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왕을 죽이는 자 (2)
89년 새해가 밝았으나, 나는 여전히 미국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새해가 찾아오면서 나는 그동안 계획하고 있던 일을 실행하게 되었다.
“강철중 씨.”
“예, 사장님.”
“지금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용병… 그러니까 제 조직원들 수가 얼마나 됩니까?”
강철중은 드디어 때가 왔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50명입니다.”
“50명….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네요.”
“예. 하지만 전투력을 따지자면 500명이 아깝지 않습니다.”
500명이 아깝지 않은 전투력이라.
내가 봐도 대단한 인원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50명 중의 5명은 세계에서 가장 전투력이 뛰어나다는 구르카족 출신이다.
용병에서 은퇴한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 전투 실력은 결코 녹슬지 않았다.
퇴임한 구르카족 전투원 하나가 칼 하나만 들고 40명의 무장 강도들과 싸워 이겼다는 건 유명한 일화이지 않던가.
“좋습니다. 곧 있으면 그들을 전부 움직여야 할 때가 올 겁니다.”
“타깃은 파블로 에스코바르겠죠?”
“예. 그리고 장소는 멕시코가 될 겁니다.”
“작전 시작은 언제입니까?”
사실 아직 명확하게 작전 시작일이 정해지진 않았다. 매우 유동적인 상황에서 융통성 있게 움직여야 하는지라…. 나도, 부시도 날짜를 정하지 못한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움직일 수 있게 준비를 하셔야 할 거예요. 멕시코로 파블로를 유인해야 하는 일이라서요. 언제 시작할지 모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유인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파블로를 멕시코까지 유인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그의 홈그라운드나 다름없는 콜롬비아에서 그를 잡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미국과 붙어 있는 멕시코에서 작전을 실행한다면 성공률이 훨씬 더 올라갈 것이다.
“예. 아시겠지만 쉽진 않을 겁니다.”
다행히 강철중은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메데인 카르텔의 카포를 잡는 일이지 않은가.
작전이 쉽지 않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아름 씨.”
“예, 사장님.”
이번에는 김아름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헬기를 하나 급하게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돈이 좀 깨지는 물품이다 보니, 스웨덴에 있는 돈을 가져와서….”
그러자 김아름이 안경을 살짝 추켜올리면서 말을 잘랐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장 움직일 수 있는 헬기가 3대 정도 있습니다. 추가로 더 원하신다면 수송용 헬기를 구하셔도 됩니다만….”
헬기가 3대나 있다고?
아니. 어떻게?
난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헬기가 있다는 건 처음 알았는데요?”
“구입하신 건 아니고…. 조만간 필요하실 것 같아 골든 마피아를 통해서 렌트해 놓았습니다. 물론, 빨리 쓰셔야 할 겁니다. 빌리는 비용이 꽤 많이 나가서요.”
나와 강철중은 멍한 얼굴로 김아름을 쳐다보았다.
“저기… 저한테 보고를 한 적이 있으신가요?”
“예. 장부에도 있고, 서류에도 올려놓았습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겠지만.”
“….”
내가 아무런 말도 못 하자, 김아름은 살짝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자금을 융통성 있게 써도 괜찮다고 말씀하신 건 사장님이시지 않습니까?”
아차. 오해를 한 모양이다.
“아아. 그런 게 아니라…. 역시, 몇 번을 봐도 김아름 씨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나의 칭찬에도 김아름의 표정은 여전했다.
매혹적이면서도 차가운 저 얼굴.
영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난 분위기가 식어가기 전에 말을 돌렸다.
“아무튼, 헬기는 바로 띄울 수 있는 거죠?”
“물론입니다.”
“그럼, 강철중 씨는 조직원들을 데리고 먼저 멕시코로 가 계세요. 그리고 김아름 씨는 강철중 씨와 연동해서 헬기를 지원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강철중과 김아름에게 전달해야 할 말은 대충 끝났다.
