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1장 - 호구도 때로는 전진한다
「 < No Back Silver Challenge >
NBSC는 당신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합니다.
생의 두 번째 직업으로 ‘상담사’를 선택한 당신!
이제부터 NBSC와 함께 최고의 ‘상담사’가 되어볼까요?
튜토리얼 1 ‘내담자의 입장을 경험해보죠’ 완료!
10exp와 [인자한 웃음]을 지급해드렸어요.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볼까요?
튜토리얼 2 ‘상담자의 입장을 경험해보죠’ 발생! 」
하릴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심리상담소를 나서자마자 정신과로 향하는 게……
혹시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존경스러운 어른, 여유로운 신사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았다.
당장의 욕망을 죽이고 엉덩이를 꾹 붙인 채 사회가 가라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남한테 나쁜 말 한마디 안 하고, 늘 환하게 웃으면서.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호구가 됐다.
“박 부장. 그렇게 된 상황이니까, 잘 좀 부탁해요. 회사를 위해서 좋은 선례를 남겨줍시다. 그래줄 수 있겠죠?”
“크으! 아, 취한다. 야, 박대민이. 너 진짜 고생했어. 너 덕분에 회사가 여기까지 큰 거야. 정말 잘해줬어. 자, 쭉 마셔.”
“어떻게 이럴 수 있답니까? 부장님은 창업공신인데…… 어, 죄송합니다, 전화 좀. 네, 네 상무님. 예…… 알죠. 예, 들어가겠습니다. 부장님, 정말 죄송한데 급한 건이라…….”
“뭐? 이 인간아, 어떻게든 매달렸어야지! 나가달라고 해서 나가? 당신이 만든 회사잖아. 아이디어부터 홈페이지까지 당신이 다 짠 거라며. 근데 왜 잘려. 당신이 왜 잘리냐고!”
“아빠 짤렸어? 나 용돈은? 나 콘서트 못 가기만 해봐.”
“매형, 힘내요. 쉰 다 돼서 퇴직했으면 요즘은 뭐…… 행복한 셈이라잖아. 아무튼 요즘 진짜 괜찮은 종목이 있는데……”
추천종목이야 잘 모르겠지만, 맞는 얘기였다.
나는 참 운 좋은 40대.
2020년의 양극화 한국에서 서울에 자가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운이 없다고 말하면, 그건 기만이다.
90년대는 개천에서 용 나기 좋은 시대였다.
덕분에 재수도 안 하고 서울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00년에 통합된 서울대 컴퓨터공학부의 첫 번째 졸업자로서 과 선배의 스카웃을 받을 수 있었다.
그 행운의 출세길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은퇴의 때는 내가 정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인터넷 붐에 편승해 커뮤니티사이트를 기획하고 제작했던 게 나였던 건 맞지만, 처음에나 그랬다는 얘기다.
학사과정만 마치고 일선에 뛰어든 내가 뭐 특출했겠어.
점차 나중에 들어온 전문인력들이 대체하게 됐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커뮤니티사이트는 금세 사양사업이 돼버렸던 거다.
회사의 캐시카우가 스트리밍서비스 쪽으로 옮겨갔다.
그쪽으로 아는 게 없는 나로선 입을 대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직급은 차근차근 높아졌다.
어쨌든 함께 시작한 동료들이 경영진이니.
밑바닥부터 구르며 쌓은 노하우라는 것이 있기도 했고.
거기에 안주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본으로 무장한 대기업과 참신한 아이디어의 후발주자들이 추격하는 상황에서, 나 역시 고참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제일 애쓴 부분은 부하직원들을 지휘하는 리더십이었다.
팀을 하나로 만들고 창의력을 북돋아 아이디어로 구체화하는 것.
굳어버린 머리에 새로운 기술을 주입할 수 없다면, 주변을 이끄는 방식으로라도 회사에 기여하고 싶었다.
쉽지는 않더라.
요즘 애들이 좀 대하기 힘들어야 말이지.
