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첫수에서 가장 공격적인 방식을 선택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핫!”
수세에 몰린 상태에서의 적극적인 공격은 상대가 쉬이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상대는 고블린이라지만 수십 년 이상 마법 능력을 개발에만 집중했다.
‘적어도 녀석의 주의를 계속 방해하면 마법을 펼치는 시간도 지연할 수 있겠지.’
“건방져. 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그리엘크의 한마디와 함께 검은 마나의 소용돌이가 회오리쳤다.
‘한 대라도 맞았다간 뼈도 추리기 어렵겠어.’
거리가 가까워지자 네마냐는 뒤로 자연스레 흘려 잡았던 검을 앞으로 끌어당기며 모든 힘을 불어넣었다.
―기이잉!
마나를 모조리 불어넣었다. 마나가 급격하게 쌓이자 검에서 소리가 울렸다. 높은 순도의 불 속성 마나로 인해 검신이 붉어졌다.
“윽.”
녀석의 반응은 생각보다 빨랐다. 아무리 운동 능력이 떨어져도 고블린이란 건지, 콧방귀와 함께 녀석의 지팡이도 다시 불길한 빛을 뿜기 시작했다.
“지금!”
고블린 전사와 맞붙어 보았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녀석들의 운동신경은 평범한 사람의 몸으론 따라갈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포착당하는 건 예상했어. 그렇다면, 내가 노릴 수 있는 건 그밖의 것.’
녀석에게 달려드는 자세를 취했다. 내가 반쯤 체념한 듯한 착각을 하도록 놈을 부추긴 것이다.
“별종, 어디를!”
역시나 녀석은 내가 달려들 것이라 믿고 자세를 고쳐잡으며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네마냐는 순식간에 녀석에게로 향하는 것 같던 몸을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간발의 차이로 그리엘크와 충돌하지 않고 비껴갔다.
“으르릉…….”
잠깐 위기를 넘겼지만, 그리엘크는 다른 생각을 할 것도 없이 네마냐에게 공격 마법을 펼쳤다. 그리엘크의 마나가 지팡이에 꽂혀 있는 마정석으로 집중되었다. 네마냐가 원하던 바였다.
“과유불급이라는 게 뭔지 알려 주지.”
녀석이 드디어 마정석을 쓰자, 네마냐가 중얼거렸다. 그리엘크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건 이미 일이 벌어진 후에야 눈치챌 수 있었다.
―쩌적!
“네 적마정석이 마나 흡수에 특화된 녀석이라지만, 과부하에 걸리면 터져 나가는 건 똑같다는 걸 알아야지. 안 그래?”
네마냐는 검을 들고 방어 자세를 취하며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 순간, 그리엘크의 지팡이 끝에 달려 있던 마정석이 충전량을 견뎌 내지 못하고 금이 갔다.
―파앗!
“헛수작 부리지 마라!”
녀석은 당황하면서도 숨 쉴 틈도 없이 손을 뻗어 왔다.
‘역시 반응 속도 하나만은 인정해 줘야겠어.’
혹시나 해서 뒤로 물러났지만 어림도 없었다. 급하게 피한다고는 했으나 날카로운 손톱에 옷깃이 찢어졌다. 애써 새로 장만한 옷이 흙투성이로 변한 건 신경 쓸 상황도 아니었다.
“제법. 운을 타고난 녀석인 줄 알았더니…… 움직임도 제법이군.”
순간, 녀석은 고블린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유창한 말투로 칭찬을 했다. 네마냐도 일단은 받아 주었다.
“고블린이 존경하는 마도사의 칭찬이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는걸?”
“클클, 고블린에게 중요한 것은 전사의 자질이지. 종족의 벽은 있을 수 없다.”
“허. 남의 고향에 쳐들어온 놈들이면서 혓바닥이 길다고는 생각하지 않나 보지?”
내 말에 녀석이 클클거리며 웃었다. 그 웃음이 좋은 뜻이든 아니든, 타향을 침공해 주민을 죽여 댄 척결 대상이란 건 변함이 없었다.
