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124화 (124/325)
  • 124화. 왕을 죽이는 자. (1)

    기적의 승리.

    미국이 바라보는 세계상. 그것은 보수.

    진보 없는 세상. 진보 없는 미국.

    조지 H.W. 부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헤드라인을 장식한 문구들이다.

    기적의 승리.

    네거티브 전략의 파급력.

    아직은 보수를 외치는 미국의 국민들.

    부시는 정말 기적에 가까운 승리를 거두며 제41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예.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방금 내게 걸려온 전화가 41대 미국 대통령이라고 하면, 과연 누가 믿어 주기나 할까.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본래의 역사대로 조지 부시가 제41대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무너졌던 보수 정당이 힘을 되찾았다.

    내가 이것저것 김아름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철저하게 네거티브 전략으로 대선을 이끌었던 것이 큰 힘이 되었다. 그걸 부시도 잘 알고 있기에 친히 내게 전화까지 걸며 감사한 마음을 전한 것이었다.

    이제… 시작할 때가 된 것인가.

    “동욱아.”

    나와 함께 사무실에 있던 동욱이가 조용히 대답했다.

    “예, 형님.”

    이 녀석은 내가 영어로 누구와 전화를 했는지 구태여 묻지 않았다. 내가 무슨 일을 하던, 동욱이는 그저 따를 뿐이다. 그래서 내가 이놈을 항상 옆에 두고 있는 것이다.

    “미국으로 가는 티켓 하나 끊어. 1월 되면 바로 갈 거니까.”

    “예, 알겠습니다.”

    미국 대선이 끝났다는 건 88년의 마지막을 알리는 것이다.

    나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바깥 풍경을, 창문을 통해 감상하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내가 원하던 대로 조지 부시가 대통령이 되었다.

    나는 리 애트워터를 제거하면서 41대 대통령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이제 내가 이루고자 했던 일을 이루면 된다. 내가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일을.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건 바로 왕을 죽이는 것이다.

    * * *

    “오셨습니까, 사장님.”

    “예, 강철중 씨.”

    강철중은 비장한 표정으로 공항에서 나를 맞이해 주었다.

    내가 한국에서 전했던 말이 있으니 보이는 표정일 것이다.

    그 옆에는 김아름이 있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김아름 씨. 덕분에 제가 다음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네요.”

    김아름은 안경을 살짝 추켜올리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했을 뿐입니다.”

    강철중과 마찬가지로 김아름에게도 미리 언질을 준 터라, 그녀도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별다른 말 없이 나를 공항 밖에 있는 차량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로이 루스테가 이미 타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워커.”

    “먼저 와 있으셨네요.”

    “응. 워커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멕시코에서 바로 넘어왔어. 아! 그것보다, 축하해. 30억 달러의 주인이 되었다면서?”

    메데인 카르텔에게 판매한 마약의 대가를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 돈은 전부 스위스 은행에 아주 잘 보관되어 있다.

    스위스 은행이라고 하면 꽤 식상한 레퍼토리겠지만, 어쩔 수 없다. 2000년도까지는 스위스 은행이 검은돈을 맡게 되는 창고 역할을 한다. 하지만 미국이 북핵 문제로 북한을 압박하면서 스위스 은행도 뚫리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그로 인해 검은돈을 그곳에 숨겨 두었던 사람들이 전부 말레이시아에 눈을 돌리게 된다.

    2000년도까지는 스위스가 최고의 보안을 자랑하는 블랙 뱅크이지만, 그 이후부터는 말레이시아가 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로이. 준비는 됐습니까?”

    “나름.”

    “뭔가 자신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당연한 거 아니야? 상대가 누군데. 세계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메데인 카르텔의 카포야.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제거하는 일이라고. 그게 쉬운 줄 알아?”

    “하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겁니다.”

    낮아진 내 목소리를 들은 로이가 몸을 살짝 움찔거리며 말했다.

    “오늘따라 왠지 워커가 더 무서워 보이는데?”

    “그래요? 기분 탓이겠죠.”

    호텔에 도착하자 나는 차에서 내리며 로이에게 주의를 주었다.

    “제가 신호할 때까진 절대 움직이시면 안 돼요. 그리고 계속해서 파블로의 위치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걸 해내지 못하면 이 계획은 성공하지 못해요.”