아리스토텔레스도 요즘 애들 버릇없다고 했다더라만, 그런 게 아니라 21세기 초는 정말 격변의 시기였다.
내가 배워왔던 상식 전부가 올드한 것이 됐다.
그렇게 마인드가 전혀 다른 것도 있고, 그 이전에 신입들이 쓰는 요즘 말은 배우고 배워도 끝이 없었다.
그래도 노력한 보람이 있기는 했다.
여러 사정이 있어서 실적은 잘 안 나왔지만, 팀 자체의 분위기는 언제나 밝고 활기찼다.
괜찮은 관리직으로 자리매김했다고 믿었다.
이제는 20년 동안 근속하며 윗사람 노릇에도 익숙해졌다.
예쁜 아내 만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그놈의 아이돌 앨범 산다고 뜯어내는 돈조차 안 아까운) 딸도 낳았다.
가끔은, 아주 가끔씩은, 꿈꿔왔던 멋진 어른이 됐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냥 호구였다.
창업 때부터 함께했던 동료 중에서 남은 건 몇 안 됐다.
대기업 잠깐 다니다가 퇴사하고 학교 후배들 소집했던 과 선배가 여전히 대표이사고, 다른 셋은 이사가 됐고.
최고참 부장인 나까지 해서 딱 다섯 명.
사장은 처음부터 경영자 마인드였다.
애초에 남 밑에서 일하는 게 싫어서 창업한 사람이니.
동아리 선배였던 상사들은, 처음에는 실무에 힘을 쏟았지만, 이내 스탠스를 바꿔서 골프 치는 데 에너지를 쏟더라.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 회사의 창업정신을 지켜나갈 중간다리가 한 명은 있어야 한다고 믿어서, 나만큼은 언제나 사무실에 머물렀다.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나란 사람은, 석박사 출신인 차장들이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쓸모없는 고연봉자로 보였던 모양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부하직원들과 몇 차례 통화한 결과, 프로젝트에는 작은 지장도 없었다는 모양.
내가 없는데도 회사는 잘만 굴러가고 있다.
그리고…… 팀원들은 내게 무척이나 미안해했다.
이번 프로젝트만 끝나면 복직 운동을 하겠다나.
될 법한 얘기가 아니라서 딱 잘라 거절했다.
끝나고 소주 한 잔 어떠냐는 말은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프리월드’는 여전히 잘나가고 있다.
쓸데없이 세전 1억 받던 부장이 제 발로 나가준 덕분에 여유도 좀 더 생겼겠지.
그저 나만 낙동강 오리알이 됐을 뿐이다.
“이 화상아! 또 술 마셨어? 쇼파가 침대야?”
“아, 쇼파에서 냄새나. 술 냄새 짜증나!”
그리고 집에서도 나는 오리알이었다.
퇴직 후 첫 토요일이라 같이 나들이라도 갈까 했는데……
아침부터 두 여자한테 바가지만 긁혔다.
나는 뭐였을까.
회사에서, 이 집에서,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정말 그냥 호구였던 걸까.
“나가서 뭐 좀 해. 언제까지 집에만 있을 거야? 남자 나이 마흔일곱에 노인처럼 TV만 보고 살 거야? 답답해 진짜!”
대답할 말이 없어서, 머리 긁적이며 집을 나섰다.
*
사실은 집에서 TV만 보고 살아도 괜찮다.
모아둔 돈도 있고, 퇴직금도 적지 않게 받았으니.
일찍 찾아온 노후라고 생각하며 취미생활 즐겨도 되리라.
그렇지만……
아내의 의견을 논외로 하고 보더라도,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평생 일만 하며 살아온 놈이라서.
학창시절에는 공부가 일이었고, 군대에선 고참들이 시키는 게 일이었고, 회사에선 경영진이 시키는 게 일이었고.
이제 와서 일 없이 산다는 게 어디 쉽겠는가.
집에서 아내와 딸 눈치나 보는 건 우스운 모양새일 것이다.
