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진없는 상담사-183화 (183/200)

# 183

66장 - 가을 우체국 앞에서 (1)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봄이라고 한다.

그 뒤를 가을이 따르고, 3위가 겨울, 4위가 여름.

해수욕이나 워터파크에 가는 등의 이벤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한국인이 여름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그런 보편적인 인식이 올해 역시 유효할 듯했다.

8월 중순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마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어진 시대인데도, 올여름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물줄기가 쏟아졌다.

햇볕이 거의 들지 않는 축축한 나날들.

고온다습한 공기에 쉬이 짜증이 치밀고, 부족해진 세로토닌으로 인해 타인의 짜증이 우울감을 부르기 좋은 환경이다.

더불어 집에 머물며 인방을 보는 이들도 늘었다.

자연히 사연이 비처럼 쏟아졌다.

사소하지만 날 선 갈등들이 연일 수놓이는 채팅창.

나는 그에 감사했다.

그 모든 이야기들이, 절망이 아닌 희망이기에.

내담자들은 내담자로만 머물지 않는다.

NBSC의 능력에 힘입어 그들의 호수를 내 안에 담으면, 맑아진 마음이 사막의 나그네를 수호하는 오아시스로 자라난다.

그들이 수천수만의 상담사가 되는 것이다.

날로 늘어가는 사연에도 피로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마음이 그렇다는 얘기고, NBSC의 ‘피로’는 악화일로를 거듭했다.

열대야 때문에 새벽 상담소의 사연도 급격히 늘어난 까닭.

아직까지는 ‘각성’의 효과로 만회하고 있지만……

9월이 되어 대학원생으로서 랩에 출근하게 되면, 그때는 몸살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수면시간을 늘려야 할 듯했다.

업무 외적으로는 예상치 못한 낭보가 날아들기도 했다.

[삼초온! 저, 저, 내일부터 데뷔조 올라가요!]

이아리가 청량음료처럼 경쾌하게 외친다.

듣는 내가 다 기분 좋아지는 목소리.

그렇지만 내용 쪽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웠다.

“벌써? 회사 들어간 지 3개월도 안 됐잖아?”

[응! 근데도요, 저 잘한다고요, 빨리 데뷔하래요.]

……단지 실력만의 문제는 아니리라.

아리가 순박한 성격과 달리 몸을 움직이는 쪽으로는 꽤나 재능이 있는 듯하지만, 그래봐야 이제 겨우 3개월.

그 정도 익힌 기본기가 프로 수준에 도달했을 리 없다.

그보다는, 김지연이 말했던 ‘얼굴천재’ 외모 때문이겠지.

희소식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모든 연습생들이 부러워할 초고속 승급이지만, 아리는 고작 몇 달 전에 급우들의 루머로 자살을 기도했던 아이.

아직은 마음이 충분히 회복되지 못했다.

그런 아이가 그럴싸한 실력도 없이 대중 앞에 서게 된다면, 그때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기적일 터였다.

“아리야. 그 데뷔조, 확실히 정해진 거니?”

[응! 피디님이 벌써 다 멤버 짜서요, 100%래요. 숙소도 벌써 비워주셨대요. 제 자리는요, 네 명 방이랬어요. 멋있는 언니들이랑 매일매일 같이 생활하는 거예요. 거기서요, 연습 열심히 하면요, 저 메인댄서도 될지 몰라요?]

“……그렇게까지야 되려고.”

[진짠데? 헤헤. 엄청나죠? 처음에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매일매일 힘들었는데요, 방학 때 열심히 하니까 실력이 쑥쑥 늘었나봐요. 트레이너님들도 맨날 칭찬해주세요. 오늘은 피디님이랑 같이 밥도 먹었어요. 저, 진짜 아이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엄마아빠가 진짜 좋아할 거야. 그쵸?]

“……그래, 그렇겠구나.”

흥에 겨운 소녀에게 부정적인 말을 꺼내기가 힘들다.

‘너는 자살위험군이니 데뷔를 늦춰야 해’라니.

그보다 더 자존감을 갉아먹는 충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도리어 그 말이 소녀의 미래에 장벽이 될 터였다.

이런 상황을 짐작했어야 했는데.

딸 또래의 소녀인지라, 그 외모가 얼마나 빛나는지 몰랐다.

설마 해가 바뀌기도 전에 데뷔조에 올라갈 줄은.

무수한 난관이 닥칠 것이다.

어쩌면 또다시 죽음을 고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내가 있다.

상담사로서, 내가 이아리를 지킬 것이다.

