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65장 - 상담사와 각성 (3)
“괴상한 인간입니다. 방송과 무관한 쪽으로는 뭐 하나 보는 게 없더군요. 하루 최소 다섯 시간을 보내는 원룸에서, 사생팬처럼 선생님 기사만 파고 있는 겁니다.”
방송을 마치고 나가는 길에, 손바울은 그렇게 말했다.
진대수의 인터넷 탐색기록을 뒤진 소감인 듯했다.
“바울이 네 스마트폰은 어떠니?”
“저요? 저야 그 이상이죠. 언제든 어디서든 선생님 관련한 정보들만 검색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기사,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상담기법, 선생님께서 조사하시는 논문 등.”
“……현서하고 데이트할 맛집은 안 찾고?”
“예. 데이트코스는 걔가 혼자 준비합니다.”
“저런. 현서가 고생이 많구나.”
“좋다더군요. 제가 만나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요.”
“만나서도 내 얘기만 하는 건 아니고?”
“설마요. 같이 있을 때는 화제를 다양하게 구성하고 있습니다. 주로 대민재단 이야기를 하죠. 어린 나이에 팀장이랍시고 직원들 부리면서 이런저런 고충이 많은 모양이에요.”
그 대민재단도 결국 내가 만들어낸 단체.
도무지 연인다운 대화라곤 나누지 않는 눈치다.
고맙고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시에, 귀엽고 우스운 이야기였다.
“그런 네가 대수를 괴상하다고 하는 건, 이상한 일이구나.”
“저야 사도…… 제자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 진드기 편집자랑은 비교되고 싶지 않아요.”
“하하. 바울아. 대수는…… 대수한테 있어서 나라는 사람은, 물론 스승은 아니야. 그보다는 훨씬 복합적인 대상이지. 공경과 질투가 섞여서 무한한 관심을 품게 되는.”
“……공경 쪽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질투라고요?”
“그래. 대수가 하고자 했던 일을, 내가 해버렸거든. 아무것도 모르는 꼰대가 도중에 공을 가로채버린 거지. 그 상황에서 질투심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일 거야. 그럼에도 대수는 나를 미워하지 않고, 그보다는 나를 배워 닮아가며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직 선의로만 사랑하는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되려고. 그러니 내 디렉터이자 편집자로서 누구보다 노력하는 거야. 괴상한 일이 아니란다.”
“양가감정 속에서 선의에 집중하고 있다…… 재밌네요. 그런 거라면 괴상하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죠.”
반면 손바울 쪽은, 유일성을 탐하고 있다.
존경스러운 내게 유일무이한 사도이고 싶은 마음.
그렇기에 대수의 감정에 이면이 있음을 알고 안심한다.
경쟁자가 아니라고 확신하게 된 까닭이리라.
그런 맹신적인 태도는 언제고 바로잡아줘야 할 일.
메인퀘스트 “제자를 성장시켜봐요(4/10)”를 위해서라도 조만간 마주봐야 할 인지왜곡이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바울아. 감정들은 이제 손에 좀 잡힐 듯하니?”
“손에요? 아직은 멀죠. 비유하자면 태양 거리에서 달 거리로 줄어든 느낌입니다. 엄청나게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멀죠.”
“하하. 천문학적인 비유가 잘 어울리는구나. 그렇지만 바울아. 태양처럼 멀었던 감정이지만…… 이제야 간신히 달 거리만큼 가까워진 듯한 마음이지만, 그 빛은 분명히 실재한단다. 너는 이미 그것들을 알고 있어. 금방 되찾게 될 거야.”
“예. 선생님 말씀이니 믿겠습니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이제 30분쯤 남았네요. 생신 축하드립니다.”
“……내 생일인 건 어떻게 알았니?”
“전에 지갑 여실 때 민증 슬쩍 봤습니다. 740809.”
“아이고.”
“복합적인 감정 속에 있는 진드기 형은 이런 날인 것도 모르니 참 한심하죠. 역시 선생님께는 제가 필요합니다.”
