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쏴라!”
“발사!”
2가지 언어로 된 명령이 이리저리 뒤섞였다. 제각기 쓰는 활의 종류는 달랐지만 무시무시한 양의 화살들이 쏜살같이 허공을 갈랐다.
―쐐애액!
하지만 화살의 재료가 문제였다. 철로 만든 화살은 도시 주위를 둘러산 금속계 결계에 부딪혔고, 결계의 강력한 금속 마나는 마치 자석처럼 반응하며 살촉을 붙잡아 허공으로 내던졌다.
“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일제히 발사해.”
“오케이, 영주님 말씀대로 합죠!”
곁에 있던 미하일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준비된 도르래를 잡아당겼다. 갖은 색깔과 문양으로 장식된 신호기가 올랐다. 퍼뜩 내용을 확인할 때마다 성벽 위 곳곳에서 화살이 아래로 몰아쳤다. 비명의 코러스가 아래로부터 들려왔다.
―크아아아!
―으아악!
고블린과 영주의 상비군이 이리저리 뒤섞인 괴이한 군대였다.
“여기선 우습게 보여도 민병대로 상대하려 했으면 확실히 어려웠겠지. 무장만 봐도 탄탄하네.”
네마냐의 감탄처럼, 결계와 성벽이 있다는 점은 굉장히 든든했다. 화살이나 돌멩이 하나만으로 손쉽게 저 무서운 병력을 쓸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제국이 어떻게 많지도 않은 병력으로도 고원을 지배했는지 이제 알겠군. 영지민의 마나를 계약으로 지배할 수 있었을 테니까.’
이 세계에서 결계는 과학적인 건 아니어도 나름의 합리성은 갖추고 있다. 일종의 재화처럼 계약을 통해 주고받을 수도, 세금처럼 징수할 수도 있었다.
‘마치 세금처럼 거둬서 여기저기 유용하게 쓸 수 있다는 점은 대단하군. 나야 아직 임시로 광맥에서 끌어다 쓰는 거지만…….’
네마냐는 문득 눈을 돌려 성채의 옆을 바라봤다. 고블린들이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거대 광맥이 그곳에서부터 흘러나왔다. 광맥은 성문 근처를 지나 뒷산 쪽으로 굽이쳐 흘러갔다.
‘저 부분은 성벽 밖이라 우리가 어떻게 방어할 수 없는데. 혹시 놈들의 공격을 받기라도 하면.’
아직은 근거 없는 걱정일 뿐이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미련을 털었다. 바로 옆에서 상황을 보던 아일라는 고블린들이 지치지도 않고 결계에 달려들었다가 밀리는 모습에 연신 혀를 찼다.
“어리석긴. 머리를 써야지. 똑같은 짓거리를 대체 얼마나 하는 거야?”
“음…… 대략 한 30분째 저러는 것 같은데.”
“황당할 정도네.”
아일라가 반복되는 물음을 던지고 미하일이 곁에서 답을 달아주는 중이었다. 그래도 답답함이 풀리지 않는지 곁으로 다가와 네마냐를 툭툭 쳤다.
“이봐, 넌 어떻게 생각해? 저게 놈들의 어떤 작전인 걸까?”
“음, 뭐랄까. 바보기도 하고 바보가 아니기도 하죠.”
다그치듯 이어지는 물음에 손사래를 치며 말했으나, 네마냐가 보기에도 쉽게 끝날 것 같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스무고개는 관두고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타티온에 들어갔을 때 마주쳤던 로브 뒤집어쓴 사내 기억해요?”
“로브……? 아, 그 이상한 놈. 기억하지 그렇게 옷을 둘둘 말아 입고 다니는 놈이 흔하진 아니니까. 근데 그건 왜?”
네마냐는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생각해 두었던 시나리오 하나를 말해 주었다.
“그 사람이 사실은 사람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였다고 하면 놀라울까요?”
“사람이 아니라니? 영주의 부하 아니었어? 마법사들의 마나도 느꼈는데.”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마법사는 아니에요. 느껴지는 파장이 인간의 것은 아니었어요, 확실히. 인간의 마나를 담아 놓은 목걸이가 있어서 위장이 잘 됐을 뿐이지.”
