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멈추시오, 정지!”
“뭐야 또?”
네마냐는 신경질을 팍팍 부리며 고삐를 놓았다. 전속 신호관으로 발탁이 된 알리테스가 재빨리 정지 신호를 각 부대로 전했다.
“영주께서 정지하라신다!”
“모두 정지!”
“아니, 가는 곳마다 이렇게 붙잡으면 언제 도착하냐고, 진짜 도움 안 되네.”
바가반드에서 기사 30명과 보병 1천 명을 대동하고 출발한 지 이제 이틀째다. 하지만 보통 때라면 하루 만에 왔을 길을 겨우 지나온 상태였다.
“그놈의 암피에르 조약을 내 언젠가 반드시 찢어발기고 만다, 속 터져!”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발목을 잡긴 합니다.”
알리테스는 신경질 잔뜩 난 영주의 모습은 처음이라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선배 기사들이 툭툭 치며 슬쩍 물러서도록 하지 않았다면 얼렁뚱땅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기세였다.
“영주님, 제국군의 전령이 왔습니다. 검문을 진행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제하고 오늘 아침 내내 검문을 했는데 또 받으라고?”
안 그래도 짜증이 극에 달한 네마냐가 말머리를 몰아 대열에서 빠져나왔다.
“제국군 책임자를 만나러 가야겠다. 앞장서.”
“부관을 보내시죠, 굳이 영주님이…….”
“부관 보내선 평생 들은 척도 안 할걸. 내가 직접 가야지.”
“나도 같이 갈게.”
하라드까지 함께 나서 세 사람이 제국군의 진영으로 말을 몰았다.
“아니, 무슨 일이십니까?”
제국군 주둔지를 지키던 병사들도 딱 봐도 신분이 보통은 아닌 듯한 사람들이 들이닥치자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네마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반쯤 화를 내듯 반응했다.
“여기 사장…… 아니, 총책임자 불러와.”
“누구라고 전해드립니까?”
“지금 너희가 붙잡아 두고 있는 사람인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바가반드 백작이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주둔부대 총책임자로 보이는 중급 장교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어깨의 견장에 붉은 술이 세 가닥인 걸 보고 중급 장교인 걸 알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바, 바가반드 영주님.”
“안녕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지, 제국군에서.”
“제가 뭘 도와드려야 할까요.”
말은 새삼 공손했지만 이름 모를 제국군 장교는 헤실거리며 모른 척 잡아떼기 바빴다.
“지금 저 꼴을 보고도 뭘 도와드려야 하냐고 실실 웃음이 나오지?”
“살살해.”
하라드의 말을 슬쩍 흘리면서 네마냐는 말채찍을 꺼내 들었다. 말을 때리고 싶지 않아 어지간하면 쓰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번에는 사람에게 써 보고 싶어졌다.
“감히 타국 영주에게 입을 놀린 대가가 뭔지는 제대로 알려 주지.”
―철썩!
“윽.”
중학교 때 수행평가 배드민턴을 연습한 뒤로 몇십 년 만에 놀려보는 손목 스냅인지. 상대 장교는 나름 위엄있게 신음을 내지만, 왼뺨에 떨어진 채찍에 눈빛이 흔들렸다.
“이게 무슨…….”
―짝!
“크읏.”
반동을 이용해 곧바로 오른뺨을 내려쳤다. 얼굴을 감싼 장교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뒤로 물러섰다. 주변의 병사들이 살기를 품은 눈빛으로 무기를 들었다.
“건방진 녀석들. 내가 지금 나의 주인인 왕국으로 달려가야 한다는데, 네까짓 게 길을 막는 게 말이 되나?”
갑질이다. 하도 상부 갑질, 거래처 갑질 같은 걸 겪어 봤기 때문에 지금도 생각만 하면 진저리 나는 짓이지.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그 갑질의 스킬만큼은 필요했다. 내전이 조금이라도 더 확대되지 않으려면 하루라도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나의 움직임을 일부러 막는다면 그건 제국군이라고 해도 적군으로 취급해야 옳다.