손바울은, 가정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 없는 아이.
보육원 아이들이라 해도 생활지도원이나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가정과 유사한 유대감을 이루며 성장한다.
그러나 내 첫 제자는, 부모의 목소리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신들과 소통한다는 조모 아래서 방치된 채 자라났다.
감정이라는 것은 그에게 너무도 먼 우주였다.
생일만 해도 그럴 것이다.
손바울에게 자기 생일인 4월 19일은 저주스러운 날.
가족에게 탄생을 축하받아본 기억이 없어, 생일을 기념하지 못해 안달 난 보통 사람들이 괴상하게만 보였을 터였다.
그럼에도 내게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관습일 텐데, 그 대상이 나라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도 상식선의 행동을 보이려 애쓴다.
그렇게 간신히 타인과 소통하기 시작한 시점.
버팀목이라 할 수 있는 내 존재를 바로 제거할 수는 없다.
진대수나 오현서처럼 친밀한 이들에게 일정 정도의 감정을 확신할 때까지는, 어울리지 않는 신 노릇을 해줘야 하리라.
내 경우에는, 손바울와는 정반대다.
양친이 돌아가신 것은 슬하에 지수가 태어난 뒤의 일.
나는 가정이 없는 시기를 단 한 순간도 겪어보지 못했다.
다만 생일이란 측면에서는 그와 꽤 비슷했다.
양친은 농사 절기를 외울 뿐 생일에는 무관심하셨다.
거기다 용돈이라곤 평생 몇 번 받은 기억이 없어, 친구들을 불러다 파티를 열기도 곤란한 형편이었다.
형편이 좀 피어 결혼에 성공한 뒤에도 마찬가지.
프리TV 타겟층인 1020의 인터넷 활용이 최고조에 달하는 방학 시즌에는, 거의 늘 야근에 시달려야 했다.
아내가 시간을 내달라고 해도 무시하기 일쑤.
그렇기에 평생 생일잔치를 경험해본 역사가 없었다.
나 역시 조용히 넘어가는 쪽이 편했다.
메신저의 생일 알림을 비공개로 설정하고, 부하직원들이나 진대수와도 생일 이야기는 피해왔다.
몰래 민증을 본 손바울이 아니었다면 올해도 축하 한마디 듣지 않고 넘어갔겠지.
물론 아내야 내 생일을 모를 수 없는 사람이지만……
그냥 넘어간 게 한두 해 일도 아닌지라, 이제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여보, 지수 쟤 진짜 어떡해야 될지 모르겠어.”
“지수? 왜, 무슨 잘못 했어?”
“민지네 고양이 봤는데 너무 예쁘다고, 키우고 싶대.”
“어…… 동물을 좋아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잖아?”
“그 동물 입장도 생각해줘야 될 일이잖아. 지수 2학기부터는 평일에도 학원 다니면서 거의 밤에나 집 올 거고, 나도 재단 일 챙기면서 낮에는 거의 밖에 있을 거고, 당신은 지금 한국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고. 무엇보다 우리 중에 반려동물 키워본 사람이 누가 있어? 당신도 키워본 적 없지?”
“고향에서 소랑 닭을 돌보긴 했었는데…….”
“에이, 외양간 양계장이랑은 다르지. 아무튼 그런 문제들이 있으니까 안 된다고 얘기해줬는데, 계속 고집을 피우는 거야. 그것도 입양은 싫고 분양을 받고 싶대. 민지네처럼 예쁘고 귀여운 아기고양이 분양받는 거 아니면 싫다는 거야.”
“저런. 민지네 고양이가 잘못했네.”
“내 말이. 지금은 나랑 싸우다가 일찍 잠들었는데, 내일 당신이 뭐라고 좀 해줘. 난 도저히 감당이 안 되네.”
“하하. 나라고 용빼는 재주는 없겠지만, 노력해볼게.”
