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더하기 회귀는 먼치킨-38화 (37/200)

38화

반쯤 부서진 성문. 틈으로 새어드는 달빛 사이로 자루아나의 시내는 전승을 축하하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관사 내부에 있던 미하일과 네마냐는 예외였지만.

“그래도 인명 피해는 많지 않아 다행이야.”

“문제는 수습이지, 수습.”

사람이나 고블린이나 정작 몇 명 죽지도 않은 가벼운 해프닝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후 수습은 골치 아픈 과제였다.

“영주가 되자마자 과제라니.”

“뭐 또 왔어?”

피해 보고서 뭉치들을 읽고 있던 미하일이 퀭한 눈동자로 돌아봤다. 네마냐도 책상에 다리를 올린 채 얼굴은 또 다른 책자로 덮고 있었다. 네마냐는 두루마리를 아무 데나 던졌다.

“그래. 가스파리얀이 뭘 해서 문제가 아니었어. 그 존재 자체가 해악이라니까. 이렇게 깽판을 쳐 두고 나갈 줄은 몰랐지.”

만만치 않게 퀭한 눈가를 주무르며 책상에 걸쳐 둔 다리를 내렸다. 그리엘크에게 덤벼든 마지막 공격으로 어깨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하라드가 치료해 줘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래도 완전히 정상이 되려면 시간이 걸리겠어.’

미하일은 읽던 서류를 치우며 마찬가지로 한숨을 쉬었다.

“설마 세금은 둘째 치고 쓸 만한 패물들까지 몽땅 챙겨서 도주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지.”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란 거지.”

탁자 위에 놓인 차는 차가웠다. 단숨에 마셔 버리니 조금 정신이 들었다. 달빛이 드는 풍경은 몇 시간 전에 그 난리였다는 게 무색하게 아름다웠다.

“저 피난민들이나 우리나 다름없게 생겼어.”

먼 곳에서는 산맥을 배경으로 피난민들의 불이 점점이 빛을 채우고 있었다. 식량에 생각이 이르자 네마냐는 다시 돌이켰다.

“식량 창고는 상태가 어때? 불은 껐지만, 전투 중에 첩자가 있던 모양인데.”

“고블린 특수 부대였다더라고. 식량 창고가 전소해서 남은 게 없어.”

음,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지만. 이건 좀 정도가 심한데. 머리를 헝클어뜨리면서 상황을 하나씩 짚어 나갔다.

“비축 창고마저 비었을 줄은 몰랐지. 왜 피난민도 방치하고 영지 운영 전체가 엉망인가 했더니, 생각보다 심각했어.”

“그리고 그 돈을 몽땅 쥐어짜서 만든 군대는 홀라당…….”

이제 그 얘기는 더 하고 싶지도 않았다.

‘복장만 터지지.’

손사래를 치면서 창가를 등지고 돌아섰다. 어찌 되었든 당장 사람들이 먹어야 할 식량은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 급한 건 식량이란 거지?”

“그래. 전투 직전에 남아 있던 군량도 도망가던 관리인들이 태워 버려서 배급제를 해도 이제 고작 며칠이야.”

아마 이 소식이 그대로 퍼져 나갔다간 시내에서 봉기라도 터졌겠지. 다행히도 정보 통제가 잘 된 덕인지, 영주가 쫓겨난 게 기뻐서인지는 몰라도, 별문제는 없었다.

“괜찮아. 아주 잠깐만 버티면 돼. 내가 미리 손을 좀 써 뒀어. 혹시나 해서 준비한 건데 설마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

“손이라니, 그건 또 무슨…….”

이해하지 못한 미하일이 되물었지만, 네마냐는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창가를 톡톡 두드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조심스레 창을 위로 들어 올렸다. 이 지역에선 보기 어려운 자고새였다.

“때마침 온 것 같군.”

자고새의 다리엔 아주 작은 두루마리가 독특한 매듭으로 묶여 있었다. 금을 녹여 만든 잉크는 촛불의 빛을 반짝이며 반사했다. H. 당당하게 금을 넣은 잉크로 이런 이니셜을 쓰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나 집단이라면.

“자고새? 성산의 맑은 공기만 좋아하는 새가 어쩌다 여기에…….”

