자리 잡아.”
“오오, 감사함다.”
언제나 경쟁이 치열한 소파 자리에 재하가 냉큼 앉자 침묵이 이어졌다.
사람이 끊이지 않는 영우는 먼저 말을 거는 경우가 드물었다. 가만있어도 누구나 말을 걸어올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때라면 재하 역시 영우를 만난 반가움에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 가려 했을 테지만, 재윤의 망상이 불러온 경고가 괜스레 마음 쓰였다.
어차피 목적은 게임팩을 두고 가는 거니 적당히 인사하고 나가자 싶어 몸을 일으키는 재하에게 영우 쪽에서 말을 걸어왔다.
“괜찮니?”
“엇, 저요?”
“인상을 쓰고 있길래. 항상 웃고 다녔잖니.”
항상 많은 사람과 함께하면서도 자신에 대해 기억해 주는 영우의 관심이 기뻤다. 재윤의 경고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고 말할 수 없어 아침 식사 핑계를 댔다.
“아침부터 밥을 많이 먹었더니 속이 부대껴서 표정이 안 좋았나 봐요.”
“저런. 아직까지 속이 안 좋은가 보구나.”
항상 웃는 얼굴인 영우의 선한 얼굴에 걱정이 어리자 재하는 뜨끔했다.
“이제 괜찮아요. 좀 과식한 건데요, 뭐.”
“손 좀 볼까?”
“앗, 괜찮아요. 손 따거나 그런 건 좀 무서워서요.”
어정쩡하게 일어나 손사래를 치며 웃었지만 이미 영우가 소파 옆으로 다가왔다. 얼결에 영우에게 손이 잡혀 소파에 앉자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를 꾹 눌러 왔다.
“아프니?”
“아뇨?”
재하의 대답에 영우는 더욱 꼼꼼히 손바닥 여기저기를 누르며 집중했다. 영우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 일이 없었기에 재하는 새삼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색소가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릴 때마다 금속 안경테 위를 가볍게 스치는 것마저 무해해 보였다. 그린 듯한 ‘착한 선배’의 모습을 가진 영우는 행동도 그러했다. 자신의 손을 꾹꾹 누르며 재차 물어 오는 말에 그제야 지금 누르는 부위가 체한 걸 풀 때 눌러 주는 혈 자리임을 깨달았다.
“지금은?”
“아, 네. 아픈 거 같아요.”
“그러니? 조금만 더 누를게. 아파도 이렇게 해 두면 좀 나으니까 참을 수 있지?”
사르르 웃어 주는 영우의 웃음에 안 아파도 아프고 아파도 안 아프다고 해야 할 것 같아 재하는 어색하게 웃었다.
여러 번 재하의 손을 주무르던 영우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인내심이 굉장하구나? 꽤 세게 눌렀는데.”
“네?”
“아니면 내 악력이 너무 약해서 도움이 안 되는 걸까?”
시무룩해지는 영우의 표정에 재하가 서둘러 아픈 척을 했다.
“아, 아뇨. 아파요. 아야야, 아프다.”
“푸후, 연기가 어설프잖아.”
“아니에요. 정말 아파요. 아이고! 영우 선배가 사람 잡네!”
서둘러 호들갑을 떠는 재하의 행동에 영우의 웃음이 터졌다. 웃는 것도 어딘지 모르게 그림 같아서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 웃음에 신이 나 재하가 더욱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누군가의 분노를 불러오리란 건 생각지 못했다.
* * *
재하를 먼저 보낸 재윤은 건물을 살폈다. 지나치게 넓은 대학 건물의 배치에 숨긴 공간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하 공간이 따로 있지 않을까. 전력 사용량을 확인해 보고 싶지만, 재하를 혼자 보낸 게 신경 쓰였다.
재하가 이동한 방향으로 움직이려는데 커다란 게시판에 정갈하게 붙은 포스터가 수상했다.
꿈이나 환시, 환청 등과 관련된 동아리 홍보가 버젓이 상단에 자리 잡고 있지를 않나, 작은 고민이라도 상담실을 방문해 달라는 공익 광고 느낌의 포스터가 대문짝만하게 좋은 자리에 있었다.
일반인들과 달리 예비 각성자는 남들과 다른 다양한 증상을 겪는다. 힘이 지나치게 세지거나 환청을 듣거나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기 시작한다. 그걸 당연시하며 상담을 일상처럼 만들어 놓은 걸 보니 이능력자를 사전에 포섭하려는 의도가 보였다.
“이런 식이면 분명 그곳과 연결돼 있을 텐데.”
재윤의 눈이 빠르게 포스터 하단으로 향했다.
익숙한 기업명에 절로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역시. 개새끼들.”
재단 이름을 본 순간 터져 나오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뒤집힐 세상을 알면서도 누구보다도 저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가며 초창기 각성자들을 제멋대로 다뤘던 기업이었다.
“이래서 형 주변의 에스퍼 새끼들이 쉽게 엮였던 거였어.”
주도준과 이영우. 거기에 견지호까지.
고등급 에스퍼가 재하와 같은 대학 안에만 벌써 셋이나 존재했다.
이곳에 한시라도 형을 내버려 둘 수 없다는 판단하에 재윤은 빠르게 움직였다.
“형…….”
아직 활성화되지 않았을 마력이 재윤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자 자연스럽게 재하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각성 전임에도 수년을 몸에 새겨 온 감각이 미약한 기운을 필사적으로 쫓았다.
아직 마력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도 이 정도 감각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면서도 걱정이었다.
‘블랙 피그의 효능이 이렇게 빨리 나타나는 건가.’