하지만 이 나이에 새로 무슨 일을 할까.
자영업?
폐업률이 90%에 가깝다더라.
남은 재산마저 까먹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의미다.
그런 일에 도전적으로 달려들 만큼 내가 열정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남이 말 안 해줘도 잘 아는 부분이었다.
주식?
처남이 그쪽 업계에 있긴 하다.
딴에는 도와주겠다고 추천종목까지 일러줬으니, 앞으로 여의도 돌아다니면서 개미 노릇을 해도 좋겠지.
내 머리론 잘될 것 같지가 않아서 문제지만.
그리고 그런 걸 다 떠나서 다른 일을 할 엄두가 안 난다.
그저 무기력하고 공허한 마음뿐.
20년의 생업을 빼앗긴 헛헛함이, 당장 어떤 현실적인 미래도 떠올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냥 걸었다.
습관처럼 걸친 양복차림으로 걷고 또 걸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애들은 양복이 불편하다고들 하던데.
회사에 있을 때, 대표적인 IT기업으로서 우리도 캐주얼 복장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부하직원들이 적지 않았다.
나한텐 이게 편한데.
일종의 전투복이랄까.
츄리닝 같은 걸 입으면 역으로 더 불편할 것 같다.
왜, 무릎 튀어나오진 않을까 싶고, 배 나와 보일 것 같고.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합정역 인근을 지날 때였다.
심리상담연구소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그냥 괜히 거기에 꽂혔다.
심리상담이라.
저기 있는 건 의사일까?
그 사람은 내 답답한 마음을 치료해줄 수 있을까?
막연한 궁금증에 그 빌딩 주위를 뱅뱅 돌았다.
대뜸 들어가 상담을 받을 용기가 안 나서.
사지 멀쩡한 아저씨가 들어가면 눈총을 살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그게 세 바퀴쯤 되었을 때, 괜히 울화가 치밀었다.
나는 이렇게나 용기 없는 인간이었나.
평생을 호구로 살아왔으면서, 남부럽지 않은 돈과 시간을 가진 지금도 남의 눈치나 보고 있다니.
이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아직 뭘 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좀 더, 좀 더 당당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 생각에 입술을 꾹 다물고 계단을 올랐는데……
막상 문 열고 리셉션을 마주하자, 기분이 또 복잡해졌다.
“어서 오세요. 예약하셨어요?”
“아, 아닙니다. 해야 합니까?”
“처음 오신 건가요?”
“예…….”
“이쪽에, 작성부터 해주세요.”
그렇게 10분쯤 우물쭈물하다가 상담실에 들어섰다.
내 또래의 의사가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캐주얼하게 차려입은 젊은 여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박대민 씨? 처음 뵙겠습니다.”
“아…… 네. 김지연 선생님?”
“네. 이쪽으로 앉으세요. 편하게,”
“아, 예.”
생각했던 것과는 모든 게 달랐다.
햇볕이 잘 드는 넓은 창. 원목의 아늑한 가구들. 발이 폭신하게 놓이는 도톰한 카펫.
그리고 의사 같지는 않은 서른 즈음의 여자.
“저, 의사 선생님?”
“혹시 정신과로 알고 오셨어요? 그럼 잘못 오신 건데.”
“예? 아, 아닙니다. 그냥 잘 몰라서요.”
“상담심리사예요. 한국에선 좀 인식이 그렇게 돼 있죠? 어르신들은 으레 정신과 치료랑 비슷하게들 생각하시죠. 그런 건 아니에요. 마음을 토로하고,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에요.”
“……잘못 온 것 같네요. 그런 거야 뭐.”
“그런 거야 뭐…… 어떠신데요? 스스로를 잘 아세요?”
움찔했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나?
46년을 살며 내가 어떤 호구인지도 몰랐던 아저씨가?
“……저기, 제가 퇴직을 했습니다.”
“그러셨구나. 얼마 안 되셨나요? 옷이…….”