그렇지만 이튿날 아침에 딸애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새벽 다섯 시까지 방송을 진행한 탓에 여덟 시쯤 눈을 뜨게 됐는데, 그때는 이미 친구 집으로 직행해버린 뒤였다.
“진짜 푹 빠진 모양이야. 오늘 종일 거기서 놀겠대.”
“지수가 일요일에 새벽같이 나가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는걸?”
“그래도 저녁엔 들어올 거야. 그때 얘기 좀 해줘.”
“알았어. 오늘은 다섯 시쯤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아.”
원래는 보육원에 가는 날이지만, 오늘은 세미나가 있다.
상담심리학회 하계학술연수.
제자로서 그 학회장인 한효준을 모셔야 하는 까닭에, 이수아의 픽업을 진대수에게 부탁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아침 일찍 향한 교수아파트.
한효준은 싱그러운 나무 그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아, 왔나? 오늘은 꼬마들이 없구만.”
“바울이는 계절학기 시험을 치르고 있을 겁니다. 지원이는 가족들과 워터파크에 갔고요.”
“그렇군. 흥. 오랜만에 오붓하게 둘이 이동하겠어.”
연세대학교로 향하는 동안, 스승은 뭔가 불쾌한 눈치였다.
그 내용을 단기상담 강연 뒤에 듣게 됐다.
“내 실은, 오늘 강사진에 자네를 넣고 싶었다네.”
“저를요? 간사님들이나 교수님들이 서는 자리 아닙니까?”
“그렇기야 하나, 단기상담이나 단회기 상담에 있어서 자네만 한 스페셜리스트가 또 어디 있겠는가? 경력의 길고 짧음에 무관하게 뭐라도 배워야 할 상황인 게지. 그런데 머리 굳은 노친네들이 그것까진 도저히 못 받아들이겠다고 한 게야.”
“머리가 굳은 것이 아니라,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흥. 한심한 일이 아닌가. 내담자를 위해서라면 삼척동자에게도 고개 숙여 배우려 애써야 하는 것이 상담사의 본분일진대, 체면과 허례허식에 사로잡혀 있는 꼴이라니.”
“좋게 봐주십시오. 내담자를 위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자격도 없이 그저 대중의 인기만 끈 것이 저라는 상담사의 실체입니다. 그런 이를 무작정 떠받들어 배우려 드는 것도, 상담사의 본분은 아닐 겁니다. 신중한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신중도 자격이 있는 자의 몫일세. 10여 회기를 상담하면서도 내담자의 신뢰를 사지 못하는 이들이라면, 대상이 천치라고 해도 하나라도 더 배우려 노력해야 마땅해.”
“제가 자격을 증명하는 일이 선행돼야겠지요. 지금은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입니다. 자격 없는 제가 비서라도 되는 것처럼 학회장님을 모시고 있는데도, 나쁜 시선이 없어요.”
학회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내게 호의적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상담심리사 모두의 자랑이 된 까닭.
몇 년이 더 흘러 자격증까지 취득하고 나면, 그때는 강단에 선다고 해도 환호로 반겨주지 않을까 싶었다.
이후 정오쯤 되어 한효준이 퇴장을 준비할 무렵.
오랜만에 조명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후배님, 한 선생님 잘 모시고 있죠?]
“예, 물론입니다. 지금은 학회 분들과 인사 나누고 계세요.”
[그렇구만. 아무튼 우리 후배님…… 참 멋지십니다.]
“제가 뭐 멋질 구석이 있겠습니까.”
[있죠. 이래저래 공부 많이 하신 눈치던데요? 요새는 거의 정신과 전문의라고 해도 믿겠어. 존경스러워요.]
잠을 줄이고 상담에 몰두한 지 거의 한 달.
그 과정에서 이용덕과는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아무래도 내 지식만으로는 민감한 케이스들에 대처하기 힘들었기에.
덕분에 신경전달물질 쪽으로도 최소한의 지식을 획득해, 상담에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더 나은 상담사가 되어가고 있다.