미하일이 놀랄 만도 한 일이다. 여기 와서도 ‘자고새’란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지만, 생각보다 이 고원지대에선 귀한 새였다. 이 세계의 자고새들은 순수한 자연 마나의 샘을 좋아해 원천에 모여 사는 습성이 있었다.

“고유 마나를 익혀서 찾아가는 전서구라니, 보두앵 지부장도 신중한 사람이라니까.”

보두앵 지부장 이야기에, 그제야 미하일도 알겠다는 듯 반응을 보였다.

“보두앵? 저번 콜라케르트에서 만났던 사람? 그쪽 상단에서 식량을 지원받기로 미리 약정했단 이야기구나.”

턱을 괴고 중얼거린 끝에, 미하일은 놀라면서도 꽤 정확한 해석을 내놓았다. 예쁜 빛깔의 날개를 퍼덕이는 자고새를 들여두고 책상에 반쯤 걸터앉았다.

“어디 편지를 볼까.”

지면이 작다 보니 아주 간략하게 축약된 내용만이 담겨 있었다. 등잔의 빛을 쪼이며 내용을 읽었다.

“곧 도착한대.”

“빠르기도 해라.”

“며칠 정도 더 걸릴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네.”

졌다는 듯 미하일은 양손을 들었다.

“하, 설마 그런 문제까지 생각했을 줄은 몰랐네. 이거, 내가 너를 과소평가했나 봐.”

“이제 드디어 알아채셨군, 신임 재무관님.”

웃으며 두루마리를 접어 건네주었다. 미하일이 내용을 확인하는 사이에 네마냐는 다음 단계의 이야기를 꺼냈다.

“애초에 여기로 돌아온 이유는 마정석을 캐서 가공·판매하려던 거였어. 처음엔 채굴 회사를 세우려고 했지만, 영지를 손에 넣었으니 이제 추진해도 되겠지.”

돈을 버는 것은 물론이고 고블린들의 뚝배기도 친절하게 깨려면 반드시. 힘이 다 빠진 줄 알았던 오른손이 저절로 주먹을 쥐었다.

“좋아. 우리도 진작에 생각해 놓은 계획들을 실행해야지. 인부 모집 계획이나 광산 인프라 구축도 계획은 짜 놨어.”

미하일은 지금이라도 바로 영지 재무청으로 달려가 모든 필요 자료를 분석하겠다고 나섰다. 기쁜 마음으로 열쇠를 내어주었다.

“좋아. 일단 오늘은 재무청 서류 목록만 분류해 두고 내일부터 시작해야겠어.”

“그래. 곧 상단도 도착한다니까 주민들에게 나눠 주는 거나 하자.”

“위대하신 영도자인 우리 네마냐 님을 결사옹위해야…….”

“그만, 그만. 너무 나갔어.”

녀석의 입을 손으로 우악스럽게 틀어막고 투덕거리려는 하는 찰나,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흠, 흠. 들어오세요.”

손목을 가볍게 털며 미하일에게 가 보라고 손짓했다. 녀석은 열쇠를 들고는 다른 쪽 문 너머로 사라졌다. 아마 지금 들어오는 사람도 서류철을 들고 있으리라.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어, 엘레나? 이곳에 웬일로?”

분명히 뒤에 서 있는 사람은 파드 경이 맞는데, 저 사람은…… 여기 있으면 안 될 사람인데.

성국기사단의 지휘관으로 간다던 엘레나.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잠시 쥐 죽은 듯한 고요함이 방안에 서렸다. 여기저기 눈치를 보던 파드는 신중하게 헛기침을 뱉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며칠이긴 하지만 너무 어색하게 환영하는 것 아닌가? 공주님도 모처럼 짬을 내어 찾아오셨구먼.”

“그렇네요. 바가반드에는 원래 손님을 가만히 세워 두는 예절이 있나 보군요?”

퍼뜩 정신을 차린 네마냐는 살짝 허둥대면서 자리를 마련했다.

“아, 아닙니다.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뵙게 돼서. 파드 경도 함께 앉으시죠.”