“물론. 네가 경험 부족한 애송이인 건 알겠다. 네 뒤의 혼혈인이 차라리 낫겠군. 안 그런가, 난쟁이와 장이족의 혼혈아여.”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녀석의 손에서 붉은 기운이 총알처럼 쏘아져 나왔다. 급하게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지만, 반응 속도를 넘어선 빠르기였다.
“피해!”
네마냐는 피하지 않는 대신, 마나가 아직 남은 검을 들어 어떻게든 막았다.
“크읏.”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다기보단, 너무 큰 소리라 귀가 기능을 상실한 것 같았다. 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 느낌이 몽롱하게 다가왔다.
‘아, 설마 이렇게 또 실패하는 건가.’
다행히 머리가 바닥과 격렬하게 접촉하며 고통으로 일깨웠다. 그렇게 쉽게야 죽겠느냐며 곧바로 몸을 옆으로 굴렸다.
“크크크……. 구르는 재주는 독보적이군.”
“괜찮아? 일단 직접 맞지는 않게 날리긴 했는데.”
먼지구름 사이로 조롱하는 소리와 걱정하는 소리가 뒤엉켰다. 다행히도 아일라가 중간에 개입해 준 건지, 직접적인 타격을 입지는 않은 모양이다. 추가 공격이 오기 전에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요.”
애써 몸을 일으켰지만, 부르르 떨던 네마냐의 몸은 이내 무언가를 한 움큼 토해냈다.
―울컥.
“아, 씨.”
속으로부터 이상한 느낌이 치솟았다. 엉겁결에 손으로 받아 내자 끈적이는 핏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공격에 직접 맞지는 않았어도 위력이 강하니 어쩔 수 없었다.
“퉷. 생긴 건 고블린이라도 전설적인 마도사라 이거냐. 정말 너무하네.”
“괜찮겠어? 뇌진탕 기운이 있으면 바로 물러서. 내가 대신 나설 테니까.”
“아니에요, 아일라. 으, 곁에서 꾸준히 견제만 해 줘요.”
못내 걱정스러운 모양이었지만, 아일라는 네마냐의 부탁대로 조금 떨어진 옆에서 대치했다.
‘주된 공세를 받아 내면 반격할 수 없어. 그건 아무리 아일라라도 마찬가지고. 내가 녀석의 힘을 빼면, 아일라가 상대하도록 해야 해.’
그런 생각에 허리띠를 더듬었다. 단검 몇 자루로 장전할 시간도 없는 화살을 대체했다. 하지만 역시 숫자는 많지 않았다.
‘그나마 시간을 벌려면 거리라도 벌려야 할 텐데, 마도사를 상대로라……. 노답이군.’
잠깐의 생각이 이어질 찰나, 곧바로 직감이 불길한 낌새를 탐지했다. 전방의 하늘로부터 마나가 밀집했을 때 나는 ‘지지직’ 소리가 들려왔다. 네마냐는 그 소리를 마나의 파공음이라고 부르곤 했다.
“하늘 조심! 피해요!”
“흡!”
네마냐의 경고는 적절했다. 두 사람 모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급하게 뛰어 적과의 거리를 넓혔다. 눈 부신 빛이 시야를 메우면서 후방으로부터 격렬한 후폭풍이 밀려왔다.
“콜록콜록……. 정말 마나 하나는 괴물 같이 많다니까.”
불평조차 허락지 않겠다는 건가. 그 거대한 몸뚱이를 어떻게 움직이는 건지, 먼지 바람 사이로 거대한 손과 반쯤 부서진 막대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 네마냐의 명치 쪽을 노린 일격이었다.
“어딜!”
한번 당했다고 계속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직격타를 맞느라 손상되긴 했지만, 마정석을 품어낸 검은 아주 부드럽게 그리엘크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쿠당탕!
소리는 요란해도, 녀석은 넘어지지 않았다. 하지마 자신의 무게를 이겨 내진 못한 듯, 무릎을 꿇고 버텼다. 십여 걸음쯤을 밀려나면서도 눈에 서린 분노는 가실 줄 몰랐다.
“크륵, 멀었다!”
“지금 같이 들어가자!”
아일라의 외침에 화답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이 움직여야 할 최적의 타이밍!’
최대한 녀석의 정신을 빼놓아야 버틸 수 있었다. 이길 순 없더라도 시간을 끌 수는 있다. 우리가 지금 밀리면 후방의 사람들은 손도 쓸 수 없으니까.