“너희들의 무례함은 이미 심각하다. 나는 본국인 왕국의 일을 수습하기 위해 이미 엘레나 전하의 재가를 받아 움직이고 있다.”
말고삐를 허리춤에 다시 차며, 네마냐는 차가운 눈빛을 되찾았다.
“만일 이후에도 내 앞길을 다시 가로막는다면, 그때는 동맹인 제국군이라고 해도 내정간섭으로 간주하겠다.”
“제국과 전쟁이라도 할 생각이오?”
“암피에르 조약도 벗어던지고 10년 전의 재앙을 되풀이하고 싶은 건가?”
10년 전 제국군의 하야스단 침공은 하야스단은 물론 제국군에게도 재앙적이었다. 도시와 요새는 물론이고 곳곳의 요새화된 탑과 신전, 성소에 이르기까지 하나씩 공략해야 했던 악몽.
“정말 제국군이 마지막으로 바난드마저 점령해야겠다면, 제대로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이따위 수작과 병력으론 요새화 거점 300개 앞에서 막힐 테니까.”
“…….”
이번엔 훨씬 효과적으로 먹혀들었다. 물론 당당한 영지가 있는 영주와 일개 부하에 불과한 중급 장교는 지위부터가 달랐지만. 하나같이 공략하기 어려울 거점 삼백 개가 꽤나 무섭긴 한 모양이다.
“너무 몰아붙이진 마. 어차피 제국군 수뇌부에서 그런 지시를 내렸겠지.”
여기서 말리는 시누이 역할은 자연스럽게 하라드가 잘 수행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화살을 더 높은 곳으로 옮겨가는 방식인 거지. 역시 마법 대학 수석 출신다운 두뇌 회전이다. 네마냐는 웃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손가락으로 아직 뺨을 지키고 있는 장교를 가리켰다.
“수뇌부한테 전해. 할 말이나 하고 싶은 공작이 있다면 나한테 직접 하라고. 엄한 데 자꾸 잔머리 쓰다가는 큰코다칠 테니까.”
“그런……!”
“자, 가자. 이제 길은 더 막지 않겠지. 죽을 자신이 없다면. 다음엔 검부터 뽑을 거니까.”
네마냐는 대답을 꺼낼 새도 없이 곧바로 출발했다. 하라드는 제국군을 잠시 물끄러미 지켜보더니 마찬가지로 떠나갔다.
“당장…… 해.”
멀어져가는 불청객을 멍하니 지켜보던 장교가 아직도 얼얼한 볼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예? 무슨 말씀 하셨습니까?”
“당장 아나무이라 사령부로 보고하라고. 바가반드 영주의 말을 한 글자도 빼놓지 말고!”
주둔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나무이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폭탄 발언에 발칵 뒤집힌 건 누구나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 * *
제국군의 방해를 걷어내고, 바가반드군은 행군을 계속했다. 채찍으로 뺨 두 대를 후려쳤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생각보다 미친놈이라는 감상평 덕분에 길목을 막는 용감한 부대는 없었다.
“항의 좀 했다고 바로 미친놈을 만들어 버리네.”
“그게 제국의 장기지. 선전선동술로 인상을 만들어 버리는 방법.”
서준으로 살았던 현대에선 프로파간다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충분한 돈과 인력, 그럴듯한 입소문으로 상대를 개자식으로 만드는 수법이다. 물론 네마냐가 그런 데 신경 쓸 일은 없었다.
“괜찮아. 오히려 지금은 그러라고 채찍을 쓴 거지. 적어도 길목을 막지는 못하잖아?”
“아마…… 제국군의 도움은 바라진 않았지만 노골적으로 방해를 하고 나설 줄이야.”
“바난드의 내전보다 나를 위험하게 본 것 같지. 멍청하게.”
