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진없는 상담사-2화 (2/200)

# 2

2장 - 상담사와 인방 (1)

보통 정상인들은 허공에 떠다니는 글자의 무리를 보거나 하지 않는다.

자기 능력치 같은 걸 읽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 성명 : 박대민 / 성별 : 남 / 연령 : 47

직업 : 상담사 Lv.2 (0/10)

관계 : 82 / 진단 : 49 / 화술 : 60 / 외모 : 45

성장 : 10

기술 : [인자한 웃음] 」

비정상이지. 비정상이야.

이런 걸 보면서 정상을 자부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길 한복판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미쳐버린 거다.

회사에서 잘리고 세상에서 버려진 듯한 소외감 속에서,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조현병 같은 것을 앓게 된 거다.

……아니, 잠시만.

병원에 가려고 택시 잡으려다가 다시금 생각을 가다듬었다.

나는 정말 미친 걸까?

멀쩡히 지내다가 심리상담을 마친 직후에 병을 얻었다?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글자가 보이는 것 정도라면 견딜 만하다.

적어도 그 외의 풍경은 늘 그랬듯 평범하니까.

내가 모른 척만 할 수 있다면 문제는 없을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성장’이란 문구에 눈길을 줬다.

어쩌면…… 꼭 모른 척만 해야 하는 건 아닐지도.

어떤 PC게임에서는, 레벨업을 하면 능력치에 투자할 수 있는 포인트를 준다고 했다.

내 경우가 혹시 그와 같은 거라면.

튜토리얼 완료로 2레벨이 되며 포인트를 얻은 거라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걸 안다.

하지만 일단 한번 생각하니 멈출 수 없었다.

어쩌면, 저게 혹시 정말 어떤 초능력 같은 건 아닐까?

난 미친 게 아니라 초능력자가 된 게 아닐까?

그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었다.

심호흡을 하며, 나는 ‘성장 : 10’을 노려봤다.

그게 위쪽으로 옮아가는 결과를 상상하며.

그리고 그렇게 됐다.

‘성장’이 0이 되고, ‘박대민’의 ‘외모’가 55로 변했다.

……거기까지였다.

다른 어떤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초능력인지 조현병인지 모를 숫자가 바뀌었을 뿐.

어휴.

뭐 하는 거냐, 박대민.

집에 가서 점심 준비나 돕자.

*

“……운동하고 왔어? 혈색 좋아졌네.”

아내의 말에 잠시 눈을 끔뻑거렸다.

꽤 오래 걸었으니 운동을 했다고 말해도 되겠지만……

이 사람이 내 외모를 좋게 말해주는 건 정말 오랜만인데.

“엄마, 누구야? 어? 아빠네? 뭐야. 얼굴에 뭐 발랐어?”

문지방에서 건네진 딸의 말에 또 눈을 끔뻑거렸다.

잠깐 걸었다고 혈색이 그렇게 좋아졌나?

하긴 뭐, 늘 책상 앞에만 앉아 있던 몸뚱이니…….

하지만 잠시 후에 아내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변화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당신 뭐야? 보톡스 맞았지? 언제 맞았어?”

“어……? 아닌데?”

“뭐가 아니야? 이마에 일자주름 어디 갔는데? 눈가도 그렇고…… 바람났냐? 회사 그만두니까 동안 소리 듣고 싶어?”

“당신도 참. 이상한 소리는.”

어색하게 얼버무린 뒤에 화장실로 향했다.

그렇게 거울 앞에 서자, 낯선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다. 낯설지는 않다.

매일 보던 느낌과 달라서 당황스러운 것일 뿐, 차분하게 살펴보면 분명 내 얼굴.

다만 아내의 말대로 시술을 받은 사람처럼 달라져 있었다.

사람의 외모는 혈색과 주름에 크게 좌우된다.

그래서 화장이 그토록 인상을 바꾸는 거지.