―타다닥!
두 사람은 좌우로 갈라져 돌입했다. 주위로 몰려드는 고블린이 점점 늘어났다. 간간이 도시에서 쏘아대는 화살이 놈들을 밀어냈다. 문제가 있다면 도시는 도시 나름대로 측면으로 다가설 영주의 병력을 막아야 한다는 점.
‘밀도 잘 버텨 줘야 할 텐데.’
모든 전선을 네마냐가 살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도시의 웬만한 병력은 모두 영주군을 차단하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그리엘크를 막아야만 가능한 시나리오긴 하지만.’
복잡한 생각으로 여전한 고뇌는 옆으로 다가온 검날을 떨치면서 애써 털어 냈다. 걸음은 녹색의 알록달록한 몸뚱이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빨라졌다.
“최대한 주의를 분산시켜요!”
“네가 최종으로 돌입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네마냐는 오른쪽 아래로 흘려 잡았던 검을 크게 다잡고 일성을 내질렀다.
“으아아아!”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검으로 마나가 부지런히 흘러갔다. 쉴 틈 없이 강한 마나를 쏘느라 검은 이미 군데군데 금이 가 있었다. 이가 나간 곳, 금이 간 곳으로 선명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래, 오너라.”
녀석의 주의는 완전히 이쪽으로 돌아왔다. 지치지도 않고 달려드는 모습. 조금 당황했는지 그리엘크의 앞쪽으로 희미한 보호막이 떠올랐다. 그러나,
“내가 아니야.”
―서걱!
살갗이 베이는 소리가 선명했다. 내 검의 느낌은 아니다. 아일라의 쾌검이었다. 요란한 소리는 녀석의 주의를 돌리는 목적을 완성했다. 아일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떠냐, 괴물 놈!”
마도사가 전방으로 마나를 모아 실드를 펼친 것은 놀라운 속도였다. 탁월하다 하겠다. 그렇지만…….
“내가 아니라, 네가 경험이 부족한 거다. 누가 찌른다고 예고를 하고 오겠냐?”
녀석은 석상이라도 된 듯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조금 전 일격이 유효한 타격이었을까.
‘제발 그래야 할 텐데.’
격렬한 움직임과 초조한 마음에 이마엔 진땀이 맺힌 채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크르륵”
그렇지만 녀석의 이상한 소리와 함께 번뜩이는 동공은 주황색 눈동자를 불태웠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역시 고블린이군. 치명타가 아니면 안 돼.’
오히려 더 흥분한 듯한 그리엘크가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야트막한 수는 통하지 않는다.”
놈이 가소로운 웃음을 흘리며 팔을 뻗어 왔다. 한번 타격을 입어서 그런지, 느려진 움직임은 눈으로 보고 피하기에도 충분했다.
‘놈이 작정하면 당하기 어렵겠어. 일단은 물러나자.’
네마냐는 휘파람을 불었다. 물러나는 신호로 미리 약속해 둔 터였다. 아일라와 함께 재빨리 후방으로 물러났다. 족히 오십여 걸음은 물러났다.
“수리는 다 되어 가나?”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10분 정도면 됩니다!”
급하게 성문을 수리하는 병사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였다. 그리엘크는 네마냐의 두려움과 달리 바로 달려들진 않았다. 이쪽의 두 명 역시 가쁜 숨에 힘겨워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녀석에게 타격이 들어간 것 같지?”
아일라는 저린 손목을 털면서 살짝 배어 나온 입안의 피를 뱉었다. 아마도 강화된 녀석의 피부에 강제로 칼을 찔러 넣은 반동인 듯했다. 아일라가 고개를 흔들며 소감을 말했다.
“고블린 30마리를 상대할 때보다 힘들군.”
“네. 그래도 잘 버텼어요.”
네마냐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하늘 저편이 붉게 물들어 오고 있었다. 이제 약속된 저물녘까지의 세 시간은 거의 다 채웠다. 마음은 점점 초조해졌다.
“제길, 시간이나 재료만 충분했어도 제대로 먹힐 만한 무기를 만들었을 텐데……. 네 검은 멀쩡…… 어휴, 그래. 버틸 리가 없겠지.”