두 사람은 각자 맡은 임무를 위해 방 밖으로 나갔다.
난 홀로 방에 남아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다이얼을 누르지 못하고 계속 수화기만 든 채로 몇 분이나 멈춰 있었다.
내가 다이얼을 누르는 순간, 백 명은 훨씬 넘는 사람들의 목숨이 사라진다. 그럼에도 난 살육의 인두겁을 진정 써야 한단 말인가.
일말의 망설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티끌만큼 밖에 남지 않은 죄책감이란 옥죄임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여기까지 와서 뭘 더 바란단 말인가.
이미 예전의 김태산은 죽고 없어졌다.
난 다이얼을 힘차게 눌렀다.
이윽고 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망설임 없이 지시사항을 내렸다.
“로이. 시작해 주세요.”
* * *
“알겠어, 워커. 그래. 그럼, 그때 보자.”
드디어 작전 개시를 알리는 신호가 떨어졌다.
로이 루스테는 시가를 길게 빨아들인 다음, 뿌연 연기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는 한동안 수화기를 내려놓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담배 연기만 풀풀 풍겨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그는 다 핀 시가를 비비고 일어났다.
길게 생각해봤자, 이미 일은 시작된 것이지 않은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며, 이것이 인생 최대의 도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 가자.”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수십 명의 조직원과 함께 무기를 챙기고 차에 올라탔다.
마치 한 개의 중대가 군용 차량을 타고 이동하는 모습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그들은 중화기를 온몸에 장착한 채였다.
그리고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무섭게 총을 꺼내 들었다.
이들이 습격해야 할 곳은 할렘가에 있는 디아블로 조직의 본거지.
최근 들어 디아블로가 미국 내의 메데인 카르텔의 시장을 위협하면서 세력을 키웠다고는 하나, 이들은 세계 최고의 마약 조직인 메데인이다.
이들 눈에 디아블로는 그저 잔챙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이는 잠시 조직원들을 대기시켜 놓고 혼자 차에서 내려 디아블로가 운영하는 지하 클럽으로 들어가려 했다.
“잠깐. 여기는 들어가는 문이 아니다. 입구는 저쪽이니까 돌아서 가.”
문지기가 길을 막자 로이는 익살스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래? 그럼 내가 아주 잘 온 거네.”
그는 그대로 상대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 주었다. 그런 뒤, 로이는 총에서 나오는 연기를 입으로 훅 불며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소란을 들은 조직원 몇 명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려고 하자, 세 발의 총성이 더 들려왔다.
로이가 능숙한 솜씨로 그들의 머리에 총을 쏜 것이었다.
먼저 선봉에 서서 사기를 북돋아 놓자, 차량에서 대기 중이었던 조직원들도 로이의 뒤를 따라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그 이후부터 벌어진 일은 가히 일방적인 총살이었다.
중화기로 무장한 조직원들이 전방에 나서서 마구잡이로 총알을 갈겨댔고, 클럽 오픈을 준비하며 약을 진열해 놓고 있던 디아블로 조직원들은 온몸에 바람구멍이 생긴 채 쓰러졌다.
몇 명은 반항을 해 보기도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폭발물까지 터트리며 공격을 해 오는데, 누가 저들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단 이십 분 만에 클럽 안에 있던 디아블로 조직원들이 전부 사망했다.
로이는 디아블로의 보스가 이곳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보스를 잡고자 온 게 아니지 않은가.
디아블로 조직 자체를 말살시키기 위해 온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디아블로 조직을 말살시키기보다는, 무엇보다도 큰 임펙트를 남겨야 했다. 모두가 이 일에 경악을 터트리도록.
“다 죽였으면, 메데인 카르텔이 디아블로를 심판하고 갔다는 흔적들을 남겨. 바로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야 되니까.”
“예.”
로이는 피에 젖은 시가를 오랜만에 입에 물고 이름도 모를 누군가의 시체 위에 앉아 불을 붙였다.