대학교에서 심리학과 학부 수업만 청강하던 때에 비해서는, 확실히 괄목상대할 면이 없지 않으리라.
그렇다고 자만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더 노력하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듣겠습니다.”
[하핫. 그런 태도까지 포함해서 존경해요. 어쨌든 오늘은 그거죠? 한 선생님 상견례.]
“상견례라기보다는…… 그저 식사 자리지요.”
[그게 그거지 뭐. 상상도 못 했어요. 평생 독거노인으로 살다가 가실 것 같던 한 선생님한테, 이렇게까지 관계가 진전된 연인이 생길 줄은. 임정희 여사님이랬나? 참 흐뭇합니다.]
아직 연인이라기엔 관계가 미적지근한 상황.
그래도 흐뭇해할 일인 것은 분명하다.
평생을 내담자들을 위해서만 살아온 한효준이, 뒤늦게나마 자신의 행복을 찾아 한 걸음을 뗀 순간이니.
그러나 조명기의 목소리는 말과 달리 진중했다.
이내 말의 내용 역시 그렇게 됐다.
습관처럼 약간의 말장난은 섞여 있었지만.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무슨 뜻인지 알아요?]
“예.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뜻 아닙니까?”
[아니지. 틀렸어요. 가정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거예요.]
“……아, 예.”
[하핫. 너무 짜증 내지 말아요. 이거 내가 처음으로 한 말장난 아닙니다. 무려 한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짜증이야 안 냅니다만…… 그분이 그런 말장난을요?”
[그럼요. 아마 박사과정 때 하신 말씀일 텐데…… 나는 서울대에 남아 있던 동기들 통해서 듣게 됐죠. 그리고 무릎을 쳤던 거야. 아, 한 선생님의 트라우마는 그쪽이구나, 하면서.]
조명기는 그저 추상적으로 짐작하고 있는 한효준의 과거가, 내게는 무척이나 현실적이다.
스승에게 지옥을 강제했던 인물의 시신을 직접 목격했기에.
각성제에 중독된 한중원은, 너무도 작고 볼품없었다.
폭력적이었다던 과거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예…… 가정은 범보다 무섭다. 틀린 말은 아닌 듯하네요.”
[그렇지, 그렇지. 그래서 한 선생님 계속 독신으로 늙고 계실 때도, 당연한 일이다 싶었어요. 결코 만족하실 분이 아니었으니까. 인격을 수양해서 세인들에게 마치 신선처럼 떠받들어지게 된다고 해도, 그분만큼은 가정을 꾸리지 않으시리라 믿었죠. 그런 걸 강요해버리시다니, 후배님은 정말 대단해.]
“강요라니요.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교수님께서 스스로 다른 길을 마음에 품으신 것뿐이지요.”
[이렇게 다 아니라고 해버린다니까. 그래요, 후배님은 그렇게 생각하시겠지. 난 누구도 구한 적 없고 자기들이 멋대로 구원받아버린 거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모양이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나 없으면 사람들 다 죽게 될 거라며 한탄했던 입장에서, 듣기에 몹시 민망한 이야기지만.
조명기의 그 이야기야말로 진리였다.
나는 누구도 구원하지 못한다.
심판이 그렇듯, 구원 역시 신의 영역이니까.
인간인 상담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다.
우리는 그저 곁에 서서 믿어줄 따름.
그렇게 도파민을 촉진함으로써, 나와 무엇도 다르지 않은 내담자가 스스로 나와 같은 결론을 도출하기를 기원한다.
그것이야말로 칼 로저스가 주창한 인간중심치료였다.
그러니 [오래된 구원]은 필요치 않은 것이다.
아직 어떤 효능인지 확인해보지 못한 기술이고, 300exp라는 값을 가진 만큼 분명 대단한 초능력이라고 짐작되지만……
구원이란, 사람과 사람이 매일같이 만들어가는 신화니까.
“예. 선배님 말씀대로,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저는 누구 하나 구원할 수 없습니다. 다만, 누구나가 구원을 향해 걸어가도록 앞에서 길을 열어줄 수 있는, 길잡이입니다.”
