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다시 만남.
“태혁아, 다음 경기 준비 잘하고.”
“오자마자 바로 가는 것 같다? 좀 더 있다가 가지그래.”
태혁이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제 여기서의 일은 모두 끝나지 않았던가.
내가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다.
“미안. 또 올 테니까, 기다려.”
“그래, 자주 와.”
“도련님, 또 봬요.”
“예, 형수님.”
나는 태혁이 다음으로 로이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로이.”
“걱정하지 마, 보스. 골든 마피아 쪽이랑도 말을 잘할 테니까.”
“예, 둘이 싸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 몰라? 난 먼저 물지 않는 이상 절대 싸우지 않아.”
로이와도 이야기는 끝났겠다, 마지막으로 강철중과 김아름이 있다.
“두 분께는 특별히 할 말이 없군요. 제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시는 분들이니까요. 그럼, 제가 돌아올 때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편안한 여행되십시오, 사장님.”
“안녕히 가십시오.”
둘의 인사까지 받고 나는 권윤아의 손을 잡았다.
“이제 들어가자.”
“응.”
나와 권윤아는 여러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우리가 향하는 곳은 한국이 아니었다.
“갑자기 일본으로 가자고 할 줄은 몰랐어.”
“미안해. 진작 얘기를 할 걸 그랬네. 일본은 가본 적 있어?”
“두 번 정도? 그런데 딱히 가고픈 곳은 아닌데, 태산 씨가 가겠다고 하니까…….”
“고마워. 대신, 한국 돌아가서 내가 선물도 많이 사줄게.”
권윤아는 기분 좋은 미소를 얼굴에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비행기가 하늘 위로 높게 뜨면서 나는 어느덧 스르르 잠이 들었다.
* * *
“김태산 씨?”
일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반기는 것은 정장을 잘 빼입은 신사들, 아니, 야쿠자들이었다.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겼지만, 저들이 풍기는 기운은 결코 일반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저렇게 떼로 다니면서 정장을 입고 있으면 보나마나 야쿠자들이 맞다.
“예, 바로 접니다.”
권윤아는 워낙 이런 일이 익숙한지, 당황하는 표정도 짓지 않았다. 이래서 내가 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안녕하십니까. 쿠미쵸께서 보내셨습니다.”
미리 연락을 주고 오길 잘했다. 이렇게 사람들까지 보내주고.
쿠미쵸라면 누구겠는가?
옛날에 내가 닌텐도 문제로 일본에 왔을 때 인연을 맺은 사람이다.
쿠미쵸란 곧 야쿠자 조직의 보스를 뜻하며, 일본 최고 조직으로 꼽히는 야마구치 구미의 쿠미쵸는 바로 와타나베다.
“쿠미쵸께서 기다리십니다. 편안하게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나는 공손한 자세로 우리를 인도하는 야쿠자들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
“일단 호텔로 모실까요? 도쿄 최고의 호텔을 잡아두었습니다.”
“예,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권윤아를 데리고 야쿠자 두목을 만날 순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다니엘 로페즈야 태혁이 경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났다고 해도 야쿠자까지 대면하게 할 필요는 없다.
“윤아야, 너는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어.”
“많이 늦어?”
“음……. 아주 늦진 않을 거야. 같이 저녁은 먹어야지?”
“그래, 알겠어. 대신, 몸조심하고.”
이래서 권윤아가 참 편하다.
그녀는 나의 직업이 뭔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제 아버지가 깡패 두목이다 보니, 이런 일에는 아주 익숙하다.
어리광을 부리며 때를 쓸 만도 한데, 그러지 않는 것을 보면 참 고마울 따름이다.
“그럼, 다녀올게.”
“잘 다녀와.”
나는 권윤아를 호텔에 내려주고 바로 와타나베가 있는 곳으로 떠났다. 목적지는 어디인지 아직 들은 바가 없다. 혹시 내가 아는 그곳으로 가려나?
“쿠미쵸께서 혹시 일식집에 계십니까?”
“아, 알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야마구치 구미가 운영하고 있는 전통 일식집입니다.”
아무래도 내가 아는 그곳이 맞는 것 같다.
옛날에도 나는 와타나베와 종종 그 일식집에서 만나지 않았던가.