그제야 몇 시간 전, 파드가 선두에서 지휘하던 병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사들. 제국 수비대가 합류했어도 그렇게 비싼 장비를 갖춘 기사가 많을 수는 없지.

‘신성기사단이 왔구나.’

엘레나와 파드 일행이 소파에 앉는 모습을 보면서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설마하니 신성기사단이 출발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공주님께서 직접 지휘하셨군요.”

“앞으론 공주 칭호도 그만하도록 해요. 전 여기에 기사단 부단장이자 구원군 대장으로 온 거니까.”

“아, 입에 그만 굳어 버렸군요. 말씀대로 주의하겠습니다.”

부단장이라. 지케르니아의 신성국과 영지를 방어하는 건 물론이고 곳곳의 방어를 지원한다. 그것이 성국기사단의 모토였다.

“그렇다곤 해도 설마 성국기사단에서 지원을 올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연락을 취한 것도 바난드 왕국이나 에카톤 상단이었으니까요.”

네마냐의 말대로다. 신성기사단에 도움을 요청하려면 성국과 미리 합의해야 한다. 그러나 바가반드는 물론, 네마냐에게도 그런 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지케른에서의 공식 요청에 따라 지원을 온 건 아닙니다. 네마냐 경이 얘기한 대로 사전에 합의가 있던 것도 아니니.”

등받이에 기대고 앉은 엘레나는 무어라 몇 마디를 더 덧붙였다. 사슬갑옷을 걸친 엘레나는 예복을 입었을 때보다 한결 편해 보였다. 어쩐지 말투도 조금 편해 보였다.

“나는 바가반드에 올바른 관리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여전합니다. 이제 그게 이루어졌으니 다행이죠.”

“저 역시 동의합니다.”

옅은 미소를 띠면서 맞장구쳤다. 파드는 어쩐지 자녀들을 보는 아버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쨌거나 엘레나의 말대로라면 지금 신성기사단 일부가 이곳에 온 것은 단순한 목적은 아니겠지. 전쟁 지원을 요청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지도 이제 막 장악했으니 그런 건 무리지.’

그걸 의식한 네마냐는 처음부터 영지의 사정을 호소하고 나서기로 작전을 세웠다.

“이제 이곳의 상황을 대략 파악하고 나니, 제 머리가 깨지네요. 먹는 문제부터 재무장이나 애초의 목적인 마정석 가공까지 전부 말이죠.”

검지를 들어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여기가 아니의 궁정이었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불손한 자세다. 하지만 스스럼없는 엘레나와 이야기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세였다.

“후후……. 나랏일도 비슷하죠. 필요한 것 있으면 언제든 연락을 넣도록 해요. 내가 성녀 그 자식을 걷어차서라도…….”

“쉿, 부단장. 직속 상관한텐 그런 이야기 하는 거 아닙니다. 지금은 더군다나 영주의 앞인데.”

놀란 파드 경이 뒤늦게 수습에 나섰다. 엘레나는 어차피 다 아는 얘기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뭐, 성녀와 내가 소꿉친구인 건 누구나 다 아는걸. 인제 와서 엄숙해 봤자 웃기기만 하지.”

“……휴,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아무쪼록 궁정에서나 공식 행사에서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 완고한 파브라드가 두 손 두 발 다 드는 고집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육성으로 새어 나왔다. 이제는 부단장이 된 엘레나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저는 산등성이와 고원을 지키는 데 제 역할을 다할 생각입니다.”

“잘됐네요. 그럼 당장에라도 출병을…….”

“물론, 그럴 역량이 되었을 때의 얘기입니다. 지금 바가반드는 물자나 인력도 고갈된 상태니까요.”

“그 말 대로예요, 공…… 부단장님. 저흰 지금 식량도 당장 꾸어 온 식량으로 나눠 줘야 할 판이라서.”

줄곧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미하일도 한마디 거들었다.

“당신이 부왕께 드린 보고에선, 이미 놈들이 침략을 개시한 상태라고 분석했죠.”

“그랬죠. 그건 분명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움직이는 게 좋죠. 먼저 마시스의 마나 원천을 되찾고 방위 시설을 마련하면…….”

“죄송합니다.”

