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173화 (173/325)
  • 173화. 떠나가는 거목. (1)

    “요즘 뉴스에서 너랑 네 친구 이야기만 해서 아주 배알이 꼴릴 지경이야.”

    “아버님께서 원하시던 그림이 아닙니까.”

    “흐흐, 그렇지. 나한테 딸이 없었으면 너를 어떻게 우리 집안으로 끌어들였을지 원…….”

    병상에 누워 있는 권용일은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척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지 않은가. 이제 권용일의 삶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저를 끌어들이기보다는 없애 버리셨겠죠.”

    “하하! 역시, 넌 너무 나를 잘 알아.”

    농담 반 진담 반에 권용일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태산아.”

    “예, 아버님.”

    “난 네가 참 좋다. 그리고 네가 우리 화진의 든든한 대들보가 되어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저도 항상 아버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저를 보석으로 다듬어주셨으니까요.”

    “자식, 얄미운 놈이 꼭 이럴 땐 아부를 해요. 그러니까 내가 널 여기까지 끌고 왔지.”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패기 넘치는 목소리를 자랑하며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내뿜었던 권용일. 하지만 이제 생명의 불빛이 꺼져 들어가는 처량한 노인의 모습만이 남았다.

    이런 권용일의 모습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지금 당장이라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화통을 삼킨 목소리를 낼 것 같은데…….

    “저… 면회 시간이 다 됐습니다.”

    주치의가 조심스레 다가와 면회 시간이 끝났음을 알렸다.

    “거참 그 양반 깐깐하네. 우리 새끼들 얼굴 보는데 시간을 좀 더 주면 어디 덧나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시간을 드렸어요. 여기서 더 드리면 몸에 무리가 갑니다.”

    병원에서는 의사의 말을 듣는 게 좋다.

    나는 맞잡은 권용일의 손을 부드럽게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계신 선생님 말씀대로 하세요. 안정이 최우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얼른 쾌차하고 오랜만에 저와 산책도 하셔야죠.”

    “그래, 집에 맛있는 양주도 가득 있는데, 그걸 너랑 먹지 않을 수 없지.”

    산책과 술이라…….

    과연 그게 가능할까.

    권용일의 생은 이제 곧…….

    왠지 뒷맛이 씁쓸해진다.

    나는 권용일의 배웅을 뒤로하고 VIP입원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왔어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복도 의자에 앉아 있던 권윤아가 일어나 나를 맞이해 주었다. 하지만 권윤아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용일의 자식들. 그리고 그 집안에 엮여 있는 친척, 조카 할 것 없이 모두가 이 자리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부회장님. 저는…….”

    이들은 정말 권용일을 걱정해서 온 것인가. 아니면 한번이라도 내게 눈도장을 찍고 싶어서 온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권용일이 남기는 유산 때문에?

    “회장님께서도 들어가 보시죠.”

    “아, 예. 그런데 부회장님께서는 이제 돌아가시는 겁니까?”

    “내일 또 올 겁니다.”

    내일 내가 또 온다는 말에 나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저들도 분명 내일 이 시간에 올 것이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모두 내 뒤통수에 대고 허리를 굽혔다.

    나를 죽음으로 몰았던 권 씨 집안의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내게 고개를 숙인다.

    이정도면 복수 성공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권용일의 죽음은 아무래도 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든다.

    한낱 깡패 두목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어쩔 수 없이 그쪽에 완전히 물이 들어버린 걸까.

    * * *

    “오랜만입니다, 형님. 정말이지 어떻게 하나도 안 변하셨습니까?”

    “그런 말을 네가 하면 어떡해. 그나저나 뉴스 잘 봤다. 아주 인물 걸쭉하게 잘 나왔던데? 돈 좀 썼더라.”

    몇 년 만에 본 황규혁의 얼굴은 여전했다.

    유쾌한 그 성격도 변하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확실히 달라졌다.

    예전보다 무게감이 더 깊어진 상태라고나 해야 할까.

    일본에서 조직을 키우기 시작한 황규혁.

    그는 지금 야쿠자계에서 신성이라고 불릴 정도의 조직을 단기간에 만들어냈다.

    “그런데… 큰 형님께서는 상태가 어떠시냐?”

    “미리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무래도…….”

    “쳇.”