몽둥이가 날아다니는 세상에 짓눌리지 않도록.

“축하한다. 노력이 결실을 맺었구나.”

[헤헤. 너무 좋아요. 좋은데…… 슬퍼요.]

“슬프다니? 왜?”

[저…… 이제 데뷔조 올라가면, 핸드폰 못 쓴대요. 흑역사 생기면 안 된다고요, 데뷔하고 1주년까지는 쓰지 말래요. 그동안 SNS 활용법이랑 멘탈관리 같은 거 배울 거래요.]

과연 체계적인 기획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들이 데뷔조의 핸드폰 사용을 제재하는 것은, 이후 런칭할 아이돌 그룹의 ‘상품성’을 제고하기 위한 ‘품질관리’.

본질적으로는 인권침해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자본주의적 목적성은 아이들의 장기적인 인생을 지원하는 방향이기도 했다.

아이돌의 상품성이란, 유명인의 아킬레스건과도 상통하니까.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나이가 어릴 때는 특히나 빈번해, 밤마다 ‘이불킥’을 하는 것이야말로 청소년기의 공통된 특징이 아닐까 싶을 정도.

그런 것들이 보통은 망각과 미화로 지워진다.

그렇기에 성인이 된 뒤에도 자괴감에 짓눌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명인의 경우, 모든 실수가 ‘박제’된다.

코흘리개 시절의 사소한 잘못들까지 ‘흑역사’로 재생산되어 그들의 현재를 해석하는 근거로 쓰인다.

일반인들조차 프라이버시를 위해 ‘디지털 장의사’를 활용하는 시대에, 유명인들만큼은 잊힐 권리를 침해당한 채 세간의 혓바닥 위에서 영원히 고통받아야 한다.

내가 바꿔야 할 것은 그 세상 전체.

그렇지만 하루아침에 완성될 이상은 못 된다.

우리는 지금 당장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

박제가 손쉬운 웹으로부터의 격리는 그래서 필수적인 조치.

평생 고통받느니 잠깐 자유를 침해당하는 것이 낫다.

개인의 자율권을 박탈하는 꼰대짓이지만, 때로는 감사받지 못할지라도 해야만 하는 간섭이 있는 법.

아리 역시 데뷔 직후에는 스마트폰이 없는 편이 정신건강에 유리할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아리가 기운차게 외쳤다.

[그러니까 내일부턴요, 편지 쓸게요.]

“……편지? 전화까지 못 하게 하는 건 아니잖아?”

[숙소 전화로 하면 되는데요, 그때는 열두 시…….]

“아. 삼촌이 방송 진행할 시간이구나.”

[네! 그래서요, 매일매일 편지 쓸게요. 매니저님들 핸드폰 빌려서 삼촌 하이라이트도 매일매일 볼게요. 그러니까요…… 삼초온. 저 잊어버리지 마요? 가끔…… 답장도 해줘요?]

매일같이 ‘피로’가 쌓여가는 사연의 홍수 속.

이 여름날에 한 소녀를 위해 편지를 쓸 시간이 있을까.

답은 너무도 명확했다.

“매일 읽고, 매일 쓸게. 삼촌이니까.”

[……헤헤. 저요, 아이돌 돼서 유명해지면요, 삼촌 방송에도 나갈 거예요. 그래서 삼촌 방송 더 잘되게 해줄 거예요.]

이미 최고시청자 27만을 돌파한 내 방송이 걸그룹 소녀 한 명 때문에 더 잘될 일은 없겠지만.

그 마음이 고마워,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통화를 마친 뒤에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편지로 지탱해줄 수 있는 대상은 소수.

어딘가에서는, 핸드폰을 박탈당하고 가족과도 떨어진 아이들이 하소연할 데도 없는 통증을 느끼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틀 뒤의 촬영이 바로 그런 맥락이었다.

케이스 I-1.

한 대형기획사의 걸그룹 데뷔조 8인이, <나쁜 사람은 없다>의 열 번째 촬영 대상이었다.

“이게 참 쉽지는 않은 일이었는데…… 대단하죠? 데뷔조라곤 해도 연습생들을 이런 데 내보낼 생각을 하다니.”

유종찬 PD의 그 말처럼, 쉽게 잡힐 촬영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회사의 이미지가 걸린 일인 까닭.

연습생들이 혹시라도 회사의 처우에 대해 인터뷰할 수도 있으니, 문의 단계에서 커트되는 것이 당연했다.

JM이라서 가능했던 일이다.

