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262화 (262/325)
  • 262화. 상납금

    “이것으로 이사회를 마치겠습니다.”

    이사장의 말과 함께 이사회가 종료되었다. 수십 명이 모인 이사회 임원들은 저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들은 차례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허리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회장님이라고 불러 드려야겠군요.”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나는 화진 그룹 이사회부터 참석을 했다. 이들의 주요 안건은 바로 회장직을 바꾸는 것이었다. 웬만하면 권오준을 계속 그 자리에 놔두려고 했는데,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려 하는 마당에 대기업 회장직이라는 타이틀이 조금 필요하긴 했다.

    권오준도 허수아비 짓은 이제 끝이라며 오히려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하긴, 그간 그는 내게 몇 번이고 회장직을 권고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회장이 되고 나서부터 피곤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나를 축하하기 위해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내 집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결국 예정에도 없던 축하연을 벌이기 위해 고급 호텔을 통째로 빌려야 했으며 대통령까지 내게 사람을 보내 귀찮게 굴었다.

    “대통령님께서 이번 일에 대해 관심이 아주 많으십니다. 회장님께서 허락을 내려주십사 하고 이렇게 제가 왔습니다.”

    대통령의 오른팔이라는 이대용 의원이 방문해 굽신거리기를 반복했다.

    이놈이 말하는 ‘일’이라는 것은 재작년에 김일중이 북한에 송금한 불법 자금을 뜻한다.

    대북송금사건이 터질 시기가 된 것이다.

    만약 김일중이 자신의 할 일을 똑바로 했다면 나는 조용히 이 사건을 덮고 가려 했다. 하지만 진보 진영은 이미 한번 내게 반기를 들었던 놈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이다.

    “조만간 각 언론사에서 대북송금사건에 대해 하나씩 터뜨릴 거야. 그때 정부가 잘 보조를 하면 돼.”

    “심하면 김일중 전 대통령의 구속까지 이뤄질 수가 있습니다만.”

    “솔직히 구속을 하든 말든 상관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민주화 운동의 얼굴이 되는 사람인데, 그렇게 막 다뤄도 되겠어? 괜한 저항 받고 싶지 않으면 진보 정당 몇 대 때리는 걸로 만족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대통령님께는 잘 말씀을 전달해 놓겠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김일중이 그나마 지금까지 지지율이 높았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북한과의 관계 개선 때문이다. 하지만 보수 진영은 북한을 무조건 물어뜯는 입장이지 않던가?

    연평 해전으로 인해 한바탕 난리가 일어나긴 했으나,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이 새로운 지도자가 되면서 남북 관계가 참 미묘하게 흘러가고 있다. 그래서 현 정부가 내게 묻는 것이다.

    이대로 관계를 따뜻하게 할지, 아니면 냉전시대처럼 차갑게 돌아설지.

    “북한과의 관계는 지금처럼 유지해. 어차피 그쪽도 여기 건드릴 정신이 없을 테니까. 요즘 북한에서 뭘 하고 있는지는 대충 알고 있지? 국정원에서 가져다 바치는 정보가 조금은 있을 거 아니야.”

    내 물음에 이대용 의원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구태여 베리칩이라는 이름은 꺼내지 않는다. 이미 내가 베리칩 사업을 굉장히 크게 벌이고 있다는 건 이창석도 잘 알고 있는 사실. 그의 오른팔이라는 이대용이 이 일을 모를 리 없다.

    “아직은 프로토타입에 불과해. 하지만 조만간 크게 발전하는 날이 올 거야. 그땐 우리나라도 의무적으로 베리칩을 박도록 만들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이번 5년 안에는 반드시 실현할 거야.”

    이번 5년 안에 실행한다는 말에 이대용의 표정이 더욱 좋지 않게 변했다.

    “회장님, 지금 당장 일을 실행했다가는 국민들이 크게 반발을…….”

    “이 의원.”

    착 가라앉은 내 목소리에 이대용은 하던 말을 멈추고 대답했다.

    “예, 회장님.”

    “자네는 이창석 그 양반 사람이야, 아니면 내 사람이야?”

    “…예?”