위장한 고블린 마도사의 장비를 잘 살펴본 덕분에 나올 수 있는 분석. 아일라나 미하일 모두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다. 아일라는 충격을 이기려는 듯 입술을 앙다물고 있더니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인간이 아니었다, 인가. 정말 여기 와선 내 눈도 못 믿겠다는 교훈을 얻어가네.”
“아무리 그래도 첩자겠지, 고블린이…… 설마. 에이, 아니겠지.”
한 박자 늦게 아일라와 같은 생각을 떠올린 미하일. 그런데도 아직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 여기 살면서 그런 말투랑 복장, 생김새를 가진 마법사 본 적은 있었어? 더군다나 대놓고 공격 마법을 쓰려고 하는 판이었는데.”
“그게 정말이라면, 처음 네가 그 로브를 저지했을 때 하라드가 한숨을 쉰 이유를 알 것도 같네. 그게 안도의 한숨이었다니.”
뒤늦게 기막힌 곡절을 알아 버린 아일라는 머리가 헝클어지는 것은 염려하지 않고 머리를 마구 긁었다.
“그러면 녀석의 정체는 뭐지? 우레이미야 쪽에서 잠입시킨 원정대일까?”
종종 헛발을 짚는 미하일 녀석치곤 꽤 날카로운 해석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네마냐의 대답이 이어졌다.
“키마이라가 이런 얘기를 했었지. 고블린과 인간 혼성군을 거느린 고블린 마도사의 존재.”
“고위급 대마법사도 쩔쩔맨다는 키메라가 마력으로 밀렸다던 그 마도사……?”
―크와아아!
성첩 건너편에서 차마 들어주기 괴로운 울부짖음이 귀청을 파고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의 출처로 향했다. 누군가의 무거운 진술이 분위기를 더 무겁게 했다.
“그렇다면, 대마도사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단 소리겠지.”
족히 4백 미터 정도는 떨어진 지점. 거대한 가마 위에 올라앉은 덩치가 보였다. 가마를 받들고 있는 여섯 마리의 고블린은 얼마 전 마주친 보르크처럼 거대한 투사형 고블린이었다.
“우레이미야가 자랑하는 대마도사 무리의 일원, 그리엘크. 잠입과 위장, 유격전에 정통한 녀석이라지.”
하야스단 침공의 선봉에 섰던 대마도사의 이름. 인간이라면 모두의 두려움을 샀던 공포의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리엘크면 평생 쇳덩이만 만진 나도 들어 본 이름인데. 그 녀석 아니야? 나샤와 사건 직전에 철위기사단을 몰살한 그놈 말이야.”
“변경지대 마법사들이 모두 나섰는데도 몰살당했다던, 그 녀석이라고?”
인정하긴 싫지만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펄펄 날뛴다.
“와, 그런 놈을 우리가 어떻게 상대해!”
“우리야 시간을 벌 수만 있다면 승산이 없다곤 할 수 없지만.”
그러면서도 네마냐 역시 불안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순 없다. 저 대마도사 녀석도 그걸 알고 있을까. 확신까진 아니어도 충분히 그러리라는 생각은 들었다.
‘그 약삭빠르다는 놈이 자기 수하들의 바보짓만 지켜보지는 않겠지. 결국엔 녀석이 앞으로 나서게 될 거야.’
생각이 그쯤에 이르자 더는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시간은 대략 두어 시간 정도 벌써 흘렀다. 순조롭지 못한 상황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해도 괜찮겠지.
“그리엘크 녀석은 뭔가 준비한 수가 있을 거야. 결계가 한번 돌파되면 우린 공성전으로도 질 가능성이 높아. 알겠지만, 우리 목표는 놈들이 입성하는 시간을 최대한 미루는 거니깐.”
기껏 준비해 놓은 방어전은 사실 핵심이 아니라 적의 힘을 빼놓는 수단이었다는 발언. 더 큰 그림이 있다는 점에 주목한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적의 입성을 연기한다고?”
“원군이라도 오는 거야? 타티온에서 올 수야 있겠지만, 수십 명 남짓한 병력으론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텐데.”
미하일 녀석의 지적치곤 정확했다. 숱한 정규전과 게릴라전을 거친 정예 군단을 추려 낸 적군은 평범한 상대가 아니었다.
“우리 민병대가 아무리 용감해 봤자 평범한 장정들이야. 전문 살육자인 적과 부딪치면 순식간이 녹겠지.”