완고하게 말을 끊었다. 엘레나가 이야기하는 건 누구든지 생각할 수 있는 작전이었다. 지금은 단기전을 벌이는 게 아니었다.

‘장기전은 철저히 대비해서 오래 버틸 체력을 기르는 게 핵심이지.’

장기전을 치르는 것과 단기전을 벌이는 건 차원이 다르다. 세계대전이란 희대의 이벤트를 알고 있는 서준의 기억만으로도, 고블린 전쟁에 대한 해법은 분명했다.

“말씀하는 건 다 정론입니다. 옳은 말이죠. 하지만 놈들을 정면에서 단기전으로 제거할 수 없습니다. 성국에선, 죄송하지만 어떻게 대처할 생각입니까?”

“힘으로 부딪혀 오면, 우리는 기사와 결속력으로 맞서 싸울 뿐이죠. 설마 우리가 질 것으로 생각합니까?”

잘못 대답하면 바로 검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이거, 생각보다도 열혈인걸. 실상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이야기였다.

“네. 싸워서 질 수도 있지만, 이길 수도 있죠. 하지만 지금 주민들은 국지전이나 전면전을 할 처지가 아닙니다.”

엘레나가 멈칫했다. 역시 지난 천재지변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잘 알 테니, 자신이 지나친 함정을 알아챘겠지.

“……확실히 여건이 불리한 건 인정합니다. 다만 내 이야기는, 이 과제를 미루면 미룰수록 훗날이 어려워진다는 거예요.”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 이미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그렇지. 그래도 이 정도 열의라면 같이 …….’

“하하, 확실히 부단장님의 열정은 제가 따라가지 못하겠군요. 일개 영지에 겨우 얽매이는 저로선 말입니다.”

“겸손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제는 겸손한 자가 아니라 자질을 갖춘 사람이 중요한 시간이죠.”

“좋게 평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똑똑.

그때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아일라의 모습이 나타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네마냐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 무슨 일이야? 얼굴은 왜 그렇게 붉어…….”

“뭘, 뭘 도와드릴까요?”

네마냐는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엘레나와 파드는 서로 마주 보며 의미 모를 웃음을 나누었다.

“아, 다름이 아니고 도시 입구에서 전령이 왔어. 에카톤에서 수레 수백 대를 끌고 왔다는데?”

보두앵의 글씨로 된 쪽지도 받았다. 마침 성국과 바난드에서 완벽한 내빈까지 와 있었다.

‘이제 영지를 어떻게 정비하고 성장시킬 수 있을지 발표할 쇼케이스 시간이군.’

“……아까 주신 제안에 대답을 어떻게 드려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네마냐는 앉아 있던 파드 경과 엘레나 부단장에게 답 대신 건넨 것은 제안이었다.

마침 영지의 미래에 대해서 발표를 하려던 참입니다. 괜찮으시면 함께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손님들.”

이상하게 들뜬 텐션에 약간 어리둥절한 두 사람이지만 기꺼이 수락하며 일어섰다. 파드와 엘레나가 다가오자 정중하게 몸을 반쯤 숙였다.

“지금부터 주민들의 앞에서 우리 앞날의 계획을 이야기할 겁니다. 초조하게 여기시는 고블린 건을 포함해서요.”

“무슨 답일지 궁금하군요. 내가 원하는 답이라면 주민들이 원하지 않을 텐데.”

엘레나야 더 커다란 전쟁을 원하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하지만 네마냐는 굳이 수정하려 들진 않았다. 자신도 어디까지나 방향성의 문제지, 전쟁을 피하자는 건 아니니까.

“주민들은 그렇게 생각이 얕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우리를 구하러 오신 기사분들이 말씀하시면 어떤 결론이 나도 환영할 겁니다.”

“그렇군요.”

계단이 좁고 가팔랐기 때문에 부단장의 손을 청하여 잡았다.

“실례하겠어요.”

“천만의 말씀을.”

어색한 몸짓을 부리는 두 사람과 이유를 모르게 흐뭇한 파드 경은 방을 나섰다.

“좋을 때다, 좋을 때야. 끌끌…….”

스트레스가 북받친 미하일의 이야기. 아일라는 그저 좋은 놀림거리를 찾았다는 생각만 떠올랐다.

- 39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