[하핫. 그래요. 그런 의미에서 한 선생님한테 내 얘기 좀 좋게 해줘요. 지난번에 동문들 싹 다 불러모은 뒤로 나한테 자기 얘길 안 하려고 그러더라고. 입 싼 녀석이라면서. 이러다가 나한테는 청첩장도 안 주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설마 그렇기야 하겠냐며 웃었다.
하지만 연세대를 빠져나가며 한효준의 심중을 떠봤을 때, 놀랍게도 조명기가 예상한 것과 동일한 반응이 나왔다.
“조명기? 그치는, 어디에도 안 부를 걸세. 내 장례식에도 못 오게 할 게야. 자네가 그 유지를 잘 이행토록 하게나.”
“……벌써부터 유지라니, 성급하십니다. 그리고 조 선배도 나쁜 뜻으로 그리 하지는 않았음을 아시잖습니까?”
“알지만, 짜증이 난다는 말이야. 제가 감히 뭐라고 내 행사에 간섭을 해? 그럴 수 있는 자는 한 명밖에 없는 것을.”
“아. 임정희 여사님 말씀이시지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겐가? 내게 이래라저래라 말해도 괜찮은 상담사는, 박대민뿐이라는 말이야. 가족 같은 사이니. 그리고 여사님이 다 뭔가? 자네하고는 나이도 동갑이고, 주선자잖나? 그러면 편하게 정희라고 부르면 될 것을, 쓸데없이.”
부친의 장례에 부를 친척 하나 없던 외로운 스승.
56년 평생 제대로 된 가정을 경험해보지 못한 그가, 나와 가족 같은 사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면 좀 민망한 일이려나.
다행히도 이내 송은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너무 일찍 도착했다면서 교수아파트 근처에 가볼 만한 곳이 있는지 묻는 그녀와 한참 떠들자, 눈물이 쏙 들어갔다.
경상도 사투리 억양의 경쾌한 울림 덕분.
한효준 역시 내가 통화하는 내내 흐뭇하게 웃었다.
전화를 끊은 뒤의 질문에는 얼굴을 붉혔지만.
“좋은 아이 아니냐니? 내 평가를 왜 묻나?”
“그야, 곧 은진이 아버지가 되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야…… 잘 이렇게…… 일이 된다면은, 그렇게 될 수도 없는 것만은 아니겠지만…… 어차피 남이야. 스물 몇 해를 모르는 사이로 살던 내가 어찌 아빠 행세를 할 수 있겠나?”
“행세가 아니라, 아빠는 아빠 아니겠습니까.”
“거,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니까. 임 여사하고도 얘기는 그런 식으로만 했어. 혹여 우리가 성혼을 하게 되더라도, 성인인 딸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 편할 것이라고.”
“그거야 은진이 얘기도 들어봐야 할 일이지만…… 벌써 거기까지 얘기가 되신 겁니까? 제 예상보다 한참 빠르신데요?”
“얘기가 된 것이 아니라…… 농담을 주고받은 거야. 어흠.”
“그렇군요. 그러면 수아 쪽은 어떠십니까? 그 아이도 내년이면 성인인데, 아빠 행세를 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그 아이에게는……”
한효준은 손에 깍지를 끼었다.
그리고 진중한 표정으로 룸미러를 바라봤다.
“내가, 세상 그 누구보다도 좋은 아빠가 되어줄 걸세.”
“그러십니까.”
“그래. 제자가 날 믿고 맡긴 아이인데, 사소한 슬픔이라도 겪게 만들쏜가. 내 모든 걸 걸고 지켜줄 생각이야.”
“그러시군요.”
“……뭘 그렇게 보나? 왜 또 충혈이 되는 게야? 못난…….”
못난 제자는, 이후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않았다.
교수아파트에서 다른 일행과 합류한 뒤로는, 아예 스승을 내버려둔 채 이수아와 함께 베란다에 나섰다.