시설이나 복지 등 모든 측면에서 업계 최고의 환경을 갖춘 곳인지라, 방송 노출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는 모양.

그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편의를 봐줬다고 했다.

“시청률 때문이겠지?”

“예, 그렇죠. 분기도 넘기기 전에 15% 노리고 있는 방송이니까, 여기서 캐릭터 잡히면 데뷔했을 때 상승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모양이에요. 사실 이상한 일도 아니죠. 문제행동이라는 프레임만 아니었으면, 이미 기성 아이돌그룹에서도 사연 쏟아지고 있었을 겁니다.”

오락예능조차 시청률로는 20%를 넘기지 못하는 시대.

그 와중에 교양 성격의 예능이 화제성 1위에 더불어 비드라마 시청률 1위 자리까지 노리고 있다.

‘상품성’ 제고를 위해서라도 잡아야 할 기회였겠지.

물론 행동교정이라는 프레임은 큰 장벽이지만……

그조차 ‘나사없’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악행이 악행으로 남지 않는 방송이니까.

지금껏 방영된 모든 회차에서 단 하루 안에 개선의 가능성이 선보여지고, 일주일 뒤 촬영되는 후일담에서는 누구나가 흐뭇해질 만한 감동포인트가 완성됐다.

그 포트폴리오가 있기에 가능한 홍보전략이었을 터였다.

물론, 내게 그런 사업적인 사정들은 알 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내담자뿐.

“종찬아. 10화는 특히 편집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아이들이 데뷔하고 나면, 이 방송이 끊임없이 재조명될 거야. 작은 의구심조차 남겨선 안 된다. 오직 진한 감동과 흐뭇한 웃음으로만 기억되는, 그런 마스터피스를 만들어야 해.”

“……그거야, 충분히 할 수 있죠. 상담이 잘된다면요. 선생님이야 해내시겠지 싶긴 하지만…… 쉽진 않을 겁니다.”

해내시겠지가 아니라 반드시 해낼 것이다.

이 내담자들만이 아니라, 이후 찾아올 미래의 내담자들을 위해서도.

작년의 연이은 비극 이후, 정부는 아이돌과 연습생들을 대상으로 국가주도의 심리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애썼다.

기존 운영되던 대중문화예술지원센터를 확충하는 방향.

그렇지만 아직은 미진하기만 한 노력이었다.

연습생은 개인의 의지로 상담을 신청하기 어렵다.

어린 나이의 충동적인 심리는, 자기 마음의 짐을 상담으로 풀 수 있다고 기대하기보다는, 그저 절망하고 만다.

그러니 기획사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문제지만, 막상 그들은 무한경쟁 속에서 사업에만 몰두하는 것이 현실.

대형기획사 몇을 제외하곤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했다.

아이돌 데뷔에 성공한 뒤에도 상담은 먼 세계다.

그들의 직무는 가면을 쓰고 행복을 파는 일.

가짜 관계에 시달리고 시달리다 사람에 절망한 뒤에는, 상담이라는 행위 자체가 우습게만 느껴질 터였다.

심리상담사보다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 약을 처방받으리라.

그렇기에 나는 세상에 보여줘야만 한다.

상담이 어떻게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이어, 다시는 되찾지 못할 것 같던 행복의 열쇠를 돌려주는지를.

나만이 할 수 있는 이 일을, 해내야 한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사연의 핵심인물은……

유종찬의 예상보다도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

「 서브퀘스트 “방나은을 살려봐요” 발생! 」

“……무서워요.”

18세 소녀는 그렇게 읊조렸다.

눈은 내가 아닌 테이블을 바라보는 중.

멤버들 사이에 연일 트러블을 만들고 있다는 문제아다.

직원들의 고충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했지.

최근엔 유리병을 집어던져, 멤버가 수술까지 받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늘 그렇듯 근원은 행동 쪽이 아니다.

“나은 씨. 어떤 게 무서워요?”

“그냥…… 신체검사나, 월말평가나.”

“그렇군요. 매주 체중을 측정하고 매달 실력을 평가받는 상황이, 하루하루 스트레스를 주고 있군요. 또 뭐가 있지요?”

“그냥…… 여기 있는 거요.”

“여기 있는 게 무섭나요? 숙소에 있는 게?”

“그게 아니라……”

“살아있는 게 무섭나요?”

“……네. 아니, 아뇨. 뭐래. 미쳤나봐.”

중얼거리듯 대답하고서 투덜대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원래는 거기까지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을 테니.

그렇지만 조심해본들 될 일이 아니다.

