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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 전까지만 해도 서재하는 이영우에게 얼굴 정도만 아는 후배였다. 조금도 특별한 것 없는 대상을 향해 갑작스럽게 생겨난 감정이 영우를 뒤흔들었다.
“형이 다친다고. 내가 그렇게나 말했잖아.”
“알았어. 알겠으니까 창문에서 내려와.”
“형은 내 말 안 믿는 거지? 그러니까 저 새끼랑 단둘이 있는 거잖아.”
“믿는다니까. 안 믿으면 널 데리고 학교까지 왔겠냐?”
재윤을 설득하느라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는 재하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미미한 움직임이었음에도 영우는 처음 접하는 명화를 바라보듯 집중하며 시선을 빼앗겼다.
단 몇 초 만에 감정이 바뀌는 감각이 신기했다.
똑같은 사람을 바라보는데 빛 가루가 뿌려진 것처럼 시선이 이끌렸다.
재하가 자꾸만 영우에게서 멀어지며 창문에 서 있는 재윤에게 다가갔다. 재하의 걱정이 다른 이에게 넘어가는 게 영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우는 충동적으로 쌓여 있는 게임 케이스 중 안이 비어 있는 케이스 하나에 손을 올려 힘을 주었다.
파각.
긴장 속에 플라스틱 깨지는 소리는 이목을 집중시켰다. 뒤를 돌아본 재하는 부서진 케이스 조각과 찌푸린 얼굴로 손을 쥔 영우를 번갈아 봤다.
“어? 영우 선배, 다쳤어요?”
“응. 창문으로 사람이 들어오니까 놀라서 물러서다가.”
일부러 재윤의 핑계를 대자 재하가 빠르게 영우에게로 돌아왔다.
“으아, 죄송해요. 놀라지 마세요, 선배.”
안절부절못하며 꼭 쥐고 있는 영우의 손을 살피려 재하가 손을 뻗어 왔다. 영우는 순순히 손을 내주는 대신 여전히 창문에 서 있는 재윤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서러운 눈을 한 재윤이 영우와 눈을 마주치자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으나 그뿐이었다.
“선배, 손 좀 보여 주세요. 다치셨을까 봐 그래요.”
영우가 손을 펴 주지 않자 재하는 조심스럽게 설득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재윤이 훅 하니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영우는 재하가 원하는 대로 손을 펴 주었다.
“윽, 선배 손에 상처 났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구급상자를 챙기러 뒤돌아서던 재하는 휑하니 비어 버린 창문에 당황했다. 다급히 창문으로 달려가 바깥을 살폈으나 어디에도 재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어디 갔어?”
창문을 타고 올라올 정도로 운동 신경이 좋아진 재윤이라 떨어지진 않았겠다 싶으면서도 화를 내다 사라졌기에 신경이 쓰였다.
다시 한번 부서진 창틀 바깥을 신중히 확인하는데 등 뒤에서 영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야…… 상처에 조각이 들어갔나 봐.”
“앗, 선배. 제가 봐 드릴게요.”
“응, 그래 주겠니?”
재하가 다가오자 언제 아파했냐는 듯 평소처럼 상냥한 웃음을 짓는 영우였다.
“상처가 깊어 보이는데 의무실 가셔야 할 거 같아요.”
“그래?”
“어설프게 치료하는 거보다 제대로 하는 게 낫죠. 그럼 전 창틀 부서진 거 보고할게요.”
신축 건물에 튼튼해 보이는데도 문이 부서지거나 기물 파손 등의 일이 잦은 학교였다. 혈기 왕성한 학생들 탓이겠지만, 대학이 돈이 많아서 그런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고만 하면 깨끗하게 수리해 주었다.
재하의 동생이 부쉈지만, 이번에도 보고만 하면 깔끔하게 처리될 일이었다. 다만, 원인 제공자이자 목격자인 재하가 직접 설명해야 했기에 자리를 지키려 했던 건데 영우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선배? 왜 안 가시고…….”
“같이 가자, 재하야.”
“네?”
다치지 않은 손을 내미는 영우의 행동에 재하는 혼란스러웠다. 다리를 다친 것도 아니고 손을 다친 건데 굳이 같이 의무실을 가자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 다른 애들 오기 전에 창틀 부서진 거 보고해야 해서요.”
“하지만 아까 그 무섭게 생긴 남자가 또 나타날까 봐 무서운걸.”
영우에게서 약한 소리가 나오자 재하는 크게 당황했다. 게다가 그 원인이 재윤이었기에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 애가 동생이라 설명하며 설득하기에는 재윤이 보인 적의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부서진 창틀과 테이블 위의 부서진 게임 케이스를 번갈아 본 재하는 빠르게 결정했다.
“같이 가요, 선배.”
“그래. 고마워, 재하야.”
재하가 영우를 지나쳐 앞서려 하자 그가 부드럽게 손을 붙잡아 와 재하는 당황했다.
“불안해서. 손잡아도 되겠니?”
손을 빼내려던 재하는 영우가 손을 다친 원인이 재윤임을 떠올렸다.
“아, 네. 불안하신데 손 정도야 얼마든지 내드려야죠.”