    황규혁은 담배 하나를 물고 불을 붙였다.

    “앞으로 100년은 더 사실 것 같았던 분이 설마 이렇게 되실 줄은 몰랐다.”

    “영원한 권력이 없듯이, 생명도 그렇지 않습니까. 안타깝지만, 마지막까지 저희가 잘 보필해 드려야죠.”

    그는 나를 슬쩍 쳐다보더니 길게 빨고 있던 담배를 뗐다.

    “그래도 네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 천성 그룹 초대 회장 이철호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큰 형님이 먼저 생각나더라고. 나이가 있으신 만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이철호는 병색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급사를 하는 바람에 천성 그룹에서도 한동안 난리가 났었다. 그래도 다행히 이강혁이 미리 회장 자리를 꿰차고 있어서 큰 혼란은 막을 수 있었다.

    그 양반도 나름 복이 있었다고 해야 하나.

    내게 천성 그룹이 홀라당 넘어간 걸 두 눈으로 보진 않았으니 말이다.

    “일단 가실까요?”

    “그래, 큰 형님 만나 뵙고 우리도 따로 해야 할 이야기가 길어.”

    난 황규혁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본격적으로 일본에서 영향력을 넓히려는 것인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집 나간 탕자가 돌아왔구먼!”

    “하하하! 큰 형님. 너무 오랜만에 얼굴을 보여 드리는 것 같아 송구합니다.”

    “이놈! 진작 올 것이지. 뭘 그렇게 굼벵이처럼 뜸을 들이다 왔어!”

    “죄송합니다. 그래도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아주 정정하시네요.”

    “당연하지! 나 권용일이 이딴 병석에서 오래 있을 거 같냐?”

    권용일과 황규혁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만큼은 권용일의 혈색도 꽤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흐르니 권용일은 말을 하는 것도 점점 힘들어하는 듯했다.

    “큰 형님. 내일 또 찾아뵙겠습니다.”

    “뭘 또 오려고 해. 쪽팔리니까 나 다 나으면 와! 알겠어?”

    “하하. 예, 큰 형님.”

    황규혁은 병실 밖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병실 문이 닫히자마자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벽을 주먹으로 쳤다.

    “젠장!”

    “…형님.”

    차마 보기 힘든 장면을 봤다는 듯, 황규혁은 절망 어린 표정으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정정했던 권용일이 저렇게 망가졌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려나.

    “내 실수였어. 내가 곁에 계속 있어드려야 했던 건데. 나 혼자만의 욕심 때문에…….”

    “형님, 자책하지 마세요. 누가 있더라도 결과는 똑같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큰 형님이 저렇게까지…….”

    황규혁은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울컥 삼켜 버렸다.

    그만큼 세월에 대한 무정함이 분노로 치밀어 오르는 것이리라. 하지만 인생이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세월은 흐르고 그 세월에 따라 인간의 삶이 결정된다.

    권용일도 누구나 한 번은 반드시 맞이해야 하는 그때가 온 것일 뿐.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저, 저기……. 괜찮으신 건가요?”

    권윤아를 비롯해 병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권 씨 일가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규혁은 풀어진 넥타이를 다시 올곧게 정리한 다음 말했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여러분. 그리고 재수 씨,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아, 네. 그간 강녕하셨어요?”

    황규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유쾌한 분위기로 돌아갔다. 그러나 구석탱이에 밀린 어두운 얼굴빛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 * *

    “여긴 오랜만인데. 다 폐업시킨 줄 알았더니.”

    “저희가 어떻게 대한민국의 거리를 장악했는데요. 아무리 화진 그룹이 되었다고 해도 이 거리를 포기할 순 없죠. 그래서 이름만 바꾸고 운영은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화진파가 화진 그룹으로 탈바꿈하면서 그간 운영하고 있던 나이트부터 마약굴까지 전부 이름만 바꿔 운영을 해왔다.

    지금은 화진파가 아닌 대원파.

    그 외에도 여러 가지의 파를 만들어 분산된 조직 체계를 구축해 놓았다.

    어느 한 곳이 단속에 걸려 박살이 난다고 해도 다른 곳이 멀쩡하니 전체적으로 무너질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구도를 잡기가 힘들긴 했지만, 나는 오랫동안 검찰청에서 뒹굴던 사람이 아니던가. 법망을 피해 마음대로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틈을 만들어놓는 건 내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형님, 그런데 하실 말씀이 있다는 건…….”