상담사로서 훈련받은 김지연조차 나를 만나 비밀을 빼앗겼는데, 고작 열여덟 소녀가 굳건한 벽을 세울 수 있을 리가.

그리고 사실은, 털어놓고 싶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라도 위로받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약한 방나은을 위로해줄 이는 약한 방나은뿐이었다.

동반자인 동시에 경쟁자인 멤버들도, 그녀를 질 좋은 상품으로 완성해야 하는 직원들도, 마음속 약점을 드러낼 만큼 가깝게 느껴지진 않았을 터였다.

그야 나 역시 방송을 매개로 찾아온 먼 존재겠지만……

‘외모’를 제외하고는 모든 능력치가 110으로 회복된 상담사에게 마음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나는, 그녀의 진심을 알고 있다.

그것이 약점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까지도.

“무서운 게 당연해요. 아저씨가 아이돌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연예인이라서, 조금은 알지요. 데뷔해도 똑같을 겁니다. 무한한 경쟁뿐이에요. 지금의 연습생 생활이 차라리 행복했었다고 추억할 만큼, 남아있는 수명이 원망스러워질 겁니다. 은퇴하고 나면 달라질까요? 유명하면 유명한 대로 시선의 감옥에 갇힐 겁니다. 성공하지 못하고 조용히 업계에서 묻힌 경우라면, 더 힘들지요. 10대를 모두 투자해서 해내려던 일을 실패한 사람에게 의욕이 남아있을 리 없으니까요. 그러니 무서워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아이돌이란, 끔찍해요.”

“아……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요?”

“그 정도가 맞아요. 각오해야 합니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현실 속에서도 행복을 찾아낼 자신이 있는 사람만이, 스포트라이트 앞에 서야 합니다. 그게 안 된다면 도전해선 안 돼요.”

“아닌데요? 잘되면…… 잘되면, 행복해지는데요? 선배님들 보면 되게…… 멋있게 잘 사시고…… 그러시던데요.”

“그럴 리가. 그것까지도 연기예요. 10대와 20대를 온통 가식 속에서 보내고 나서, 진짜 행복이 보일 리 있습니까? 그때는 이미 누구 하나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될 텐데.”

“왜, 왜 그렇게 부정적이에요? 상담사, 선생님이면서.”

열여덟.

남들과 다를 바 없이 학교생활을 하고 친구들과 떠들며 놀더라도, 어느 한순간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질 나이다.

그런데 연습생에게는 그 사소한 행복조차 금기.

종일 연습에 매진하다 지쳐 잠들고 나면, 다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테스트의 순간이 찾아온다.

어떤 이들은 그런 환경도 축복이라고 말한다.

유망한 기획사의 데뷔조라면 성공은 떼놓은 당상이니.

나라면 쓸데없는 고민 할 시간에 더 노력해서 불안감이 안 드는 입지를 만들겠다고, 쉽게들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게 아닌 것이다.

누구나 흔히 말하듯 사람은 누구 하나 같지 않다.

그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내 생각이 아닙니다. 나은 양의 생각이에요.”

“……저요? 제 생각요?”

“예. 아저씨랑 선생님들이 관찰카메라랑 다른 멤버들의 인터뷰를 보고 나서 의논한 결과예요. 나은 양이 방금 아저씨처럼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어때요. 틀렸어요?”

“아니…… 전…… 안 그런데요? 싸가지 없는데.”

“그런가요? 그렇다면 아저씨가 착각한 모양이네요. 그럼 다시 물어볼게요. 뭐가 무서워서, 왜 멤버들에게 화를 냈어요?”

“……전…… 저는요…… 그냥…… 맞아요. 무서워요. 행복하지 못한 게 무서워요.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선배님들, 자살까지 하는, 아이돌이 되면, 어떻게…… 어떻게 버텨요……? 저는, 안 돼요. 근데…… 안 되면 안 돼요. 지금까지 이것만 했잖아요. 공부도 못하고요, 친구도 없어요. 여기서 나가면 안 돼요. 그러면 저는…… 어떡해요? 힘든데, 계속 가야 돼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데, 다른 애들처럼 괜찮은 척하면서…….”

쉽게 침식되는 돌처럼, 쉽게 부식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이들을 우리는 약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신경증 환자라 말한다.

그게 아닌데.

그들 덕분에 강한 우리들이 살 수 있는 것인데.

끊임없이 부딪치고 이기려 드는 우리들 틈에, 무르고 부드러운 그 마음들이 있어서, 행복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인데.