무척이나 암담한 예측이지만 현재로선 가장 긍정적인 예상이기도 했다. 아일라 역시 똑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네 말대로야. 민병대로는 족히 2천 명은 되는 저 병력을 상대할 수 없어. 모르긴 몰라도 숫자가 같아도 밀릴 텐데 우린 숫자도 적지?”
울상이 된 미하일은 뭔가 다른 대책은 없느냐며 호소하기 시작했다.
“……남 얘기하듯 하지 말고, 두 사람 다. 그럼 네마냐, 네 계획은 뭐야? 민병대도 아니고 다른 지원군이 있다는 거야?”
혼란스러움을 표하던 미하일은 아일라와 함께 멍이라도 때리는 듯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대충 알아차리지 않았어? 참고로, 파드 씨가 갑자기 새벽에 모습을 감춘 것도 관련이 있어.”
“상상도 못 했어. 어쩐지 파드 그 고지식한 양반이 그렇게 얼굴이 굳어 있더라니.”
그제야 몇 가지 의아했던 단서가 맞춰져 어이없어 하는 아일라의 표정. 위로하는 차원에서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강변에서 고블린과 맞닥뜨렸을 때 가스파리얀의 편지를 발견했죠.”
“그래. 하지만 내용은 몰랐는걸?”
“굳이 내용이 중요할까요? 중요한 건 그 둘이 손을 잡았다는 것이니까.”
이내 아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마냐는 계속 말을 이었다.
“마침 그 직전에 국왕에게서 유사시 모든 지원을 해 주겠단 약속도 받았고요.”
미하일은 알려 주지 않았다는 점에 서운한 모양이지만, 그래도 안심이 된 모양이었다. 아일라도 예상외로 대견스럽다는 눈빛을 쏘아댔다.
“흠, 흠. 중요한 건 지금도 밖에서 소리 지르는 놈들이니까. 본론으로 돌아가서.”
관심을 싫어하진 않지만 어색한 네마냐는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파드 씨와 약속한 대로라면 오늘 오후, 저녁까진 도착할 겁니다. 거의 3시간 정도만 더 버티면 돼요. 다만…….”
“다만?”
“뭐, 저 녀석 때문이란 얘기겠죠, 네마냐는.”
“아, 그랬지.”
세 사람의 시선은 다시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몸뚱이로 향했다. 조잡하지만 형형색색의 천으로 장식된 옷.
“자기가 무슨 샤먼이라도 되는 줄 아나, 쯧.”
네마냐로선 예전 이서준이던 시절 옛날 무당의 옷을 보던 기억이 떠오르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진실은 보기보다 가혹했다.
“저 색깔 하나하나가 점령하고 파괴한 곳의 깃발이라던데. 과시욕인 거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아일라가 설명해 주었다. 물론 네마냐 자신도 안다. 안다는 것보단 기억하는 거지만. 질린다는 표정의 미하일이 간단하게 평가했다.
“정말 악취미로군.”
“악취미지. 이제 그걸 우리가 끝내지 못하면 바가반드의 깃발도 저놈의 장식품이 되겠지.”
녀석의 어깨를 툭툭 치며 앞으로 기울였던 몸을 일으켰다. 그때.
“응?”
녀석의 손이 움직이는 게 네마냐의 시선에 들어왔다. 꽤 멀리 있긴 하지만 워낙 눈에 띄는 녀석이었다. 그리엘크는 막대기 같은 것을 허리띠에서 잡고 치켜들었다.
“뭐지, 저 녀석?”
“공격인가? 어지간한 마도술도 어차피 마나로 하는 일이라 결계에 막힐 텐데.”
미하일이 조금 용기를 되찾았는지 결계를 의식했다. 기껏 성첩에 잘 은폐하고 있다가 모습을 드러내놓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쩐지 찝찝한 네마냐는 말려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야, 밀, 암만 그래도…….”
녀석을 향해 입을 열려는 순간, 잠시 곁눈질을 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수백 미터 너머에 있는 그리엘크의 작은 지팡이, 그 막대기에서 불길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불길한 빛이란 벌써 몇 번 보며 익숙해진 불빛이었다.
“모두 엎드려!”
“우왓!”
세 사람, 아니 근처의 모두가 직감적인 위협을 느껴 제자리에 엎어졌다. 싸늘한 돌바닥의 감각이 약간의 안도감을 안겨 주었다. 냉기와 함께 마음을 가라앉혔다.