“아, 네. 습관이라서. 이게, 주말에도 출근하는 일이 많았죠. 프로젝트 때가 되면 휴일이라고 쉴 수 있는 업계가 아니라서……. 근데 이런 얘기를 왜 하고 있는 건지.”
“거기서 시작하는 거예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듣고 있어요.”
잠깐 쭈뼛거렸지만, 분위기가 너무 편안했다.
딱 좋은 온도와 딱 좋은 조명과 딱 좋은 습도.
편안하게 앉아서 나만 바라봐주는 청자.
그래서,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그랬어요. 성실하게 살았어요. 멋진 신사가 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명문대를 가고, 회사에 가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화요일에 퇴직을 했어요.”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였나요?”
“아뇨. 그만둬달라는 말을 들어서.”
“그랬군요. 갈등이 있었겠네요.”
“아뇨. 그냥, 그만뒀어요. 나가라고 하니까…….”
“아. 순응하셨네요. 그리고는요?”
“그리고…… 뭔가 해야 될 것 같은데, 할 일이 없어요. 찾아주는 사람도 없고, 찾아갈 사람도 없고. 그냥…… 그래요.”
김지연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가 되시나요?”
“후회……는 안 합니다. 잘 살아왔다고 믿어요. 나는…… 아니, 아니네. 잘못 산 것 같네요. 친구들도 안 만나고, 딸애한테 추억도 못 만들어주고, 그렇게 일에만 몰두했어요. 그랬는데 거기서 버림…… 버림받고 나니까, 이게 아니었나 싶고.”
“마음이 무거우셨겠네요.”
좋은 청자는 이야기를 쉽게 이끌어낸다.
나는 한참 동안 되는 대로 떠들었다.
배신감. 불안감. 열등감. 모멸감. 소외감. 패배감.
감정에 하나씩 이야기를 곁들일 때마다, 마음속에 똬리를 튼 응어리들이 풀려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
그 끝에는, 김지연으로부터 자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저희 아빠 생각나네요. 저도 그랬는데. HIT 좋아했거든요. 아빠한테 콘서트 같이 가자고 조르고…… 그랬죠.”
“싫진 않으셨을 겁니다. 아빠들은 그렇거든요. 딸이 좋아한다면 아이돌이든 뭐든 다 좋죠. 표현을 못 해서 그렇지.”
“아, 진짜 그렇더라고요. 돌아가시고 나서…… 유품 정리하는데, HIT CD가 있었어요. 나이 먹으면서 안 좋아하게 돼서 진작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갖고 계시더라고요. 처음으로 같이 사러 갔던 앨범이라서 그랬던 걸까.”
“선대인(先大人)께는 추억이었겠네요. 좋은 분이셨겠어요…… 아이고. 여기, 좀 닦아요.”
“……하하. 아, 뭐 하는 건지. 죄송해요. 상담자가 이러면 안 되는데. 이상하게…… 그냥 말이 나왔어요. 어쩌면 상담사를 하셨어도 잘 어울리셨을지 모르겠네요.”
그 얘기를 듣고 나오며, 무심결에 생각해봤다.
상담사라.
정말 그쪽으로 나가봤어도 좋았겠다 싶다.
남들 이야기 들어주는 건 정말 적성에 맞았으니까.
회사에서도 그랬다.
내 또래 경력직도 어린 신입들도 이야깃거리가 넘쳤다.
김지연처럼 자기 속내를 무심코 꺼내는 친구들도 많았다.
하지만 너무 늦은 얘기.
백세인생이라고들 하지만, 마흔일곱 먹고 뭘 하겠어.
그렇게 픽 웃던 때에, NBSC와 마주하게 됐던 것이다.
마흔일곱 먹고 새로운 직업에 도전하라는 튜토리얼과.
……엄밀하게 따지자면 그게 ‘상담사’는 아니었다.
나는, 상담 컨텐츠의 크리에이터가 되었다.
요즘 말로 ‘인방러’라고 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