요즘 남자애들조차 BB크림 바르고 다니는 게 괜한 일은 아니어서, 했을 때와 안 했을 때가 확실히 달라 보이더라.

그 외에 눈썹을 정리하기도 하고 입술을 칠하기도 하고.

외모란 이런저런 방법으로 향상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내 얼굴은……

그 이런저런 방법 하나도 없이, 척 보기에도 좋아 보인다.

분명 초자연적인 변화였다.

그리고 나는…… 오늘 초자연적인 일을 하나 했다.

레벨업으로 얻은 포인트를 ‘외모’에 투자한 것.

그로써 내 얼굴이 변화한 것이다.

그게 아니고선 이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문자들을 바라봤다.

평소에는 시야의 주변부에 위치해 있지만, 내가 보겠다는 의지를 갖고 쳐다보면 초점이 맞춰지는 글귀들.

그 내용은 내게 분명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 튜토리얼 2 ‘상담자의 입장을 경험해보죠’ 」

……말하자면 퀘스트라는 거겠지?

게임을 즐기진 않았지만, 부하직원들에게 들은 얘기는 많다.

요즘 MMORPG에서는 튜토리얼 퀘스트를 통해서 최저한의 레벨을 맞춰준다고.

오전에, 나는 아마도 김지연과 상담하며 ‘내담자의 입장을 경험해보죠’라는 튜토리얼을 완수하게 된 것 같다.

그로써 10exp가 주어져 2레벨에 올라섰고.

거기서 얻은 10포인트로 외모를 55까지 올렸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일만 하며 늙어온 내 얼굴이, 꽤 어려지고, 좀 잘생겨졌다.

거기까지 생각한 뒤에 욕조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입을 막고 작게 웃었다.

맙소사.

정말이었다니.

미친 게 아니라, 게임 주인공이 된 거였다니……!

“뭐 하는 거야? 화장실 전세 냈어? 나와. 누가 잡아먹는대? 앞으로 쓸데없는 데 돈 쓰지 말라는 거야. 누가 당신 얼굴 뜯어먹고 사냐? 그런 거 해봤자 기쁘지도 않아.”

“어, 응. 미안해.”

……이건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되겠지.

잘은 모르겠지만, 나만 알아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에서처럼 적들의 습격 같은 건 모르겠지만……

내 아내는 비현실적인 걸 무서워하는 사람이다.

차라리 보톡스 맞았다고 하는 쪽이 받아들이기 편하리라.

그런 면에선, 난 이상한 놈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에 기뻐하고 있다.

두려워하거나 황당해하는 게 아니라.

오래 꿈꿔왔던 일을 이룬 것처럼, 행복해하고 있다.

내게도 취미란 게 없진 않았다.

게임도 안 하고 낚시도 안 다니는 아저씨지만.

넷플릭스로 보는 슈퍼히어로 영화는, 팀원들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혼자 먹는 식사시간마다 날 행복하게 해준 소중한 친구였다.

그렇기에 더없이 가슴이 뛰는 것이다.

그중에 RPG처럼 레벨업 하는 내용은 보지 못했지만.

히어로의 각성이라고 하면 모든 게 설명되니까.

만년부장이었던 내가, 히어로가 된 것이다.

그런 생각에 식탁에 앉아서도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

기계적으로 밥을 씹으며, 살짝 민망해졌다.

「 관계 : 82 / 진단 : 49 / 화술 : 60 / 외모 : 55 」

……저걸 히어로라고 하기엔 좀 그렇겠네.

관계, 진단, 화술, 외모.

어느 능력치도 히어로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건…… 말 그대로 상담사의 능력치였다.

내가 상담에 대해 많은 걸 알지는 못하지만, 팀원들을 리드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사회심리학 서적은 몇 권 읽었다.

거기서 가벼운 심리상담 얘기도 보게 됐던 것이다.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의 메커니즘에 대해서.

그 내용이 내 능력치에 잘 어울렸다.