“아저씨, 교수님이 계속 손짓해요. 들어오래요.”
“무시하면 돼. 엄마 찾는 아이의 칭얼거림 같은 거란다.”
“어…… 미소 찾는 수영이처럼요?”
“그래. 미소하고 꽤 친해진 모양이구나?”
“넹. 아뇨, 별로요. 그냥…… 애가 재밌어요. 근데, 진짜 그런 거예요? 교수님이 왜 아저씨한테서 엄마 찾아요?”
“그거야, 저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으셔서 그런 거지. 제대로 된 가정을 가져보지 못하신 분이거든. 뜬금없이 ‘썸녀’가 생기고, 그 딸과 예비 사위까지 포함해서 자기 집에 초대를 하게 됐으니까. 계획만 잔뜩 세워둔 머릿속이 새하얘지셨을 거야. 그러니 아저씨를 찾는 거지. 다른 면에서는 무엇 하나 교수님께 비할 바가 못 되지만, 행복한 가정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저씨가 정말 스페셜리스트거든. 수아도 잘 알지?”
“넹…… 맞아요. 지수 보면, 부러워요. 진짜 행복해 보여요.”
지수는, 행복한 아이다.
내 생일인지도 모르고 고양이 사달라고 찡찡거린다지만.
나는 그런 딸조차 좋아 견딜 수 없는 아빠니까.
분명 누구보다 선한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에 비해 한효준은 사랑받지 못하고 성장한 어른이지만……
나는 그를 믿는다.
내 존경하는 스승은, 세상 누구보다 멋진 가장이 될 것이다.
진대수와 송은진 역시 곧 행복해지리라.
베란다 창을 통해 막연히 그런 미래가 보였다.
갈등은 있어도 불행해질 수는 없는 아이들이다.
사랑받고 또 사랑하는 마음이, 행복의 문을 열어줄 테니까.
그러니 남은 것은, 이 아픈 손가락 같은 아이뿐.
“수아야. 너는, 지수만큼 행복해질 거야.”
“……그건 안 돼요.”
“돼. 분명히 돼. 아저씨를 믿어주렴. 아저씨를 믿고, 저 낯선 사람들을 믿어주렴. 저 사람들은 분명 수아 너를 행복해지게 해줄 거야. 그게 안 된다면, 아저씨가 수아 아들이다.”
“……넹.”
“그래. 믿어줘서 고맙다. 정말로.”
“근데…… 안 됐음 좋겠다. 우리 아들, 이리 와.”
지수만큼 작은 소녀가, 깨금발을 들고 나를 끌어안는다.
그 아이의 머리를 양껏 쓰다듬어줬다.
지수만큼이나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서.
나비라는 늙은 고양이가, 그런 우리를 보며 가끔 울었다.
그렇게 새 가정의 탄생을 바라보다,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예상치 못했던 행복에 맞닥뜨렸다.
“콩-글래-츌-레이션! 콩글래츌레이션! 아빠, 생일 축하해! 천만뷰도 축하해! 헤헤. 감동했어? 아빠 찡했어? 빠밤!”
암막 커튼 덕에 어둑어둑한 거실.
케이크를 든 아내와 폭죽을 터뜨리는 딸을 바라본다.
생일에 늦지 않게 귀가한 것이 몇 년 만이던가.
지금 나는 생애 처음으로……
사랑하는 가족들 앞에서 촛불을 끄고 있다.
“아빠 아빠, 이거 내가 아침부터 민지랑…… 어? 아빠 운다!”
“어머. 당신, 울어?”
“아, 아냐. 연기가 눈에 들어가서…….”
“그렇게 세게 불었는데? 참 대단한 연기네.”
“대단한 연기네! 아빠 연기자야?”
뭔가 좀 대화가 안 통하는 느낌인데.
그렇지만…… 마음이 통한다.
필로폰보다도 더 중독적인 각성제가, 행복을 선사한다.
그렇기에 다시금 다짐하는 것이다.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오아시스를 찾고야 말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