그 말을 하면서도 네마냐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점점 위협이 커져만 가는 적군보다도 눈에 띄는 아군을 견제한다니.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지만 지금 상황에선 제일 바보 같은 짓이다.
“그나저나 후방은 그대로 놔두고 와도 되는 건가? 제국군도 고블린 대비는 딱히 하지 않는 것 같던데.”
“아, 그건 걱정할 것 없어.”
고삐를 계속 모는 네마냐의 머릿속엔 온통 아쇼트의 반란과 고블린 둘뿐이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존재만으로 신뢰감을 주는 동료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기억하냐? 키메라.”
“키메라, 그 성수? 저번 성소 사건 이후로 마시스로 돌아가지 않았어?”
“성소가 파괴돼서 근처 다른 곳에 거점을 잡았거든. 그러다가 이번에 내가 하나 부탁을 좀 했어.”
궁금한 듯이 눈길로 답변을 재촉하는 하라드에 부응한 네마냐가 이야기가 이어졌다.
“변이해서 고블린 쪽을 도와달라고 했다고?”
“그래.”
“그건 생각지도 못했네. 너무 정치적인 존재라서 건드리는 걸 생각지도 못했어.”
“당연하지. 그래서 나도 그 유일한 예외를 딱 짚어서 사용했을 뿐이야. 그나마도 ‘변이’를 했으니까 가능한 거고.”
키메라는 왕권의 상징이다. 동시에 오직 하야스단의 적법한 군주에게만 복종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일개 영주의 부탁을 받고 움직인다는 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하야스단의 지도자 자리를 노리는 마탑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이유가 있어서였다.
“적어도 쓸데없는 구설에 휘말려서 시간을 보내고 싶진 않아서 말이야. 어쨌든 당분간 녀석이 인간 마법사 행세로 고블린 쪽 전선을 맡아 줄 거야.”
“나코르잔……. 거기가 가장 먼저 공격을 받고 있다고 했지. 괜찮을까, 거긴.”
“괜찮아야지, 무조건. 그리고 괜찮을 거야. 거긴 모두 든든하게 단합되어 있거든. 기술력도 훌륭하고.”
아직도 통일된 훌륭한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나코르잔의 군대가 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간 부지런하게 무장을 준비하고 투자했던 네마냐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설사 당할 수 없다고 해도, 내가 진작에 어느 정도 준비를 해 놨지. 적어도 내가 돌아갈 동안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하긴 고원의 수호 성수까지 나섰다면 걱정할 건 없겠지. 보통 마법사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독특한 체질이니까.”
하라드가 자신이 아는 상식에 비추어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마냐의 생각 속에서는 나코르잔의 오체시, 타위비크 대공국에서 다르빌로 이어지는 가상의 선이 그려졌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마냥 놀고 있을 수는 없지. 그러니까 얼른 끝내고 가야 할 텐데. 문제라면…….”
“적마정석.”
그림자 던전이 해결하기 어렵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영주관에 도착하자마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책을 헬레나의 도움을 받아가면서까지 뒤져봤다. 고개를 흔들며, 네마냐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고대 그림자 던전 사건 기록을 나도 찾아봤거든. 그런데 설명이 너무 부족해. 기록을 누가 제거를 했거나 잊힌 걸까?”
“기록의 공백기라고 하지. 던전 사태를 기록한 글들이 당시 전란으로 대부분 소실된 데다, 기록할 만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도 많이 죽었고.”
“오, 그 정도면 좀 열심히 찾아보긴 했네. 보통은 그런 자료가 있는지도 모르는 게 대부분이거든.”
대견하다는 듯한 하라드의 대답. 마법사는 뭔가 좀 다른 지식을 배우는 걸까. 궁금해진 학생은 선생을 재촉했다.
“어째 좀 자신만만하다? 마법사들에게는 공개되어 있는 거야?”
“난 단순한 마법사가 아니니까. 그저 그런 꼴통들하고 비교하지 말라고.”