이로써 왕을 잡는 작전이 시작되었다.
* * *
미국은 이 사건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
워낙 갱단들이 많아 그들끼리 서로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마치 2차 세계대전을 방불케 하는 듯한 전쟁은 경험해 보지 못했으리라.
[대량학살! 사망자만 150명!]
[언제까지 정부는 갱단들의 전쟁을 묵과할 것인가?]
[메데인 카르텔. 그들은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못했는가?]
나는 신문 일 면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헤드라인을 바라보았다.
디아블로 마피아의 몰락. 그리고 메데인 카르텔의 끔찍한 학살.
거의 일방적이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메데인은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해, 디아블로 조직을 완전히 분해시켜 버렸다.
할렘가에 있는 디아블로의 본거지와 그들이 운영하고 있는 클럽까지 모두 습격했으니, 그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선봉에 섰던 건 바로 로이 루스테.
물론, 로이의 얼굴이 신문에 나오진 않았다.
디아블로 마피아를 습격한 메데인 카르텔 조직원들이 전부 복면을 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로이는 이 모든 학살이 메데인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미국 전 국민에게 확실히 각인시켜 주었다.
끔찍하게 시체를 토막 내놓고 그 위에 메데인의 천벌이라는 글귀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곳곳에 메데인 카르텔의 흔적을 남겨 놓기까지 했다.
[메데인 카르텔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공분한 국민들의 외침. 갱단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로이 루스테가 디아블로 마피아를 습격한 계획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미국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일을 끝낸 터라, 공권력과 교전을 벌이는 최악의 상황도 면했다.
그것뿐인가?
디아블로 마피아와 그 외 조직들을 제외하고 민간인 사상자는 없었다.
로이가 귀신같이 확실한 일 처리를 한 덕분이다.
이것으로 나와 조지 부시가 원하는 판이 깔렸다.
“이 사건에 저는 침통한 심경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미 정부는 이번 일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또한 메데인 카르텔과 미 정부와의 관계가 매우 의심쩍은 것이 있어 특검을 발의하고자 합니다.”
부시 대통령은 핼쑥해진 얼굴로 나타나 힘없는 목소리로 성명문을 읽었다.
그의 표정,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건, 진심으로 이 상황을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 이 모든 게 저 사람과 내 머리에서 나온 계획인데도 말이다.
과연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뺨치는 수준의 연기라고 해야 할까. 저 정도로 두꺼운 가면이 없었다면 대통령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은근슬쩍 특검을 발의하겠다는 뜻까지 나타냈다.
슬슬 메데인과 레이건을 동시에 엮어, 날려 보낼 계획을 드러낸 것이리라.
난 TV를 끄고 강철중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철중 씨.”
“예, 사장님.”
“일주일 내로 시작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강철중의 간결한 대답을 듣고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로이 루스테는 지금쯤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타깃인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지금쯤 비행기를 타고 멕시코로 넘어오고 있다.
미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호랑이 굴에 발을 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다시 콜롬비아에 돌아가려 할 때에는 이미 늦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내 사람들과 DEA에서 파견한 특공대들이 그를 궁지에 몰아넣을 테니까.
이번 일로 내 마음이 마냥 편한 것은 아니다.
내가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역사에도 존재하지 않는 학살을 벌이지 않았던가.
솔직히 디아블로 조직원들이 전부 죽었다고 해서 미안한 마음은 좁쌀만큼도 들지 않는다. 그런 쓰레기들을 대신 치워 준 것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이 일로 어떻게 역사가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지금 그게 불안한 것이다.
또한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죽음을 앞당기고 있고, 그의 죽음으로 인해 해체되어야 할 메데인 카르텔이 존속된다.
그리고 그 거대 조직에, 로이 루스테라는 장기말을 앞세우는 중이다.
이것으로 또 어떻게 역사가 뒤바뀔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점은, 잠시나마 요동치던 내 마음이 소름 끼치도록 평정심을 되찾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