    “알겠어, 워커. 그리고… 애들은 다 준비시켜 놨어. 신호만 주면 바로 크게 한 방 터트릴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뒷좌석 문을 닫았다. 그대로 로이는 차를 타고 사라졌고, 나는 호텔 주차장에 준비되어 있는 다른 차량에 몸을 맡겼다.

    방금 전은 로이와 은밀히 만나기 위해 그런 것이었고, 이제부터는 이 나라에서 가장 엄중한 경호를 받고 있을 VIP를 만나러 가야 한다.

    “출발하죠.”

    강철중은 기어를 힘차게 당기며 대답했다.

    “예, 사장님.”

    * * *

    내가 방문한 곳은 백악관이 아닌, 바로 워싱턴에 있는 조지 부시의 본가였다.

    대통령이 당선된 후, 이번 1월 20일에 취임하기 전까진 그는 이 집에서 머물러야 한다. 여기 있는 집안 살림들을 전부 백악관으로 가져가야 하니,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 할 게 많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자네가 언제 올지 기다리고만 있었네.”

    부시는 아주 밝은 얼굴로 나를 맞이하며 손을 내밀었다.

    난 그의 손을 맞잡은 다음, 자리에 앉았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바쁘신 분을 수고스럽게 해 드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아니야. 자네라면 그 어떤 때라도 시간을 비워 둘 수 있네.”

    꽤 좋은 신호다.

    부시가 내게 대놓고 호감을 드러내고 있으니까.

    그만큼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건가. 그래도 막상 대통령이 되고 보니, 전보다 어깨에 힘이 더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바쁘신 분이니,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하하. 나도 말 돌리는 건 딱 질색이야.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저번에 제가 대통령님께 말씀드린 걸 기억하십니까?”

    부시는 턱을 짧게 쓸어내리며 대꾸했다.

    “음…. 레이건에 대한 걸 말하는 건가?”

    레이건 대통령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제 이 나라의 대통령은 바로 자신이니까.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자리이기에 이해도 됐다.

    미국의 대통령은 곧 세계 최강의 대통령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자리니까.

    “예. 그것도 있고, 메데인에 관한 것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레이건을 먼저 매장하면서 메데인도 같이 엮어버리는 거였지?”

    “비슷합니다. 하지만 레이건보다 메데인을 먼저 처리해야 할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메데인을 먼저?”

    아무래도 부시는 레이건을 먼저 날려버리고 싶었나 보다. 조금 찌푸려진 그의 얼굴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지금은 레이건을 보낼 때가 아니다. 1월 20일이 되기 전까지는 레이건이 대통령이니까.

    아무리 대통령 임기가 며칠 안 남았다고 해도, 그에게 남은 권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란 바로 그런 자리다.

    “일단 자네의 생각을 들어보지.”

    내 이야기를 들어보고 뭔가 맞지 않으면 바로 엎어버리겠다는 것이다.

    이제 대통령이 되었다, 이건가?

    고분고분 하라는 대로 할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들린다.

    뭐, 이미 예상한 일이긴 하지만.

    “조만간 할렘가에서 어마어마한 총격전이 벌어질 겁니다. 폭탄은 물론이고 수천 발의 총알이 소비되겠지요. 그리고 사망자 수도 백 명이 족히 넘을 예정입니다.”

    뜬금없는 내 말에 부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지금 무슨 소리인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고한 미국의 시민들이 다칠 일은 없을 겁니다. 단지, 지하 세계에서 선량한 국민의 등골을 빼 먹던 쓰레기들을 처리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자네가 그런 학살을 꾸미고 있다는 건가?”

    “그런 셈이죠.”

    부시는 대노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야? 절대 그런 일을 묵과할 수 없네!”

    “진정하시고, 제 말을 먼저 들어주십시오.”

    한 번 더 노기를 터뜨릴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던 부시가 목을 가다듬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당장 내 방에서 나가게 만들 걸세.”

    고성을 질렀던 건, 기선 제압을 하기 위함이었나.

    정말이지 상대하기 귀찮은 양반이다.

    “최근에 대량으로 마약을 들여와 할렘가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디아블로라는 마피아 집단인데, 메데인 카르텔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곳이지요.”

    “메데인에서?”