‘역시 녀석도 적마정석이 있어.’
이 정도는 예상하고도 남았던 부분이다. 일개 수하 마도사도 들고 다니는 걸 대장급인 녀석이 없을 리가 없지. 하지만 문제가 되는 건 그다음이었다.
‘그동안과 비교도 안 되는 힘인데. 대체 누가 이만큼이나 강력한 마정석을 유출한 거지.’
가스파리얀이 정보나 물적 지원을 한 건 분명하다. 하지만 적마정석의 고차원적인 활용 방식이나 대규모 마법의 전개는 기존 고블린 방식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정말 마법사들이 일탈이라도 한 건가.”
그러나 깊은 생각을 할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투콰콰쾅!
불길한 붉은빛은 순식간에 팽창하며 곧 성벽을 물들였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시가지 전체로 뻗어 나갔다. 공기 찢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으으…….”
참기 힘든 신음마저 곧 이어진 폭발음에 파묻혔다. 마침내 청력이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다. 견디기 힘든 압력이 전신에 몇 차례나 쏟아지고 폭풍이 휘몰아쳤다.
“후……. 약은 꾀. 쓴 모양. 상대가 네마냐? 이름이 그랬나. 꽤 좋은 생각이지. 그럼.”
그리엘크의 얼굴은 흥분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괜찮은가, 그리엘크? 자네도 좀 무리한 것 같은데. 좀 쉬지 그래? 자네가 중요 전력인 걸 알고는 있지?”
가스파리얀 백작이 걱정되는 눈치로 이야기했다. 물론 그리엘크를 염려한다기보단 작전을 그르칠 위험성 때문이었다. 그리엘크도 그걸 매우 잘 알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아, 결계가 어떤 원리. 알아본다. 몸에 무리 오긴 했다.”
하지만 거대 덩치의 이 괴수는 오히려 즐겁다는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도리어 꿈틀대는 핏줄이 한층 생기가 있어 보였다.
“돌벽 뒤. 숨지 말라, 한 판. 붙어보자. 궁금하다. 정말 그 재능. 하늘이 준 건지 가려야 하지 않겠는가.”
깊은 속에서 분출되는 감정을 참지 못한 대마도사는 짙은 가래 섞인 광포한 웃음을 뱉어냈다.
‘평소 같았으면 오금이 저려서 나부터 쓰러졌겠지. 지금은 아군으로 써먹을 수 있어 천만다행이군.’
“크흐흐, 보이는군. 탐나는 마나. 흐름이.”
그 시선이 닿는 끝에는 성벽 위에서 보일 듯 말 듯한 크기의 일행이 있었다. 그것도, 눈에 띄는 짙은 흑발에 탐스러운 마나를 쉴 새 없이 뿜어내는 인간이.
“아, 그래. 저 녀석이군. 네마냐 나자리안.”
* * *
한 시간 정도나 지났을까. 이따금 교대하는 마도사 고블린들이 공격 마법을 펼치자 결계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딘지 이상이 생기지 않았나 의심이 생길 만했다.
“어쩐지 결계가 좀 이상한 것 같아, 네마냐. 대마도사 놈이 뭔가 저지른 거 아니야?”
“글쎄…….”
뭔가 저질렀다곤 해도 현상이 드러나기 전에는 알아차릴 수 없다. 시스템을 활용해 볼 수도 있을까 싶지만.
‘지금으로선 눈 감고 가만히 있을 시간도 없으니.’
핑-!
결계가 약해진 사이로 쏟아지는 공격을 피하면서 미하일은 재빨리 석궁을 쏘았다. 미리 장전해 둔 한 발을 쏘고, 재빨리 몇 발짝 스텝을 옮겼다.
―쐐애액!
한 박자 느린 마법 공격이 지나가고 나면, 몇 발짝 옆에서 벼락같은 다음 쇠뇌를 쏘는 식이었다.
“석궁 쓰는 법은 제대로 배웠네? 비리비리한 네 몸으론 이게 최선이긴 한가 보다.”
“석궁 쏘는 것도 체력이 장난 아니거든요? 기사 학교에서도 이걸로 우수 등급 받았으니까.”
용케 이리저리 번뜩이는 시야로 정확히 한 녀석씩 적중시키면서도 말은 많았다. 아일라도 감탄시킬 능력이긴 한데 귀가 못내 따가웠다. 아니나 다를까, 곧 아일라가 잔소리를 꺼냈다.