내 검의 처절한 상태를 살펴본 아일라는 주절거리며 한숨을 푹 내뱉었다.
“이렇게 사태가 급진전할 줄은 모르는 게 당연하죠. 그래도…… 음, 거의 다 됐네요.”
아일라도 해가 거의 서쪽으로 기운 상황인 것을 확인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른 오후 즈음이라고 했었나?”
“네, 대략…… 으, 젠장. 또 일어나네.”
두 사람이 숨을 돌리는 것도 못 참겠다는 건지, 회복 주문을 쓴 녀석이 일어섰다. 마법사의 기준에서 보아도 마법을 쓰는 실력이나 마나량이 무시무시했다.
‘고블린인데도 저런 마법 실력이 가능하구나.’
가볍게 전율이 일었다. 억지로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숨 쉴 틈을 안 준다니까, 정말.”
“후우…….”
점점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애써 진정시켰다. 이미 싸우기에는 부적합한 상태지만 적당한 보폭으로 다시 걸어 나갔다.
‘거리는 항상 놈의 체격에 맞추어 삼십여 걸음 남게.’
그리엘크는 이번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어느새 근처로 족히 백여 놈은 될 법한 고블린 졸병들도 몰려왔다. 그런 무리마저 압도한 녀석의 그 진지한 모습이 두려워지려는 찰나.
―우우웅!
“응?”
“왜요? 무슨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공기가…… 울고 있어?”
“공기……요?”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건 마나가 요란하게 진동하는 소리다. 마치 강제로 끌려가는 것 같은 소리. 머리채라도 잡혀가는 것처럼 울부짖는 마나들의 앞엔 그리엘크가 우뚝 서 있었다. 검은 구름과도 같은 오라가 뻗어 올랐다.
“시간을 번다고 생각했다면 틀렸다. 너는 오늘,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한다.”
섬뜩한 한마디였다.
그 순간 찢어지는 파공음. 아일라를 급하게 껴안고 옆으로 굴렀다.
“큽.”
오늘만 벌써 세 번째로 구르는 중이었다. 급한 와중에도 목덜미에 걸어 놓은 목걸이를 잡아채는 건 잊지 않았다.
“젠장, 이걸 어떻게 가동하더라?”
이곳 세계에서의 마법이란 주문명을 외운다고 그대로 실행되는 게 아니었다. 폭발의 와중에 정신을 잃을 것 같으면서도 하라드가 간단히 가르쳐 준 내용이 떠올랐다.
“술식 계산을 파동으로 변환시켜 마나를 움직이는 것이 정확한 방법이야. 이 방법은 오랫동안 사용되었고, 필요에 맞춰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
“단점은?”
잠시 생각하던 마법사가 어깨를 들썩이면서 주요한 단점을 설명해 주었었다.
“단점이라면, 현장에서 계산한다면 착오가 생길 수 있다는 거겠지. 집중력이 만들기도 힘든데 깨지는 건 쉽거든. 숱한 마법사들이 중간에 멋대로 마나가 풀려서 죽었어.”
“그래서 집중력이…….”
네마냐의 감탄을 들으며 하라드는 계속 설명했다.
“어쩔 수 없이 마정석에 미리 안전이 검증된 술식을 기억시켜. 그래서 이게 오늘날 마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수정석을 가동하려면 주문어가 필요하다. 드디어 그것이 기억났다. 네마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곤 수정석에 대고 외쳤다.
“보호막, 보호막!”
“하, 됐다.”
아일라가 한숨을 토했다. 급하게 뽑아 손에 쥔 하얀색 수정석에서 제대로 마나가 흘러나온 것이다. 뿌연 우유와도 같은 막이 전방을 가로막았다.
“그만 더럽게 굴고 죽어라!”
그리엘크의 몸이 부풀어지면서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를 터뜨렸다. 온 힘을 다했는지, 가지고 다니던 홀도 산산이 바스러뜨리며 거대한 검은 공을 만들어 냈다. 그 거대한 손마저도 이건 힘겨운지 파들거리며 떨렸다.
“윽, 저 미친놈이 자폭하는 건가?”