    “선택 잘하는 게 좋아. 5년 동안 허수아비 노릇할 사람의 동아줄을 잡겠다면 말리진 않겠어. 하지만 나는 아주 공정한 사람이야. 내게 개노릇 하던 놈은 그래도 챙겨준다는 거지. 그런데 다른 놈의 개노릇 하던 놈까지 챙겨줄 아량은 없어.”

    “회, 회장님.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시끄러. 내가 당신을 그 자리까지 올려준 건 이창석, 그 양반이 허튼짓 못 하게 감시하라고 붙여준 거야. 만약 너희 둘이서 짝짜꿍했다는 게 내 귀에 들어오는 순간, 넌 그날로 모가지 날아가는 줄 알아. 알겠어?”

    “예. 회, 회장님.”

    “그러니까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 그게 네 할 일이야. 싫으면 지금이라도 옷 벗던가. 너 말고도 할 사람 많아.”

    직설적인 말에 이대용은 얼굴이 벌겋게 변한 채로 대답했다.

    “전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회장님의 사람입니다. 제 충성심을 의심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면 입 닥치고 내가 시킨 대로 해. 국민 핑계대지 말고.”

    “예, 회장님.”

    “더 할 말 남았나?”

    “아, 사실은 이번 신용카드 대란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신용카드 대란은 1997년에 일어난 IMF의 여파로 인해 발생된 사건이다.

    2002년부터 2003년에 이르기까지 수백만 명의 신용불량자가 생겨났다. 나는 이 사건이 발생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화진 그룹 카드사를 정지시켜 놓아 피해를 면했다. 하지만 다른 카드사들은 발등에 떨어진 불을 해결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다.

    “이번에 화진 그룹은 큰 피해가 없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께서 자금난에 빠진 카드사들을 전부 인수하려 드신다고…….”

    “화진 그룹이란 이름으로 회수하려는 게 아니고, 외국 기업으로 전부 회수해 둘 생각이야.”

    “회장님, 그랬다가는 국민들의 반발이 크지 않겠습니까? 투기 자본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이대용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하지만 전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이라…….”

    뭐, 저 말대로 틀린 소리를 한 건 아니다.

    나는 골든 연합에서 운영 중인 외국 기업을 움직여 대한민국 카드사를 전부 쓸어버릴 작정이다. 왜냐고?

    신용불량자가 아무리 많이 생겨도 결국 이 나라는 카드가 없으면 살지 못하는 나라가 되어 버린다. 즉, 카드사를 독점하면 이 나라의 돈을 전부 쓸어 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내가 왜 이런 짓을 벌이려는 건지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겠지? 화진 그룹 이름으로 전부 다 카드사를 사버리면 나중에 비난의 화살이 누구한테 날아오겠어?”

    나는 악랄하다. 그렇기에 단 한 푼이라도 에누리를 해줄 생각이 없다.

    그 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신용불량자들에게서 돈을 받을 생각이라는 것이다.

    화진 그룹의 근본은 조폭이 아니던가?

    빌린 돈을 회수하기 위해 그들을 움직인다면 없는 돈까지 다 받아낼 수가 있다.

    2003년은 그야말로 조폭들의 황금기가 될 터.

    이때 수많은 고리대금업자가 나타나는 것도 전부 신용카드 대란의 여파 때문이다.

    하지만 무작정 돈을 받아내는 건 문제가 있다.

    수백만 명의 신용불량자들이 돈을 내놓으라고 조폭까지 보내는 화진 그룹을 욕할 것이 아닌가? 그럼 저절로 회장 자리에 앉고 있는 나도 그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그걸 피하기 위해 외국 기업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부에 잘 전달해 둬. 외국 기업이 들어오는 거 막지 말라고. 그게 무슨 투기 자본이다 뭐다 야당에서 뭐라 그러는 건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괜히 다 된 밥에 재 뿌려서 줄초상 나게 하지 마.”

    “물론입니다, 회장님.”

    이창석이 아니라 노현우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는 수백만 명의 신용불량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세금을 풀어내 버린다. 파산면책이라는 제도가 이때 처음 만들어지는데, 그 때문에 소비되는 세금 양은 가히 대단하다.

    물론, 그로 인해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숫자가 꽤 되긴 하지만, 그들의 근본이 바뀌겠는가? 이들은 아주 교활하게도 또 빚에 손을 댄다.