‘외모’로 친밀감을 주고, ‘화술’로 이야기를 끌어내고, 그로써 내담자의 상태를 ‘진단’하는 것.

그리고 ‘관계’라는 건 아마 라포를 말하는 거겠지.

그게 철자가 rapport였나.

라포르 혹은 라포라고 읽는데, 사람들 사이의 신뢰관계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게 잘 형성되면 호의적인 반응과 함께 속마음을 이끌어내는 영향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나는 그 라포를 잘 만드는 편이었다.

팀원들에게 적용하려고 노력한 것도 있지만, 원래 그랬다.

나랑은 학번 차이가 많이 나서 얼굴도 몇 번 본 적 없던 과 선배가 창업에 동참시켜줄 정도로.

그 이후에 돈 아끼려고 사직을 권고하긴 했지만.

어쨌든 개인 간의 관계라면 정말 잘 형성해왔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82.

얼추 이해가 되는 수치였다.

다른 거야 뭐.

이제는 PT를 할 군번도 아니고 주로 듣는 쪽이 됐으니, 화술이 높지 않은 건 당연하고.

진단은……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어서 낮은 거겠지.

“뭘 그렇게 깨작거려? 밥맛이 없어?”

아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노려보고 있었다.

저 표정을 진단해보자면……

쓸데없는 데 돈 쓰는 백수 남편에게 화내는 것도 있겠지만, 약간의 염려 역시 담겨 있는 것 같다.

한 달에 열흘 이상 얼굴도 못 보는 남편을 15년 넘게 감내해준 사람.

말은 쏘듯이 하지만, 내 아내는 좋은 사람이다.

퇴직에 적응하지 못하는 날 그냥 두기가 힘든 거겠지.

이 진단이 정확할지는 모르겠다.

상태창의 49란 수치가 충분히 공감되는 관찰력이니.

그렇지만 내가 튜토리얼 2를 수행하고자 한다면, 저 사람 말고 다른 어떤 내담자가 있을까.

결혼하고 나서 작은 선물 하나 해준 적이 없었다.

부하직원들에게 보이는 호의의 절반만큼도 그녀에게 상냥하게 대해주지 못했다.

요 며칠도, 한심하게 그저 내 생각에만 골몰해 있었다.

“여보. 나 때문에 걱정 많았지?”

“……뭐래. 왜 이래?”

“걱정하지 마. 이제 정신 차릴게. 생각하는 게 있어.”

“그래? 정말?”

“아빠, 사업 같은 거 할 생각이면 하지 마라. 망하는 지름길이거든? 돈 버리지 말고 집에 가만히나 있어.”

아마 내가 나가 있는 동안 퇴직금에 대해 들은 모양이다.

적은 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업을 한다면 실패 이후를 대비하기 힘든 액수.

나 역시 그 돈을 함부로 쓸 생각은 없었다.

“그런 거 아냐, 지수야. 아빠가 생각하는 게 있어.”

“뭔데? 뭐 할 건데?”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아직은 어떻게 상담사가 될지 막연하기만 하다.

관련 전공자가 아니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핵심은 NBSC.

이 퀘스트가 어디까지 바라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만약에 상담소를 차리라고 하면 그쪽을 알아봐야 하고.

그게 아니라 최대한 많은 상담을 하라고 하면, 돈을 안 받고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게 나을 거고.

어떤 방식으로든 퀘스트를 해결해서 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능력치를 더 올린다.

이 나이에 잘생겨질 필요야 있겠냐만, 그 외에는 다르니까.

당장 ‘진단’과 ‘화술’만 해도 무척 유용하리라.

무슨 사업을 하든 상대를 읽고 설득하는 것이 기본이니.

그러니…… 우선은 두 번째 튜토리얼부터 마무리해야지.

식사를 마치자마자 그릇을 들고 싱크대 앞에 섰다.

아내가 황당하다는 듯 팔짱을 끼더라.

“웬일이야? 갑자기 왜 이래?”

“뭘. 설거지 자주 했잖아.”