“숨 참고 꽉 잡아요! 이건 바람이나 흙더미는 못 막으니까!”
―쿠쿠쿵!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격하게 요동치며, 속의 모든 것을 뱉어낼 것처럼 흔들렸다.
“크읏!”
애써 어딘가 바닥을 부여잡아도 부질없이 이리저리 밀려다녔다. 손톱을 제아무리 세워도 소용이 없었다.
―후드득!
모래흙이 비처럼 쏟아졌다. 정신이 하나도 챙겨지지 않는 와중이지만 아직 진짜 충격파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더 수정을 붙들고 간신히 ‘제발 버텨 줘’라는 한마디를 되뇌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욱.”
오늘 못 볼 꼴 많이 본다며 구역질 나는 속내를 다독였다. 다행히도 보호막은 제대로 작동한 모양이었다. 애초의 감보다도 훨씬 강한 방어 능력이었다.
“덕분에 살았다. 휴……. 하마터면 여기서 묻힐 뻔했네.”
“그러게요. 생각보다 파괴력은 덜했는데……. 아, 그렇네. 저기 좀 봐봐요.”
네마냐가 아일라를 툭툭 쳐서 가리킨 곳은 성루의 위였다. 손을 흔드는 미하일의 곁에는 옷깃을 펄럭이며 마나를 다시 모으는 하라드가 있었다.
“정말 딱 맞을 때 모습을 드러냈다니까.”
“애초에 시간을 대부분 번 건 넌데, 뭘. 자책하고 싶으면, 우선 저 덩치 큰 마도사 새끼부터 조지고 하라고.”
그 말대로, 칼 손잡이를 부여잡고 다시 앞으로 나섰다. 동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뭉게뭉게 피어났던 먼지구름을 다시금 씻어냈다.
“큭, 크윽.”
거대한 몸뚱이를 한쪽에 기울이며 무릎을 꿇고 있는 놈의 이미지가 드러났다. 아일라가 사방에 구멍이 패인 모습에 기가 질린다는 듯 혀를 차 댔다.
“와, 마도엔 확실히 방어 마법이 카운터라니까. 그리엘크 저 녀석도 쓰러지지 않은 걸 보면 대단하긴 한데.”
“자, 그럼. 마저 가 보죠. 녀석이 아직 살아 있으니까.”
[조심해. 녀석도 아직 힘이 다한 게 아니야. 바로 달려들었다간 반격당할 수도 있어. 시간을 버는 데만 집중해.]
하라드의 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말이야 그렇지만.’
어떡한다. 주변에 둘러싸고 있는 졸병들도 상황을 파악하면 달려들 텐데. 수많은 졸병들이 합류해 버리면 고작 서너 명으론 역전하는 게 불가능했다.
‘결국 내가 큰 판을 계속 이어 가야만 놈들도 끼어들 틈을 못 찾겠지’
그리엘크와 싸움을 이어가면, 그 강한 자존심을 아는 고블린 졸개들은 감히 난입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달려드는 게 최선이야.”
“뭐?”
지칠 대로 지친 허벅지에서 온 힘을 쥐어짜 앞으로 내디뎠다.
“엄호 부탁한다!”
미하일이나 하라드는커녕 곁에 있던 아일라도 짐작할 수 없었던 돌발 행동이었다. 그나마 미하일은 미리 겨누고 있던 석궁을 조준하며 엄호 자세를 취했다.
“제길, 팔에서 힘이 떨어지고 있어!”
하지만 계속된 전투 때문에 초점이 흔들려서 쏜다고 해도 그리엘크가 맞을지 네마냐가 맞을지 확신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힘을 좀 아껴 두는 건데.”
“내가 도와줄 테니까, 준비되면 바로 쏴!”
급하게 하라드가 달라붙어 지쳐 버린 팔에 강제로 기운을 불어넣었다. 긴장감에 헐떡이는 숨으로 여전히 초점은 흔들렸지만, 얼추 정확하게 석궁은 녹색 물체를 조준했다.
“열 걸음.”
이제 네마냐는 불과 열 걸음 남짓한 거리까지 접근했다. 그리엘크가 재빨리 다시 검은 공을 모아 쏘았다. 거의 바스러진 지팡이가 완전히 가루가 되도록 애쓴 공격이었지만, 애석하게도 네마냐는 가뿐히 피했다.