“응, 재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좋은 거 같아.”
사람 좋은 영우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면 소름 끼칠 표현에 재하는 내민 손을 거두고 싶어졌다. 하나 이미 잡혀 버린 손을 풀 수 없어 어정쩡하게 펼친 채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제 손은 그냥 평범한데요.”
“다른 사람들이랑 손 안 잡아서 평범한 줄 몰랐어.”
“그, 그렇군요.”
재윤이 삐져서 사라진 게 신경 쓰이면서도 영우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재하는 정신이 없었다. 갑자기 친근하게 구는 영우의 행동이 어색해 재하는 걸음을 빨리했다.
다행히 의무실엔 담당 선생님이 계셨고, 재하는 무사히 영우를 두고 나올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던 영우의 선한 모습을 본 재하는 죄책감에 연신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왔다. 그런 모습을 보니 더더욱 재윤의 경계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아, 또 집에 가면 엄청나게 달라붙겠네.”
재윤을 밀어내면 죽어라 달라붙던 게 떠올라 벌써 더워지는 것 같아 한숨이 푹푹 나왔다.
* * *
동생이 가출했다.
외출이 아닌 가출임을 확신하는 건 카톡으로 ‘언제 옴?’이냐 질문하니 ‘가출’이라는 답이 왔기 때문이었다.
“이놈 시키. 말로만 지켜 주네, 곁에 있겠네 했지. 또 외박이냐.”
고작 이틀 만에 예전으로 돌아가 버린 재윤의 행동에 재하는 짜증이 났다.
어디서 돼지를 훔쳐 오질 않나, 그 튼튼한 창틀을 우그러뜨려 놓질 않나, 벽을 타고 층을 오가질 않나 온갖 기행을 저지르고 있지만, 결국 서재윤은 망할 동생 새끼였다.
“하여간 원수라니까. 신경 꺼야지.”
있는 듯 없는 듯 원래의 형제처럼 지내면 될 일이었다. 부디 이번에 돌아와서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쓸데없이 경계심을 드러내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가출할 거면 고기나 좀 들고 가든가. 냉장고 터지겠네.”
신경 끈다 하면서도 재하는 연신 투덜거리며 재윤에 관한 생각을 털어 내지 못했다.
평소처럼 게임을 켜고 앉아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다들 정모 이야기로 떠들썩한데도 끼어들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변해 버린 동생의 부재를 가볍게 넘기기엔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게 많았다.
해일: 혹시 정모 참석은 불편합니까?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모 장소부터 메뉴까지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던 재하였다. 그런 재하가 정모 이야기에도 시큰둥하자 길마가 따로 채팅을 걸어왔다.
“으악, 길마까지 신경 쓰게 만들었네.”
개인 사정 때문에 분위기를 흐리기 싫어 재하는 텐션을 끌어 올렸다. 마이크를 켜고 음성 채팅에 들어가니 서로의 주량을 자랑하며 술을 얼마나 사야 하는지 열띤 토론 중이었다. 물론 이 토론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길마의 골든벨 소식에 환호로 뒤덮였다.
게임 중에도 길마의 재력은 쉽게 드러나곤 했다. 포션 시세가 널뛸 때도 힐러를 추가 영입하기보다 부족한 힐을 사냥 중 무제한 포션 지급으로 해결했다. 그 덕에 힐러인 재하의 부담이 줄었다.
재력가 길마 덕에 길드는 항상 풍족하고 여유로웠다. 게다가 성인들만 모인 길드라 그런지 길마의 아낌없이 퍼붓는 재력을 받기만 하지 않고 나름 보답하려 했다. 그 덕에 길드원끼리 사이도 좋은 편이라 정모도 기대되던 차였다.
― 숙소도 내주시는데 먹을 건 저희가 살게요.
― 아버지가 굴 양식 하시는데 석화 좀 가져갈까요?
― 오, 울 삼촌이 장어집인데 몇 마리 받아 갈게요.
― 앗, 전 알바하는 데서 빵 좀 챙겨 갈게요.
“크, 훈훈한 분위기는 못 참지.”
재하도 분위기에 편승해 냉장고를 꽉 채운 고기를 해치울 기회를 잡았다.
“우리 집에 돼지 반 마리 넘게 있슴다! 양손 무겁게 가져갈게요.”
― 에이, 오바하기는. 누가 집에 돼지를 반 마리 두냐?
― 석화랑 장어는 사 온다 쳐도, 돼지 반 마리는 선 넘었지.
― 우리 집 굴 양식 한다고!
의심받은 건 재하였는데 급발진하는 굴 집 아들의 외침 후 인증 사진이 날아들었다. 뭐 이게 억울한 일이라고 저리 다급하게 사진을 날리냐 싶으면서도 먹음직스러운 석화 사진을 본 재하 역시 냉장고 가득한 고기를 핸드폰에 담았다.
“자, 다들 이 넘치는 고기 좀 보라고.”
― 헐. 냉장고가 새까만데?
― 힐러 님도 금수저였군요…….
― 와, 흑돼지 처음 보는데 뼈까지 까마네요.