“당신 혼자 먹었을 때나 한 거지. 그럼 내가 새벽에 일어나서 니 설거지 해주리? 아침에 싱크대 물기 보고서야 들어왔다는 거 알겠더라. 사람이 왜 그래? 우리가-”

“TV나 보고 있어. 과일…… 사과 있나?”

“……없어. 왜, 과일 먹고 싶어? 사올까?”

“아니, 당신 깎아주려고.”

“진짜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됐거든요?”

그러고서 거실의 쇼파로 가는 아내.

딸애는 이미 방문 닫고 들어가 있는 상황이다.

마침 좋은 여건이 형성된 것 같아서, 설거지를 마치고 주스를 따라서 쇼파로 가져갔다.

“좀 마셔. 갈비 맛있더라. 당신이 요리를 참 잘해.”

“웃기고 있네. 양념된 거 산 거야.”

“그래도, 내가 하면 맛이 다르더라고.”

“그거야 달랑 그것만 데우니까…… 휴. 뭐야. 할 말 해.”

“그런 게 아니라 진심이야.”

“당신 하루이틀 봐? 할 말이 있으니까 이러는 거 아냐?”

“그런 거 아냐. 그냥, 주희 네 얘기가 듣고 싶어서.”

진주희다.

당신이 아니라 진주희.

그렇지만 그 이름을 부른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바쁜 월급쟁이란 가정에 충실하기 힘든 존재다.

IT 쪽이 툭하면 야근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내가 특히나 일개미처럼 살아온 놈이라서.

새벽에 들어와서 몸만 좀 씻고 또 나간 적이 많다.

새 프로젝트 쳐낼 때 되면 한 달씩 얼굴 못 보기도 했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지.

아내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떨리는 것도.

“……왜 이래 진짜. 무슨 얘기? 나 뭐, 바람피울까 걱정돼?”

“그런 걱정은 안 하지.”

“왜 뭐. 나 이젠 매력이 없어? 요즘도 밖에 나가면 남자들이 쳐다봐. 알아?”

“알아. 그럴 것 같아.”

“뭐가 그럴 것 같아. 웃기고 있어 정말.”

“……지금도 예뻐. 처음 만났을 때처럼.”

라포 형성을 위한 거짓말……은 아닌가.

생각보다 수월하게 나오는 말은, 양심을 찌르지 않았다.

내 마누라가 이렇게 예뻤구나.

“뭐야. 한 10년 만에 들어보네. 참 대단도 하십니다.”

“미안해. 내가 좀 더 잘할게. 앞으로는…… 외롭게 안 할게.”

“누가 외롭대? 화상아, 걱정이나 끼치지 마. 내가 뭐 대단한 거 바래? 애한테나 잘해. 지수가 뭐라는지 알아? 뉴스에서 회사 잘리고 자살한 사람 봤다고, 아빠 걱정된다더라.”

그거 참, 별 걱정을 다 했네.

중학생 꼬마가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내가 몰려 있었나.

“근데…… 난 당신 믿어. 착해빠진 맹탕 같지만, 할 땐 하잖아. 내가 당신 왜 좋아했는데. 당신 소개팅 때 처음 꺼낸 화제가 뭐였는지 기억나? 나처럼 예쁜 아가씨 앉혀놓고, 당신네 새 프로젝트 설명했어. 미친놈인 줄 알았다니까. 그렇지만 그게…… 멋있기도 했어. 난 당신 믿어. 뭘 하든, 잘할 거야.”

그 순간, 들릴 듯 말 듯한 효과음과 함께, 글귀가 바뀌었다.

「 튜토리얼 2 ‘상담자의 입장을 경험해보죠’ 완료!

10exp와 [차분한 음성]을 지급해드렸어요.

그렇지만 그 메시지에 눈이 가진 않더라.

그냥 난, 진주희의 진주 같은 얼굴을 한참 바라봤다.

NBSC가 참 고마워졌다.

히어로 따위와는 다른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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