호텔과는 거리가 좀 있는지, 1시간 정도 차가 달리다 이윽고 멈춰 섰다.
“이곳입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나는 정중한 인도를 따라 일식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야쿠자들이 험준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는데, 언뜻 봐도 다들 긴장감이 높아 보였다.
이 정도로 경계를 삼엄하게 해놓는 것을 보면, 역시 그때가 된 건가?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내게 좋은 신호를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하하-! 이게 누군가?”
드넓은 미닫이문이 열리기 무섭게 와타나베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쿠미쵸.”
“아니, 그새 일본어 공부라도 한 건가? 저번에는 통역사를 끼고 오더니.”
“하하. 오래전부터 공부를 좀 해왔습니다. 그땐 아직 수준이 안 돼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거죠.”
“그랬나? 아무튼, 정말 오랜만이군! 어서 안으로 들어오게.”
격하게 나를 반기는 와타나베의 손짓에 난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작은 잔에 술부터 따르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과연 언제쯤 자네가 다시 일본에 오는 것인지 기다리고 있었어.”
난 홀짝 술잔을 들이켰다. 저것 또한 내게 보내는 일종의 신호인가. 그렇다면 그 신호를 무시할 순 없지 않은가.
“그러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저도 쿠미쵸께서 저를 애타게 찾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으응? 허허, 내가 자네를?”
“…아닙니까?”
나의 은근한 물음에 와타나베는 크게 헛기침을 한번 뱉었다. 그러다 속이 타는지 술로 쓰린 속을 달랬다.
“이미 다 알고 온 건가?”
“현재 야마구치 구미에 내부적인 문제가 많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음…….”
와타나베는 말없이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현재 야마구치 구미는 아주 큰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와타나베 요시노리가 야마구치 구미를 다스리고 있긴 하지만, 그는 각 구역을 나눠 그곳에 있는 두목들에게 큰 권한을 부여했다. 이것은 카리스마적인 1인 체제로만 조직을 운영해 오던 야마구치 구미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하나, 문제는 이것이 와타나베에게 독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는 점이다.
“자네가 알고 있는 게 뭔가?”
유치하게 기 싸움을 하자는 건가. 그냥 속 시원히 다 털어놓으면 되는 것을.
“각 구역에 있는 두목들 중 쿠미쵸의 명령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일으키려는 자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계시지 않습니까?”
와타나베의 시도는 아주 괜찮았다. 분권제를 통해 야마구치 구미가 각 구역을 더욱더 원활하게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구역을 맡은 두목들이 절대적인 충성을 보여야 가능한 일이다. 만일 그들이 서로 다른 마음을 품게 된다면?
그건 그야말로 삼국지의 군웅할거와 다름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서로가 왕이 되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조직의 와해를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네 말대로 두목들 사이에 반기를 품은 자가 있어. 거기다가 산하 조직인 나카노 카이가 이미 우리에게서 등을 돌렸고.”
나카노 카이는 야마구치 구미의 산하 조직으로 나름 힘을 키워, 분산 체제 중인 야마구치 구미를 몰아낼 의도를 품고 있다. 실제로 그들은 와타나베 암살 계획까지 갖게 되는데, 아직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조만간 그들이 암살자들을 보낸다.
물론, 와타나베가 그들 손에 죽진 않지만 야마구치 구미의 간부들 몇이 죽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나카노 카이와 손을 잡고 있는 두목들이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
“알다마다. 두 명의 두목과 15명의 간부들이 이미 그쪽에 붙었어. 조만간 크게 한 방 터뜨려야 할 것 같긴 한데…….”
나는 와타나베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정부의 눈치도 보이고, 이 일로 야마구치 구미가 크게 흔들릴 것을 염려하시는 것 아닙니까? 이미 크게 홍역을 치른 곳이니까요.”
야마구치 구미는 거대한 조직인 만큼, 차기 쿠미쵸를 뽑는 것에 민감하다. 그래서 그들은 고위 간부들의 선거를 통해 쿠미쵸를 뽑는데, 제4대 쿠미쵸의 후보였던 다케나카는 라이벌인 야마모토 히로시를 경합에서 이겨 쿠미쵸가 되었다.
하지만 이에 불복한 야마모토 히로시는 이치와 카이라는 독립 세력을 만들어 6,000명에 달하는 조직원들을 빼 가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다.