의기양양한 것을 보면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네마냐가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생각을 정리한 녀석이 입을 열었다.
“요전번에 선생님 만나러 갔을 때 특별히 그 이야기를 들었지. 특히나 그림자 던전 대처법까지 말이야.”
물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하는 하라드 자신도 처음부터 그 대처법을 찾아다닌 건 아니다. 적마정석 불법 유통에 관한 이야기 중 갑자기 스승이 꺼내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테니.
“가끔은 나도 스승님이 무슨 생각인지 따라가지 못하겠다니까. 역시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건지.”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 이야기를 한 수석마법사가 꺼낸 이야긴 흥미로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니까…… 주위의 모든 마나를 차단하는 게 요점이다, 이 말이지?”
“맞아. 역전 현상이라는 건 구체적인 원리는 확실하지 않아도 기존 마나에서 변질된 거지. 이론적으로 마나가 없는 공간에서 발생할 수가 없어.”
“그게 가능한 거였어?”
“그럼. 예전에 내가 한번 주위 마나를 밀어내는 역장을 만들어 냈잖아. 물론 검은 던전과 같은 광역 현상에는 맞지 않지만.”
그래서 녀석이 가져온 해답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오직 네마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건 바로…….
‘이 스킬이 그런 사용이 가능할 줄이야.’
[마나 흡수]
그간 습득한 지식에 의하면 마나는 모든 공간에 항상 일정한 밀도로 존재한다. 그건 사람의 신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밀도가 동일한 상태에서 마나의 움직임, 그러니까 마나역학은 성립하지 않는다. 마나의 밀도를 달리해서 움직이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마법이다.
“형도 알다시피 각자의 사람에겐 그릇이 있었지. 각자 용량은 다르지만 품을 수 있는 마나의 용량.”
“그래, 앙게이온.”
“보통 사람은 오직 그 그릇에 담긴 마나만 사용할 수 있고, 외부의 자연 마나는 끌어쓸 수 없지.”
“그랬지. 강제로 충전 마법을 쓴다고 해도 마정석 호환 때문에 효율이 좋지 않고.”
“그래. 그래서 마나를 차단하는 가장 효율적인 건 흡수법인데도 사용을 하지 못한 거지. 하지만…….”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인지 이해한 네마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릇’이 아닌 외부의 마나를 흡수해서 그림자 던전의 ‘먹이’를 제거하는 것. 마치 산소를 먹이로 타오르는 불을 제압하는 방식과 같은 것일까.
“결국, 내 체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승부를 가르는 계기가 되겠군.”
“정답이야. 하지만 스승님도 이론적으로만 구상하신 거라 확신하시진 못했어. 이론만 가지고 써먹기는 위험하지.”
네마냐는 곧바로 손을 들어 부대에 정지 명령을 내렸다. 한 팻말을 보았기 때문이다.
[국경 – 콜루아 시]
제국의 영지에서 바난드 왕국으로 넘어가는 국경선을 알리는 표시였다. 네마냐의 손짓에 기사와 병사까지 천 명의 인원이 멈춰 섰다.
“이론만으론 확실히 위험하지. 그럼 이렇게 하자고.”
“어떻게?”
“더 들어가기 전에 실험을 한번 하고 들어가자. 그것만 확인하면 더 망설일 건 없겠지.”
이미 눈빛만은 돌파구를 얻은 것처럼 확신에 타오르는 네마냐의 제안이었다.
“좋아……. 하지만 무리는 하지 마. 마나 역전 현상은 정말 위험하니까.”
그림자 던전을 잘못 펼쳤다가는 그대로 존재가 사라질 수 있다. 아니면 그 지역에 재앙이 일어날 수도 있다. 위험성을 너무나 잘 아는 하라드로선 기세 좋은 영주를 보면서도 걱정스럽게 볼 수밖엔 없었다.
하지만 일단 주사위를 던져 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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