블랙 피그는 이능력자는 물론 각성 전에도 마력 회복과 감각을 단련하는 데 소소하게나마 도움이 됐었다. 그렇다고 한들 고작 한두 번 먹은 걸로 이렇게나 큰 효과를 보기는 힘들었다. 어쩌면 이 학교에 각성을 촉진하기 위한 다른 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세련된 건물 외관과 내부에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장식물들이 거슬렸다.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재하의 존재에 재윤의 마음은 더 급해졌다. 한시라도 빨리 재하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엘리베이터보다 직접 올라가는 게 빨랐다. 아파트에서처럼 재윤은 외벽으로 통하는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작은 틈에 손을 꽂아 넣고 단숨에 벽을 타고 올라가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가자 그곳에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인물이 재하를 붙잡고 있었다.
“아야야, 이제 놔주세요.”
“아직. 조금 더 확인하게 해 주렴.”
재하는 고통스러운 듯 찡그리고 있었고, 영우는 웃고 있었다.
이제는 사라진 미래에 수없이 리플레이 됐던 장면을 현실에서 목격한 재윤은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웃는 얼굴로 가이드 서재하에게 고통을 주던 에스퍼 이영우. 고통에 못 이겨 빌 때면 이영우는 재윤을 언급하며 협박했었다. 그리고 끝끝내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재하를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이……영우.”
“응? 넌 누구니?”
“너, 어떻게 창문으로 들어오냐?”
창문으로 넘어온 재윤을 발견한 재하가 황당해하면서도 영우와 잡은 손을 슬그머니 잡아 뺐다.
그 모습을 본 재윤은 재하가 자신의 경고를 기억하면서도 영우와 손을 잡고 있었음을 알아챘다. 속이 터질 것 같은 상황에 여전히 선한 얼굴을 한 영우를 보니 인내심이 바닥을 쳤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들어 메다꽂고 싶었으나 영우와 자신의 사이에 선 재하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 간신히 참아 냈다.
“당장…… 떨어져.”
평범하게 말하는 것조차 힘들 만큼 흘러나오는 분노에 재윤은 온몸이 떨려 왔다.
재윤의 손가락이 붙잡은 창틀에 푹푹 꽂히는 걸 목격한 재하는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눈이 크게 뜨였다.
“너, 얀마. 손.”
“형, 이쪽으로 와.”
창틀을 부서트릴 만큼 강하게 붙잡으며 감정을 다잡으려 했지만, 목소리에서 흘러나온 살기는 감출 수 없었다. 재윤에게서 당장이라도 상대를 찢어 버리고 싶어 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재하는 오히려 영우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너, 사람을 왜 그렇게 봐? 진정해.”
“형?”
재윤이 한 걸음 안으로 들어오자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영우를 노려보는 눈빛이 더 선명해졌다.
“스톱. 일단 멈춰 봐. 무슨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너 그러다 일 치겠어.”
재윤을 말리며 재하는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영우를 등 뒤로 숨긴 채 손으로 그를 더듬어 챙기기까지 했다. 그런 재하의 모습에 재윤에게서 쏟아져 나오던 흉포한 감정이 흐트러졌다.
“형이 어떻게…….”
“야야. 일단 영우 선배는 내보내고 우리끼리 대화하자.”
“형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야말로 어떻게 대학까지 따라와 이럴 수가 있냐.
‘내 대학 생활을 조지러 왔냐고, 진짜.’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본심을 삼킨 재하는 필사적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심각한 그들과 달리 영우는 이 상황이 생소했다.
심각한 상황에서 영우가 떠올린 생각은 단순했다.
‘뭘까, 저건.’
대부분의 사람은 그에게 호의를 보였다. 피부가 따끔거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선명한 적의를 드러내는 이는 처음이었다.
악귀라도 쓰인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일그러진 얼굴을 한 사내가 창문에 올라서 영우를 노려봤다. 그 남자와 재하는 아는 사이인지 대화를 이어 갔다. 악귀 같은 남자는 여전히 영우를 노려보고 있었으나 재하가 남자와 그의 사이를 가로막아 섰다.
누군가 자신을 지킨다는 건 생소한 감각이었다. 모두가 영우에게서 무언가를 얻어 내려 했다. 정보든 애정이든 영우에게서 받아 내는 데에 급급했다.
아무것도 주지 않았는데 자신을 감싸고 지키려 하는 경우는 어릴 적 돌아가신 부모님 정도였다. 하물며 조부모조차 자신의 성적이나 주변의 평가에 따라 애정을 드러냈다.
그런데 지금, 악귀 같은 남자의 등장에 재하가 영우를 지키려 들었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후배가 손을 뒤로 움직여 영우의 위치를 확인하고 확실하게 그 앞을 막아섰다.
“일단 영우 선배 내보내고 우리끼리 대화하자.”
재하의 말 속에 영우를 보호하기 위함이 드러났다.
두근.
두근.
이영우의 심장이 갑자기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가슴에 봄바람이 불어닥친 영우와 달리 악귀 같던 남자의 얼굴에 사람 같은 표정이 깃들었다.
“형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재하를 향해 원망의 말을 내뱉는 목소리도 어딘지 모르게 앳된 티가 섞였다.
“하아, 서재윤. 인마, 너야말로 진정 좀 해.”
서재윤이라 불린 남자의 얼굴이 조금 전과 달리 서러움을 담은 일그러짐으로 바뀌었다.
“내가 어떻게 진정해? 형이 지금 그러고 있는데!”
“야야, 너 손. 손 다친다.”
재윤이 붙든 창틀이 사정없이 부서져 나가는 비현실적인 상황에서도 영우는 재하가 다른 이를 걱정하자 심장이 지끈거림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