“내가 우스웠지?”
녀석은 여전히 이상한 박자, 그러나 더 큰 목소리로 그르렁거렸다. 그러면서도 화급하게 불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핏빛이 얼룩덜룩하게 낭자한 손아귀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모두 돌격!”
“그럴 줄 알았지.”
다급한 녀석은 그간 들어 본 것 중 가장 큰 소리로 비겁한 대사를 뱉었다. 주변에서 노려만 보고 있던 고블린들이 급하게 창을 들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멍청하긴, 진작에 움직였어야지.”
네마냐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너덜너덜한 검을 다잡을 뿐이었다.
“쏴요, 고블린에게 화력 집중!”
“그렇게 하면 동남쪽의 영주군을 막을 수 없습니다!”
“당장 여기가 뚫려도 마찬가지야. 발리스타들은 모두 전방으로 발사!”
성루 위의 미하일은 장교와 격론을 벌였다. 그래도 빠르게 영주군을 저지하던 발리스타들을 고블린 쪽으로 집중시켰다. 그때.
―두두두두!
땅이 울리는 소리가 그 소란을 뚫고 모두의 귓전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고블린과 사람을 막론하고 일시에 멈출 수밖에 없을 괴상한 소리였다.
“이 소리는…… 설마?”
그리엘크는 시선은 네마냐에 두었지만, 그 눈동자에는 강한 의혹과 불신이 떠올랐다. 그럴 리가 없는데. 통신과 정보를 모두 차단했으니 그럴 수가 없는데.
“당황스럽지? 이게 경험의 차이란 거지.”
“뭣……!”
얼어붙은 그 순간에 자부심에 찬 마도사의 귓가로 스며드는 속삭임. 아차, 집중을 놓쳤구나.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희뿌연 그림자가 머리 위로 오르고 있었다.
“반군과 고블린을 모두 쓸어버려!”
―와아!
―콰장창.
―콰직
21세기의 지구에서 살 때 들었던 말인 ‘와장창 엔딩’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았다. 눈앞으로 기사대가 무력한 괴수들의 측면을 찌르는 모습은 적어도 그에 알맞았다.
‘적어도 마무리하기엔 좋은 장면이야.’
마지막으로 휘두른 검신이 부러지는 모습을 본 네마냐의 소감이었다. 물론 혼자 가지는 않았다. 녀석의 자랑, 아니 어쩌면 고블린의 위신일지도 모를 뿔. 살갗 이상으로 단단한 그 자존감을 뚫고 박혀 들어갔다.
“큽, 애송이 놈이!”
대답 한마디 없이 네마냐는 부러진 검을 들고 그리엘크 뒤편의 바닥으로 착지했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알림이 빛났다.
[고블린 전쟁으로…… - 튜토리얼 완료]
‘이게 튜토리얼이냐……. 난이도가 미쳤어. 뭔가 단단히 준비할 필요가 있겠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전투는 끝났다.
완파당했다는 자각, 자존의 상징인 뿔마저 부러졌다는 충격에 굳어 버린 그리엘크. 곁에서 꺅꺅대는 고블린 호위대가 애써 끌어갔다.
―끽끽끽!
숱한 졸병들은 명령 계통마저 상실하자 비명만 내질렀다. 그리곤 중무장한 기사들의 발굽 아래 짓밟혔다. 이제야 드디어 장대한 프롤로그 하나가 끝난 기분이었다. 긴장이 풀리니 온몸이 뻐근해져 왔다.
“그래도 여흥의 마무리는 해 줘야지.”
이미 상태는 메롱이었지만, 검을 휘둘러 검집에 넣은 뒤,절도 있게 돌아섰다. 익숙한 낯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스케일 큰 파노라마에 놀란 표정도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들 달라졌지.’
그들 모두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다. 말이 필요가 없었다. 고개를 한껏 들고, 지친 손을 한껏 하늘을 향해 뻗었다.
―와아!
환호성과 함께 황량한 바가반드의 언덕에도 새 봄이 찾아올 것인가. 작은 파랑새처럼 희망은 그렇게 홀연히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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