“야 이…… 시끄러워. 알았으니까 좀 조용히 해 봐. 아니, 전투 중인데도 어떻게 네 재잘대는 소리가 더 시끄러울 수 있지?”
“뭔 말을 못 하겠네. 아얏, 알겠어요. 말 안 하면 되잖아요.”
‘전장이건 말건 두 사람이 제일 신났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지만 역시 점차 약해지는 결계가 염려스러웠다. 어째서? 광맥에서 그대로 마나가 나오는데 결계가 약해질 수 있는 거지.
‘그리엘크가 무슨 수를 쓴 게 틀림없어. 아무래도 한 번은 마주쳐야 하는 건가.’
보르크를 상대한 탓에 아직 뻐근한 왼쪽 어깨를 애써 다독였다.
‘마도사를 상대할 때는 마나를 써야 할 테니까 생각보다 몸은 덜 힘들겠지.’
그나마 위안으로 삼는 구석이었다. 순간,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형, 하라드야. 급하게 할 얘기가 있어서. 길게는 못 해. 잘 들어. 중앙광장의 마정석으로 광맥의 마나가 유입되지 않아. 아마 놈들이 마나맥에 무슨 수를 쓴 것 같아.]
“뭐?”
그 이야기에 네마냐의 시선은 성 밖으로 지나가는 마나맥을 찾았다. 꽤 먼 지점에서 익숙한 붉은빛이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결국 광맥 중간에 또 적마정석을 박아 놨군, 젠장맞을 놈들. 기막히게도 잘 쓰네, 열 받게.”
네마냐의 반응을 알 수 없어도 예상은 되는지 하라드는 꿋꿋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상대한테 마나를 읽는 녀석이 있는 건 알고 있지? 상대측엔 놈 말고는 지금 형을 제압할 만한 사람이 없을 거야. 그러니까 최대한 녀석을 유인해서 잡…… 후유. 최대한 시간을 끌 수 있을 거야. 하아……. 나도 지금 거기로 가고 있어…….]
광장에서부터 달려오는지 숨찬 소리가 이어지다가 통신이 끊어졌다. 급격한 신체 활동은 마나 사용엔 쥐약이라는 점은 이럴 때 적잖이 불편했다.
―콰앙!
“놈들의 무기가 결계를 돌파했어!”
“결계가 무너진다!”
한동안 증강 현실 공간에서 무기라도 쏘듯 설렁설렁하던 동네 젊은이들의 무리가 크게 흔들렸다.
“역시나 민병대로는 간단한 마을 방어조차도 어렵군, 퉷.”
어느새 입가에 진득하게 묻은 흙을 뱉은 네마냐. 잠시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한 뒤, 벼락같이 지시를 내렸다.
“당황하지 말고, 예정된 작전대로 움직여요! 밀, 예비대 전진 깃발 올려!”
“오-케이, 영주님. 내게 맡겨 두라고!”
내게서 ‘Okay’를 배워 써먹는 미하일의 리듬에 맞춰 신호기가 올랐다. 가장 경험 많은 민병으로 선별한 예비대가 나섰다. 재빠른 손길로 예비대는 성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구축했다.
“밀, 최대한 엄호 부탁한다.”
“엄호야 기꺼이 하겠지만, 정말 가능하겠어? 네가 앞장선다니.”
“와, 기꺼이 엄호하겠다니. 나도 뛰어들 맛이 나겠는걸.”
아일라가 미하일을 밀어내며 성첩 앞으로 다가섰다.
“가시게요?”
“뭐, 두 사람 다 가면 나 혼자 여기 있으라고?”
“칼이라도 스치면 아파할 녀석에겐 기회 줄 생각도 없지.”
한순간 타박을 당한 미하일에겐 반박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 네마냐와 아일라는 서로 고개를 끄덕인 뒤 성루 아래로 뛰어내렸다. 도시에서 인망이 높은 녀석이 남아 있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도시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제길, 아무리 그래도 기회는 줬어야지!’
그 사정을 다 알고, 심지어 미하일도 그 사정을 알기에 더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이거 봐, 밀이 내려와 봤자 소용이 없다니까. 이렇게 구멍이 나 버렸는걸.”