    악순환이 끊이질 않고 반복된다는 것.

    나도 면책 정책을 그다지 반대하진 않는다. 살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어느 정도 제한선을 둘 생각이다. 그래야 내가 못 받은 돈을 마구잡이로 쓸어 담을 게 아닌가.

    만약 제한선에 대한 조율이 복잡하다고 여겨진다면 아예 면책 정책을 없애 버릴 생각도 하고 있다. 그러나 빚쟁이에 시달리는 국민들은 정부에 호소하게 될 것이고, 그 원망의 대상은 오롯이 이창석과 여당이 될 터.

    간신히 잡은 정권인데, 신용카드 대란으로 민심을 잃을까 이대용은 괜히 겁을 먹고 있었다.

    “어차피 이번 사태는 어쩔 수 없어. 한 번은 꺾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야. 그러니까 하라는 대로만 해. 그럼, 서로 다칠 일 없을 테니까. 괜히 세금 허튼 곳에 썼다고 욕을 더 먹을 수도 있어.”

    참여정부 이후 대대적인 면책 정책 실행으로 세금을 허비했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다. 어차피 이래도 욕먹고 저래도 욕먹을 거라면 차라리 세금을 아끼고 이 기회에 내 주머니를 확실하게 불리는 게 낫지 않겠는가?

    본격적인 인수 작업이 시작되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들이 앞다투어 내게 카드사를 내놓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헐값으로 카드사를 살 생각은 없다. 나름 가격을 쳐주면서 완전 독점으로 이 나라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나중에 내게 카드사를 판 대기업들은 카드사를 다시 일으키려 해도 그럴 수가 없을 터. 그걸 내가 용납하고 넘어갈 리 없기 때문이다.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내가 우리 이 의원 힘내라고 트렁크에 박카스 좀 넣어놨어. 그거 마시고 열심히 일하라고.”

    그래도 몇 푼이라도 안겨줘야 힘이 나는 법이다.

    이대용은 자신이 원하는 걸 얻었다는 듯 환한 미소를 보이며 내게 넙죽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대용 의원이 나가기 무섭게 성일환이 안으로 들어왔다.

    “뭔 얘기를 그렇게 오래 했냐?”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을 보니 술을 많이 마신 모양이다.

    나이가 들어도 술에 쉽게 취하지 않는 저 양반의 간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할 정도다.

    “뭐, 진보 정당을 확실하게 죽이려고 각을 세웠더라고요. 김일중 정권이 대북에 자금을 송금했다는 걸 다 까발려 달랍니다.”

    “쯧쯧. 기어코 김일중, 그 양반을 감옥에 처넣겠다는 건가?”

    “그 정도까지 일을 키우진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민주화운동의 얼굴이 되는 사람인데, 또 감옥에 들어가게 하는 건 이미지상 좋지 않아요. 괜한 반발을 살 수도 있으니까요.”

    “이번 정권은 욕먹을 일이 참 많지. 우리가 베리칩 프로젝트를 실행하게 되면 이창석은 역사적으로 개새끼가 될 걸? 그뿐이야? 이번에 우리가 외국 기업 들여와서 카드사 전부 사버린 다음 밑의 애들 시켜서 돈 받으러 다니게 하면 장난 아닐 거다.”

    화진 그룹에서 관리 중인 조직폭력배들이 대대적으로 움직이게 되면 아마 볼만할 거다.

    성일환의 성격상, 장기를 털어서라도 돈을 다 받아오라고 할 테니,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이 입게 될 터. 하지만 그들을 위해 세금을 쓰는 건 아깝다.

    국민의 혈세는 어디까지나 대기업의 상처를 봉합하기 위해 모은 돈이 아니던가?

    하층민에 불과한 국민들을 위해 세금을 펑펑 쓸 정부는 이 세상에 없다.

    세금이란 공적자금이라는 명분으로 대기업과 정치인들이 나눠 갖는 돈이니까. 그렇기에 국민을 위해 세금을 쓴다는 건 대기업과 한번 싸워 보겠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그리고 ‘꽁돈’이나 다름없는 세금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세금은 국민의 돈이 아니라, 국민이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바치는 상납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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