“열네 살에 회사에 들어왔죠? 그때 했던 인터뷰, 기억해요?”

“어…… 아니요…….”

“아저씨는 방금 그거 보고 왔어요. 환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라. 사람들을 행복해지게 하는 아이돌이 되겠다고. 그리고 4년이 지났지요. 나은 양은, 순진하게 이상만 좇던 그때의 나은 양을 잊고 싶었던 듯해요. 직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멤버들에게 흠 잡히지 않기 위해,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딸이 되기 위해, 현실적인 사람이 되려 애썼을 거예요.”

“……네. 저, 열심히, 열심히 했어요.”

그랬을 것이다.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연습실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세로토닌 같던 마음은 점차 세상에 재흡수되었다.

4년이란 시간 동안 침식되고 부식되었다.

그 슬픈 변화의 이유는, 결코 악의가 아니었다.

“그랬는데도 이제는 실력이 정체되고 자신감도 떨어져서, 더는 노력할 힘이 없어서, 아무 보람이 없어졌어요. 그게 괴로웠던 거예요? 그래서 자꾸 화가 났던 거예요? 바보 같은 생각이야. 사실은 나은 양 덕분에 많은 것들이 바뀌었는데. 아저씨가 다른 멤버들 인터뷰 얘기해줄까요? 지수 양이랑 소은 양은 성격이 되게 강해서 자주 싸우죠? 매번 왜 멈추는 줄 알아요? 나은 양이 울면서 말려줘서였대요. 민희 양은 처음에 데뷔조 멤버들하고 잘 섞이지 못했다면서요? 외모 때문에 갑자기 데뷔조 올라온 케이스고, 또 본인이 낯가림까지 심해서, 무조건 왕따겠구나 했었대요. 그런데 나은 양이 웃으면서 다가와줬대요. 덕분에 지금은 여덟 명 중에서도 제일 목소리 큰 ‘센언니’가 돼버렸고요. 다들 그래요. 방나은 없으면 싫대요. 같이 데뷔하고 싶은 멤버 1순위라고, 구해달래요. 사연 올린 것도 멤버들이었잖아. 몰랐어요?”

“아…… 진짜…… 진짜요?”

“진짜요. 이런 걸 자기 입으로 좀, 순순히 서로 얘기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여름이 문제야. 그렇죠? 속에 있는 진짜 마음은 말 못 하고, 자꾸 짜증만 내게 만드니까. 그 여름처럼 앞으로도 많은 것들이 나은 양을 괴롭힐 거예요. 어떤 순간에는 남이 너무 미워지고, 어떤 순간에는 자기가 너무 미워지고, 어떤 순간에는 세상이 살 가치 없는 곳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나은 양. 기억해요. 당신은 영웅이에요. 당신처럼 연약해서 경쟁사회에 안 어울리는 패배자들이야말로, 꼭 이 세상에 살아줘야 하는 승리자예요.”

“아…… 뭐가…… 패배자가 어떻게 승리자예요.”

“또 바보 같은 소리.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몰라요?”

“풋, 흡…… 아 뭐야. 웃겨요…….”

작은 웃음 하나가 어둠을 모두 몰아내지는 못하겠지만……

진심을 이해받은 관계는, 분명 살아갈 힘을 준다.

빗줄기 가득한 여름날 속 한 줄기 서광처럼.

그날 촬영을 모두 마친 후, 유종찬은 나지막이 말했다.

“끝났네요. 열 번째 상담까지.”

“그래. 문제행동 상담부터 진로상담까지, 별별 카테고리에서 제일 까다로운 케이스 고르느라 고생 많았어.”

“고생은요. 저야 뭐…… 한 게 있어야죠.”

한참이 지난 뒤에야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쁜 사람은 없다…… 그걸 믿어달라고 하셨죠.”

“그랬지. 열 건의 케이스를 모두 해결한다면.”

“예. 그래서 저는 최대한…… 누가 와도 해결하기 힘들겠다 싶은 사연들만 추려냈고요. 그런데…… 지금 보면, 그것까지도 선생님이 의도한 거였네요. 저는 그 게임에서 이기려고 했는데, 선생님은, 게임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려고 하셨어요.”

“그랬지. 세상이 좀 좆같아야 말이지.”

“푸핫! 아, 참나. 거…… 믿어볼게요. 나쁜 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저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요.”

그날 밤, 나는 첫 번째 편지를 받았다.

그걸 읽는 사이에 비가 개었다.

사각거리는 소리 속에 드러난 밤하늘이, 참 예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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