그 결과 야마구치 구미는 이치와 카이와 대전쟁을 벌이게 되었으며, 제5대 쿠미쵸인 와타나베 때에 이르러 종결이 났다.
두 세력의 전쟁으로 인해 1년에 500억 엔이라는 돈이 날아갔으며,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 결과, 그동안 야쿠자들을 방관하고 있던 정부가 나서기 시작했다.
국민들도 야쿠자를 몰아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점점 야마구치 구미의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자업자득이라는 것.
“아직 이치와 카이와의 전쟁에서 얻은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어. 그런데 이때 또 한 번 큰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그땐 모든 게 끝이야. 야마구치 구미는 붕괴된다고!”
와타나베의 말처럼 야마구치 구미는 나카노 카이와의 전투로 인해 더욱더 세력이 약해진다. 그리고 제5대 쿠미쵸 와타나베는 그냥 자리만 쿠미쵸일 뿐,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해 자리만 지키는 꼴이 된다.
“그럼, 도움이 필요하시겠군요.”
“그래, 혹시 가능하겠나? 리턴 컴퍼니의 영향력으로 정부를 움직여만 줘도 괜찮아. 정부가 터치를 하지 않는다면야…….”
“아뇨, 그건 그냥 시간만 끌 뿐입니다. 문제의 핵심을 도려내야지요.”
“핵심을 도려내?”
와타나베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내가 그에게 달콤한 유혹을 건넬 차례였다.
“쿠미쵸께서는 야마구치 구미의 확고한 안정성과 영향력을 원하지 않으십니까?”
“당연하지. 그렇게만 된다면 뭐든지 하겠네.”
“그렇다면 얘기가 더 수월해지겠군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난 슬쩍 미소를 보였다. 와타나베는 내 제안을 절대 거절하지 못한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거대한 연합체를 구성 중에 있습니다.”
“연합체?”
“예, 그것도 무려 메데인 카르텔과 골든 마피아가 주도하는 연합이지요.”
“뭐, 뭐야?!”
메데인 카르텔과 골든 마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와타나베는 경기를 일으킬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둘은 물과 기름 같은 존재잖아.”
와타나베도 두 조직의 성질을 잘 꿰뚫고 있었다. 그만큼 둘은 섞일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아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어코 그 둘을 하나로 이어주었다.
“예. 그렇긴 합니다만, 섞으려고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섞을 수 있습니다. 그건 야마구치 구미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설마… 자네…….”
이쯤 말했으니 대충 알아들은 것일까? 확실하게 못을 박아줘야 할 때가 됐다.
“우리 연합의 손을 잡으십시오. 그럼, 모든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연합의 손을 잡아? 그 말은…….”
“곧 세계를 지배하게 될 우리 연합에 들어오란 뜻입니다.”
세계를 지배하게 될 연합!
이것은 결코 망상적인 일이 아니다.
이미 메데인 카르텔과 골든 마피아가 힘을 합치지 않았던가?
그것만으로도 미국 전역이 흔들릴 것이다.
“야마구치 구미를 연합에 넣겠다?”
“예. 연합에 들어오는 즉시, 메데인 카르텔과 골든 마피아의 조력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와타나베가 우리 연합에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보상이 무엇인지, 현실적인 물음을 던졌다.
난 내가 갖고 있는 솔루션을 제공해 주었다.
“쿠미쵸에게 도전하는 모든 사람들을 말끔히 제거해 드리겠습니다.”
“…뭐?”
“야마구치 구미에 도전하고 있는 조직들부터 시작해 그곳의 두목들과 간부들까지 전부 제거해 드리겠다는 겁니다.”
꽤 충격적인 답이었는지 와타나베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연거푸 술 세 잔을 들이켠 다음 입을 열었다.
“정말 가능한 일인가?”
“예. 대신, 일본으로 넘어올 수 있는 루트만 주신다면 우리 쪽 사람들이 이곳에 넘어올 겁니다.”
“허…….”
와타나베는 허탈한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나는 그의 답을 기다렸다.
그의 대답이 떨어지는 즉시, 나의 사람들이 일본으로 넘어와 이 땅을 피바다로 만들게 될 것이다.
“나는…….”
마침내 무겁게 닫혀 있던 와타나베의 말문이 트였다.
“자네의 뜻에 따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