― 뭔? 흑돼지가 오골계도 아니고…… 어? 진짜네?
― 에이, 합성이겠죠. 누가 집 냉장고에 고기를 저렇게 넣어 놔요.
다들 의아해하는 반응에 재하는 아차 싶었다. 아직 시중에 나오지 않은 품종을 내보였다가 출처를 묻는다면 곤란해지는 건 재윤이었다. 너무 가볍게 행동했나 뒤늦게 후회하며 변명하려던 재하는 길마의 묵직한 목소리에 안도했다.
― 다들 빈손으로 오십시오.
― 크윽, 길마 형님! 그저 빛!
― 우리 길드에 뼈를 묻겠습니다!
통 큰 길마의 선언에 재하의 실수가 자연스레 묻혔다. 올린 사진을 지우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길마에게서 개인 채팅이 날아들었다.
해일: 귀한 걸 구하셨더군요. 저도 구매하고 싶은데 판매처를 소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엥? 갑자기?”
뜬금없는 길마의 제안에 재하는 어리둥절하면서도 한편으론 안심이 됐다. 재윤이 마수 굴에서 잡아 왔네 어쩌네 했지만, 역시 판매처가 따로 있었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다.
여전히 음성 채팅은 시끌시끌했지만, 재하는 길마에게 개인 채팅으로 답했다.
나: 제가 산 게 아니라서 물어보고 알려드릴게요.
해일: 아, 제가 캐묻는 것 같군요. 구하기 힘드셨을 텐데 곤란하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나: 아뇨, 곤란한 건 아니고요.
평소 길마의 진중함과 그에게 받은 수많은 혜택이 머릿속을 스쳐 간 재하는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싶어 답했다.
나: 동생이 구해온 건데 그놈이 가출 중이라서요. 돌아오면 물어볼게요. 그런데 답을 안 해줄 수도 있어요. 애가 다 늙어서 중2병에 걸렸는지 자꾸 컨셉질을 해서요.
해일: 맛은 어땠습니까? 입맛에 맞았습니까?
“엥? 오늘따라 길마 형, 좀 뜬금없네.”
출처를 캐묻기보다 맛을 물어 오는 길마가 의아하면서도 아는 맛을 공유하는 재미를 알기에 성심껏 답했다.
나: 진짜 맛있어요. 고기가 막 살살 녹는데 이렇게 부드럽고 고소한 돼지는 처음이에요.
해일: 그렇군요.
잠시 대화가 끊기나 싶더니 길마가 음성 채팅에서 입을 열었다.
― 정모 참석 시 선물로 S급 방어구 랜덤 상자를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러운 길마의 선언에 음성 채팅이 난리가 났다. 던전을 수십 번 돌아야 한두 개 떨어질까 말까 한 S급 랜덤 상자를 정모 선물로 뿌리다니.
― 죽어도 가겠습니다!
― 기차가 연착되면 뛰어서라도 갈게요!
“넵, 제주도라도 헤엄쳐서 가겠슴다!”
S급 방어구라니, 힐러에겐 너무도 유혹적인 참가 선물이었다.
“역시 통이 크시다니까.”
길마의 선언에 신이 난 재하는 입과 손이 동시에 채팅을 치며 잠시나마 찜찜했던 기분을 날릴 수 있었다.
* * *
재하가 길마의 통 큰 선언에 온라인 게임 속에서 몬스터를 잡던 시각.
재윤은 직접 마수를 잡기 위해 새로운 던전 앞에 도착했다.
‘형은 너무 무방비해.’
대격변의 날이 오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재윤은 초조해졌다.
주도준에 이어 이영우까지 친근하게 대하는 재하의 유약함은 언제든 쉽게 짓밟힐 수 있었다.
에스퍼에게 가이드란 존재가 어디까지 짓밟힐 수 있는지 재윤은 직접 보았다. 특히나 제 형제가 겪은 일은 차마 입에 담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했다.
자신이 되돌아온 이상 앞으로 벌어지지 않을 일이기에 굳이 형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재하를 겁먹게 할 생각은 없었기에 필요한 정보만 알리고 최소한의 요구만 했음에도 따라 주지 않았다.
“형에게 내 말을 믿을 증거를 보여 줘야겠어.”
증거는 자신의 각성 이후에 보일 생각이었지만, 경계심이라곤 전혀 없는 재하를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F등급 마수들은 지구의 동물들과 비슷한 외형이라 증거가 되기 힘들었다. 각성 전이라 조금 버겁더라도 한 단계 위 등급의 마수를 잡아다 재하에게 보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지난번 F등급 던전 때와 달리 집에서 꽤 먼 곳에 있는 버려진 공장. 그곳에 생성된 D등급 던전에 도달한 재윤은 망설이지 않았다.
버겁다는 건 어디까지나 각성 후에 비해 버겁다는 것뿐, 각성 전임에도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는 힘과 경험을 가진 재윤이었다. 하루 만에 잡는 건 힘들어도 다칠 걱정은 없었다.
“일주일 안에 잡아 보이겠어.”
손에는 쇠 파이프 하나를 든 재윤이 벽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던전 입구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