네마냐의 말대로 등 뒤엔 심각하게 구멍이 난 채 반쯤 열린 문이 있었다.
“에고, 그러니까 진작에 문을 청동제로 바꿨어야지. 쇠를 단련하러 왔더니 그 쇠로 고블린부터 잡게 생긴 내 처지도 참 기구하다, 안 그래?”
“그래도 여태껏 본 것 중엔 제일 신나 보이네요. 살상은 싫다고 했던 게 불과 엊그제…….”
“싫다고 고블린한테 얌전히 죽어 주겠냐.”
긴장했다는 사람치곤 태연하게 아일라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며칠 전, 춤이라도 추듯 고블린들의 피와 살을 바르던 그 칼. 한기가 돋는 그 특수재질의 검에 부르르 닭살이 솟았다.
“네마자리안? 네 이름인가?”
보르크와 처음 이야기를 나눴을 때를 떠올리게 할 만큼 거친 음색이었다. 낮게 가래 끄는 소리도 변함없었다.
“누구냐.”
바가반드의 새 영주는 이름을 멋대로 바꿔 부르는 데 살짝 불편한 감정을 느끼면서 되물었다.
“여기다. 이쪽을 봐라.”
삼십여 발짝 앞에서 이쪽을 노려보는 녀석의 옷은 가까이서 보니 한층 더 화려한 조합이었다. 파괴된 각 도시의 깃발들이 눈에 띄었다.
“이름이 궁금하면 자기소개부터 하셔야지. 제법 말을 잘하는 걸 보니 나는 네가 누군지 알겠어, 그리엘크.”
―그르릉!
가래 끄는 소리가 화답이라도 하듯이 더 크게 울렸다. 네마냐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그렇게 길지 않아. 네마냐, 깔끔한 세 글자 이름이라고.”
“세 글자. 다섯 글자. 중요한 건 아니다, 별종. 너도 알 것 아닌가? 살아남는 게 전부라는 걸. 질서를 어그러뜨린 너. 잘 알겠지.”
“하?”
별종. 그리엘크의 그 말은 어딘가 아무렇지 않으면서도 네마냐의 비밀을 파고드는 예리함이 있었다. 어깨에 칼을 걸치며 여유롭게 자비심을 보여주었다.
“너, 뭔가 알고 있구나? 이 형님이 살려 줄 테니까 얘기 좀 더 해 보지 않을래?”
“건방지긴, 대마도사 그리엘크 님께. 크르르르……. 목숨 구걸. 빠르지 않을까. 얌전히 실험체로 데려가 주지.”
‘감추지도 않는군.’
대놓고 살기를 드러냈다. 흉흉한 오라가 공간을 타고 넘실넘실 이쪽까지 흘러들었다.
“휴…… 대화를 해 봤자 나만 호구가 되겠어.”
작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천천히 칼을 뽑아 들었다. 아일라가 제련해서 넘겨준 합금제 검이다. 검신에 남아 있던 마나가 체내 마나에 반응하며 낮은 진동음을 냈다.
―우웅!
체내 마나와 검신의 마나 반응을 이미 알고 있는 아일라는 다시 감탄했다. 그리엘크 역시 눈에 이채를 띄웠다.
“재밌는 장난감이군. 쿠흐흐……. 그래도 잔재주는 안 통한다, 별종.”
이런 상황에서 믿을 것은 오직 자신의 능력 그리고 마나가 살아 숨 쉬는, 검 한 자루뿐이다. 저 오라가 폭발하는 대마도사를 가볍게 이기긴 어렵겠지. 하지만 애초의 목적대로 버티는 것이라면?
“좋아, 간다.”
녀석은 기꺼운 듯 다시 거친 가래 소리를 냈다. 네마냐 역시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마신 후 길게 뱉어내었다. 한결 마음은 안정되고 뱃심이 강하게 들어갔다. 긴장감에 머리 쪽으로 쏠렸던 마나를 신체 곳곳에 흘려보내며 평형 상태를 유지했다.
“아일라, 먼저 갈게요!”
“알았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네마냐의 모습은 사라졌다. 검 한 자루에 있는 힘껏 마나를 주입하며 다리로는 땅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최선의 방어는 최선의 공격이라고…… 어, 음 정확히는 몰라도 옛날에 누군가 그랬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일뿐!’
그저 그 원리와 마나의 흐름에 내 몸을 믿고 맡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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