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임포스터 유인하기 (2)
2월 4일.
해안가와 저지대에선 이미 겨울이 한풀 꺾이기 시작할 시간. 그러나 하야스단 고원, 특히 찬바람이 훨씬 강해진 이즈음의 고원지대는 살을 에는 바람이 더 심해질 뿐이었다.
―휘잉!
다르빌을 떠나 바가반드로 돌아가던 네마냐가 가지고 있던 통신석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찬 바람이 강렬하게 부는 골짜기라도 벗어나고 확인하려는 네마냐는 억지로 울림을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골짜기 끝만 나가는 대로 연락을 받아야겠다, 서두르자!”
“속도를 내라!”
헤누크의 지시 아래 5명의 호위기사는 누구보다 빠르게 계곡 출구로 질주하는 네마냐를 따라갔다.
“와, 진짜 겨울 살벌하네. 1월도 충분히 얼어 죽을 뻔했는데 진짜 이러다 몇 년 뒤면 여름에도 추워지는 거 아니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작년에도 이미 늦가을에 기를 작물이 다 말라 죽었는데 올해는 더 힘들어지겠군요. 이래서야, 원.”
기사들도 각자 먹고살 수 있는 봉급은 자신이 받은 조그만 농장을 통해 얻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 부지런한 기사는 직접 자기 소유의 밭도 경작하고 자기 봉토민의 농사를 돕기도 했다. 그러면 그냥 봉민들에게 맡겼을 때보단 많은 수입을 거둘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러니 기사들도 농사에 관심이 많았다.
“에휴, 저희는 올해 전쟁 때문에 농사도 제대로 돕지 못했습니다. 내년 날씨라도 좀 좋아야 생계유지가 될 텐데.”
“하긴 토지의 수입이 일정하기 때문에 봉토롤 내주는 건데 농사마저 불안정하면 쓸모가 없어지지. 그것도 참 골치 아픈 일이야.”
네마냐는 씁쓸한 얼굴의 기사들을 위로하며 품속에서 통신구를 꺼냈다. 아직도 끈질긴 상대방은 용케 끊지 않고 채널 개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엘레나 전하시군. 무슨 일로 벌써 연락을 주셨습니까아.”
“드디어 받았네. 대체 뭘 하고 있었는데 연락을 못 받은 거야?”
가뜩이나 기다리던 중에 능청스러운 말까지 들어서 엘레나의 말투가 제법 샐쭉했다. 네마냐는 바로 손사래를 치며 사정을 해명했다.
“하하……. 영지로 돌아가는 길에 아주 험난한 계곡이 있었거든. 삭풍이 하도 몰아쳐서 그대로 얼어 죽는 줄 알았다니까.”
“아…… 바가반드로 가는 길에 계곡이 많았지. 그럴 만도 하겠어.”
자신도 애써 외투를 덮고 성국 곳곳을 순찰 중이라는 엘레나의 말에 네마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추위는 조심하고, 항상 따뜻한 차를 마셔 두라고. 그런데 어쩌다 연락을 한 거야? 벌써 고블린이 움직일 리는 없을 텐데.”
“별다른 일이 그새 생겼더라고. 워낙 급하니 숙부께서 보낸 전령이 도중에 나한테 닿았지.”
“급한 일?”
현재 바난드에 특별한 일이 생길 만한 건 거의 없었다. 혹독한 겨울이라 식량과 연료가 부족하다지만 일부분은 이미 바가반드에서 제공하고 있었다.
‘유일한 말썽거리라면 단 하나뿐이지.’
엘레나가 침묵을 깨고 알려온 이야기는 마침 네마냐의 의식이 닿은 그 부분이었다.
“펜자르크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어.”
“임포스터가 움직였군.”
“응?”
“아, 펜자르크에 대한 내 암호야. 일종의 숨어 있던 적이란 이야기지. 보안이 제일이잖아.”
대충 적당히 둘러댄 네마냐의 이야기에 제법 어감이 찰지다며 엘레나도 임포스터를 쓰기 시작했다.
‘묘한 일이군. 인터넷은커녕 트랜지스터도 없는 이 동네에 임포스터란 단어가 수출되다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바로 그 임포스터, 펜자르크가 휘하 병력을 몰아 엘레나, 네마냐가 준비한 치즈를 향해 달려든다는 것이다. 그 치즈란 바로 파르티즈였다.
“물까 안 물까 염려했는데, 정말 움직였군.”
“그래. 그 임, 임포…….”
“임포스터.”
“그래, 임포스터가 제풀에 지쳐 유인작전에 말려든 거지. 파르티즈의 바크탕 남작은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놨다는 연락도 보내 놨어. 최소한 석 달 정도는 무리 없이 버틸 수 있을 거야.”
“적의 적마석을 이용한 공격은? 그것도 염두에 둔 건가?”
“유감이지만, 아니.”