    “너도 이미 눈치채고 있을 텐데. 정기적으로 일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받고 있다며?”

    일본뿐만이 아니다.

    나는 매일 전 세계에서 날아오는 소식을 받고 있다. 일본도 그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민감한 시기이니, 좀 더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예,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형님께서 세우신 니치카야 카이의 성세가 대단하다고 하죠? 이러다 야마구치 구미를 껑충 뛰어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전혀 그렇지 않아. 야마구치 구미만 해도 속해 있는 조직원들 수가 1만 5천이 넘어. 그 외의 숫자까지 합치면 3만은 족히 넘을 걸?”

    “니치카야도 숫자가 꽤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황규혁은 술잔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힐끗 미소를 지었다.

    “다 조사를 해보신 모양이네.”

    “예, 형님과 관련된 일이니까요.”

    “맞아. 나도 꽤 숫자를 늘렸지. 5천 명 정도로.”

    5천 명이라.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역시, 한국과는 차원이 다른 스케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야마구치 구미의 조직원 수는 1만 5천. 즉, 세 배 이상의 차이가 나는 규모다.

    “우리가 좀 딸리긴 해도, 밀린다고 볼 수는 없을 거야. 양보다는 질이니까. 그리고 야마구치와 우리가 꼭 싸울 일이 있는 건 아니잖아?”

    “예, 그렇긴 하죠. 그래도 조심하십쇼. 그러다 형님이 다치기라도 하시면…….”

    “괜한 걱정이야. 내가 설사 뭔 일이 나서 죽어버리면, 그때 네가 가만있겠어?”

    날 그렇게 신뢰하는 건가.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황규혁이 누군가의 손에 죽는다는 말을 들으면, 난 분명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를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것이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지금 황규혁이 내 도움을 받게 되면 야쿠자들의 판도를 뒤엎는 것은 더 수월해질 것이다.

    일본 전역을 두려움에 떨게 하며 거기를 지배해 온 3대 조직의 균형도 와해된다는 것. 그렇기에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황규혁에게 내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도움의 손을 내밀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하지만 황규혁은 단호하게 내 지원을 거절했다.

    “형님, 혹시…….”

    “자존심 때문이라고? 야. 정말 내가 자존심을 내세웠다면 넌 진작 영등포에서 나가리 됐어. 알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황규혁이 자존심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럼 도대체 왜…….”

    “당연하잖아. 네 도움을 받았다가는 앞으로도 계속 네 도움을 받아야 돼. 내 힘으로 꺾지 않으면 조직이 완전하게 설 수 없다는 거야. 물론, 힘들긴 하겠지만 그래도 나와 내 조직이 넘어야 할 산이야. 절대 포기하지 않아.”

    조직의 확고한 자립심을 위해, 험준한 산을 넘으면서 끈끈해질 조직력을 위해 내 힘을 거절한다는 건가. 그렇다면 불안하긴 하지만 나도 말릴 생각은 없다.

    “조금이라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으면 전 언제든지 제 사람들을 투입시킬 겁니다.”

    “뭐, 나도 보험 든다고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가볍네. 고맙다, 동생.”

    세력의 판단을 뒤엎는다면, 골든 연합에 속해 있는 와타나베에게 조금 미안할 일이다. 그렇다고 그를 감싸고 돌 이유는 없다. 그리고 그쪽 나라의 사람들에게 내가 미안한 감정을 가져서 뭐에 쓰겠는가.

    이 나라에서도 냉정하게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마당에, 그쪽 나라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니치카야가 일본의 거리를 장악하게 되면 그땐 연합에 들어와 주십시오.”

    “하하, 물론이지. 동생이 있는 곳이라면 이 형도 같이 가야지.”

    황규혁은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로 보였다.

    말로는 험준한 산이라고 표현했지만, 저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다.

    모든 걸 완벽하게 준비했다는 것을.

    그렇다면 이제 꼭 야마구치 구미가 필요하지 않게 된다는 말일 수도 있다.

    일본이 한국인의 손에, 그것도 황규혁의 손에 들어간다라.

    아주 재미난 광경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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