    “예. 그놈들이 미국 시장을 빼앗아가고 있으니 곱게 볼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메데인이 이번에 디아블로를 친다는 건가?”

    “아뇨. 리턴 컴퍼니가 그 일을 할 겁니다.”

    부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메데인 카르텔이 노리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예. 그러나 메데인이 그들을 조용히 치려고 하기 전에, 리턴 컴퍼니에서 크게 터뜨리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막상 상황이 터지면 언론을 통해 이 모든 건 사실, 메데인 카르텔의 카포.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짓이라는 걸 알리는 거죠. 그가 끔찍한 학살을 지시했다고요.”

    내 말을 이해했는지, 부시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물끄러미 살펴보았다.

    “일을 너무 크게 벌리는 거 같은데. 이 일이 터지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가?”

    “이미 일은 콘트라 게이트 사건으로 크게 터트렸습니다. 그에 비하면 이번 일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죠.”

    “하하. 그래서, 그런 미친 짓을 나더러 방관하라고?”

    “예. 메데인이 천하의 나쁜 놈으로 만드는 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대신, 뒤처리는 대통령님이 해 주셨으면 합니다.”

    쥐구멍을 만들어 내가 걸리는 일이 없게 해 달라는 뜻이었다.

    부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럴 줄 알았다.

    대통령이 되면 내가 도와준 은혜를 싹 잊어버릴 줄 알았지.

    “혹시라도 정치 비자금 문제로 나를 걸고넘어질 생각이라면 그만두게. 내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니까.”

    나도 부시를 따라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스럽지만, 우리 회사도 그런 찌질한 거로 사람을 매장시키진 않습니다.”

    부시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아직 우리 회사의 정확한 정체를 모른다.

    분명 저 남자도 CIA 인맥을 동원해 ‘리턴 컴퍼니의 진면목’을 털어 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오는 건 고작해야 일반 기업체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일 터.

    그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

    처음부터 리턴 컴퍼니를 운영하고 있던 건 나였고, 페이퍼 컴퍼니로서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난 이 부분을 김아름 씨에게 일임하여 해결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추가 직원 고용 등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다. 사실상 대주주의 권한은 행사하지만, 표면적인 대표는 따로 있는 것이다.

    분명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긴 하나, 김아름의 일 처리가 나쁜 것도 아닐뿐더러 그 전에 그녀가 나서서 기업체 세탁을 실행할 것이다.

    이것은 내가 의도한 것이었지만, 생각보다 더 잘 처리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적이 누구인지도,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막연한 두려움.

    이것만큼 상대를 흔들기에 좋은 패가 또 어디 있겠는가?

    “리턴 컴퍼니는 대통령님과 앞으로도 계속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건 저희만 이득을 보자고 드리는 제안도 아닙니다.”

    부시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럼?”

    “레이건을 날려버림과 동시에 오명을 벗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제야 부시는 원하는 답을 얻었다는 듯 입꼬리를 꿈틀거렸다. 이 남자는 처음부터 이 대답을 원했던 것이 분명하다.

    내가 저번에 부시와 이야기를 나눴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레이건에 대한 것이었다.

    레이건을 콘트라 게이트의 핵심으로 몰아, 부통령 부시 모르게 일을 꾸몄다고 조작하는 것.

    그래야 부시도 앞으로의 대통령 임기 동안, 그 족쇄에서 벗어나 오히려 나라를 위해 열심을 다했다가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으로 언론플레이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메데인과 레이건을 잘 엮을 수 있겠나?”

    “예. 메데인이 이번 일을 꾸미고, 나아가 레이건 대통령과 은밀한 거래를 나눴다는 게 알려지면 국민들은 분노하게 될 겁니다.”

    “맞아.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국민들은 그것에 속아 넘어가겠지.”

    “예.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메데인을 궁지에 몰아넣어야 합니다. 미국 정부가 정면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요.”

    줄곧 성난 얼굴만 보여 주었던 부시 얼굴에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역시, 이 남자도 고단수는 고단수다.

    “자네가 말한 그 계획말일세. 좀 더 듣고 싶은데. 시간이 되려나?”

    “예. 모든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부시는 나와 똑같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던 메데인과 레이건을 동시에 날려 버릴 수 있는 계획을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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