그럴 줄은 알았지만 아쉬운 부분이었다. 엘레나는 자신도 몹시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한탄을 덧붙였다. 파르티즈는 바난드 분할협정이 맺어지자마자 펜자르크의 투항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덕분에 그 직후부터 외부와 봉쇄된 처지였다.
“덕분에 마정석을 이용한 방어 시스템 개선 작업을 진행할 수가 없었지. 다른 길을 이용하려면 먼 남쪽 저지대 국가를 돌아서 가야 해.”
“물론 그건 선택할 수 없지. 무슨 요구를 할지도 모르고 애초에 협상조차 하지 않으려 들 테니까.”
말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요인도 물론 있었다. 마정석을 활용한 방어 시스템은 현재 바가반드의 것이 하야스단, 아니 제국 전체를 능가하는 기술력으로 가능했다. 섣불리 그 재료와 설치 기술자를 우회시키다가 납치당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다행인 건 그런 장치가 없더라도 파르티즈 성채로 가는 길이 아주 험한 산골짜기, 숱하게 많은 요새로 둘러싸여 있단 거지.”
“그래서 3개월을 제시한 거군. 일반적인 적군이라면 거의 함락될 일 자체가 없으니.”
“그렇지. 만약 파르티즈가 아니라 다른 곳이었다면 지금 나도 여기에 있진 않았을 거야.”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인 네마냐는 이내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바로 엘레나가 성국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아쇼트 일행의 동정은 어때? 아마 지금쯤이면 펜자르크가 연락을 보냈을 텐데.”
“전령이 딱 하나가 오더라고. 즉시 잡아다가 제눌트한테 적당히 처리하라고 넘겨줬지.”
“딱 하나라……. 펜자르크도 아쇼트에겐 별 기대는 하지 않는 걸까. 그래도 여기에 자기네 병력의 3할 가까이가 묶여 있는데.”
엘레나는 조심스럽게 아쇼트와 일부 병력을 여기에 던져 놓는 게 자신들에 대한 견제책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견제라. 우리의 6할은 원정군이고, 저들의 3할 또한 원정군이니. 놈들이 3할로 우리 군 60%를 묶어 두는 게 이득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충분히 이익이 되는 거지. 2배의 병력을 꼼짝도 못 하고 고블린 전선에만 묶어 두겠다는 거고.”
“얕은꾀를 부리기는, 쯧.”
펜자르크가 상대적으로 많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병력을 아쇼트라는 중요한 장기 말에 실어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중요한 카드인 척하면서 자신들의 이동을 막아 보겠다는 거지.
“하지만 그자가 아주 중요한 걸 망각했다는 게 엄청난 패인으로 돌아가겠지.”
“제눌트.”
네마냐의 말에 엘레나의 짧은 답이 돌아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피식, 미소를 나누었다. 추위에 떨고 있던 기사들은 갑자기 영주가 짓는 차가운 미소에 더 추위를 느끼는 듯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엘레나, 네 뜻은? 괜찮으면 지금 당장 제눌트를 움직여서 돌아가도 되겠지만…….”
“아니. 그래선 안 돼.”
“음, 역시 제눌트의 부대를 단번에 장악하기는 어려우려나. 아무래도 부대마다 영지에 대한 충성 정도가 다를 테니까.”
네마냐의 고민에 엘레나는 훨씬 중요한 걸림돌이 있다며 선을 그었다.
“그것도 문제겠지만 내가 염려하는 건 고블린 문제를 우리가 내팽개치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는 거지.”
“아, 고블린과의 싸움에서 선봉에 서는 이미지를 굳혀 놨는데 지금 다시 그걸 망칠 우려가 있다, 이거지?”
역시나 엘레나다. 고블린과의 전쟁으로 훨씬 가망이 없었던 전생 당시, 그 불리함을 어떻게든 바득바득 캐리했던 명장다운 조심성이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렇게까지 불안해하며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뭘 조심하고 싶은지는 알겠어. 하지만 그렇게까지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거야.”
“조심할 필요가 없다고? 고블린 문제를 석 달 안에 처리하고 반란군까지 평정할 수 있다는 거야? 아니면…….”
“당연히 전자지.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고블린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거나 해결할 가닥을 잡을 때까진 머물러야겠지. 그러니까 더 철저한 준비를 위해서 내가 영지로 돌아가는 거기도 하고.”
“하지만 어떻게? 놈들의 본거지가 채 어디인지도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황…….”
“내가 알아.”
“뭐?”
“내가 안다고.”
[고블린 본거지의 토벌]
[고블린은 지난번의 대타격을 받은 이후 본거지 부근으로 후퇴하여 다음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본거지를 지난 생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당신에게 이것은 좋은 기회일 수도, 아니면 함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몫.]
[??? 의문의 보상이 개방될 것입니다.]
[??? 알 수 없는 위협이 기다립니다.]
미션 임무에서조차 거론되지 않는 고블린의 수도. 그러나 네마냐는 기억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고블린의 성채]
아주 용감한 척후병과 용사만이 어둡고 음침한 계곡과 사람을 혼란에 빠트리는 숲을 지나 다다를 수 있는 곳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그때 알려 주도록 할게. 그리고 그곳으로 갈 결심을 내린다면, 그때부터 우린 고블린과 확실한 결판을 지을 수 있겠지. 우리가 이기든 지든.”
아직 모든 것을 공개하기엔 네마냐 자신의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조금 더 파헤쳐야 할 고블린의 비밀도 있었다. 아군과 적군에 대해 모두 알 수 있어야만 완벽한 승리를 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먼 옛날 서준이 살던 세상의 어떤 병법학자가 일러준 그대로였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로움에 처하지 않는다.]
네마냐는 이 순간, 이기기 위해 그동안 살아왔던 두 번의 과거마저 모두 끌어다 쓰고 있었다.
* * *
“영주님이 돌아오셨다!”
“이제는 바가반드가 세계의 중심이다!”
타티온의 관문을 넘어서면서부터 길가에는 온통 귀향 중인 네마냐를 환영하는 인파가 가득했다. 덕분에 아무리 한적한 길가에도 꽃잎으로 바닥이 덮일 지경이었다.
“나자리안 경에게 천수를!”
“마나의 가르침과 축복이 우리 영지에 흐른다!”
그동안 네마냐가 꾸준히 들어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외웠던 문구가 다시 똑같은 레퍼토리로 반복됐다. 간간이 새로운 문구가 추가된 것은 덤이었다.
“한 두어 달 떠났나?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진 거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는 여전히 영지 인구가 8만을 넘지 않았는데.”
“하하, 심지어 영주께서 처음 저희 타티온 광장에 도착하셨을 때는 관청에서 파악한 인구가 5만 남짓이지 않았습니까.”
타티온의 장로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이지만 처음 네마냐가 바가반드에 발을 들였을 때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인구가 부쩍 늘어난 것 같다는 영주의 말에 자랑거리가 생각났는지 장로의 말은 신난 분위기를 따라 이어졌다.
“지금은 이곳 타티온의 인구만 해도 근 1만에 달합니다. 영지 전체로 흩어져 정착하거나 공장에 취직한 이들의 가족까지 합치면 이미 10만을 넘어섰다고 하더군요.”
“10만…….”
그야말로 바가반드로서는 꿈의 숫자였다. 기록으로 보면 하야크 내전과 고블린 침공, 한랭기후가 닥치기 직전 인구가 약 7만여 명이라고 했다. 지금은 그보다도 무려 3만 명이나 더 늘어난 것이다.
“그래, 숫자를 구체적으로 듣고 나니, 이제야 어째서 가는 길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지 알겠어. 더군다나 우리 영지는 이제 농경으로 먹고사는 곳이 아니라 상공업이 중심이 되고 있으니 상인들까지 고려하면 그럴 만하겠어.”
바로 그런 변화를 꾀한 것이 네마냐 자신이었다.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고, 전쟁이 이어지니 바로 그 전쟁에 맞추어 광업, 공업, 상업을 발달시킨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 험난한 시기에 마땅한 인프라나 재력이 없는 영지가 버텨낼 희망이 없었다.
‘아쉽긴 하군. 그토록 좋아했던 고즈넉한 바가반드의 풍경을 다시는 볼 일 없으려나.’
곳곳에 세워지는 광산으로 곳곳의 땅에는 구멍이 났다. 곳곳에 세워진 광산과 제련장 덕분에 삼림은 빠르게 줄어들고 하늘로는 검은 연기가 연이어 솟았다. 공터가 된 옛 숲에는 사람이 모여 시장, 도시, 각종 건물이 세워졌다.
“하하, 영주께서도 맘에 드시겠지요. 저 연기만 보면 사람들이 저절로 배가 부르다고 합니다. 저 역시도 저 발전의 상징인 검은 구름을 보면 아름다웠지만 가난했던 옛날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정말로 그러시오?”
네마냐는 진득한 시선을 주며 노인장에게 진심 어린 질문을 건넸다. 노인은 다시 한번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이제 다시는 고생했던 그 시절은 오지 않을 겁니다. 영주께서 내놓으신 비전을 따라!”
“하하, 맘에 든다니 잘 되었군요.”
네마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직 남아 있는 마지막 숲과 덤불의 구역을 바라보았다. 아직 전쟁도 끝나지 않은 참에 괜한 감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던 바가반드는 이제 저물어가는 중이다. 죽어라 고생만 시키긴 했으나, 그래도 삼십 년 미운 정 역시 괜히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추억이었다.
“사라져가는 옛 바가반드를 떠올리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겠죠. 장로나 저나 모두 원래 알고 있던 것이 뒤집히는 경험일 겁니다.”
그 반가운 변화를 기다리며, 장로만큼이나 감개무량한 낯으로 네마냐는 바가반드 본성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 말을 몰았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직업과 입장과 상관없이 모두 이 위대한 귀환의 행렬에 환호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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