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어머니의 꿈.
이강혁은 나와의 은밀한 거래가 끝난 뒤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나 저놈이 날 묻어버리려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내가 친 양념에 잘 넘어가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만남은 생각 이상으로 유익했다.
이강혁이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던가? 이강찬을 밑바닥까지 끌어 내릴 기회를 말이다.
난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생각이 없다. 이강혁과 손을 잡고 이강찬을 구렁텅이에 빠뜨릴 생각이다.
이강찬이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모든 희망을 잃었을 때, 비로소 나는 광명의 천사로 그의 앞에 나타나 손을 뻗칠 것이다. 그리고 이강혁을 몰아내고, 이강찬을 천성의 황제로 옹립시키리라.
천성을 나의 영원한 아군으로, 이강찬을 나의 아랫사람으로, 그리고 대통령은 나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이렇게 되면 나는 이 나라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
“사람 앞에 두고 뭘 그렇게 멍을 때리고 있어?”
권용일의 불만 섞인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까지 오신 이유가….”
“예끼! 내가 오고 싶으면 오는 거지. 꼭 무슨 이유라도 있어야 하는 거냐? 우리가 그런 사이야?”
“그런 말씀이 아니라….”
“어이구. 내가 다 늙었다고 무시하는 거 봐라. 이래서 영감들이 오래 살아봤자, 좋은 꼴 못 본다고 하는 거야.”
“….”
이 영감이 한 번 몰아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이럴 때는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그래도 큰 형님을 위해서 고생하고 온 놈이 아닙니까?”
성일환이 구원 투수로 나서면서, 권용일은 잔소리를 멈추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그렇긴 하지. 우리 태산이가 복덩이지, 복덩이야. 이놈 없었으면 우리 조직이 어떤 꼬락서니가 됐을지 몰라.”
뜬금없는 권용일의 여의도 방문 덕분에, 밀린 일을 처리하려던 나는 속절없이 붙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양반은 자신이 아끼는 찻잔을 여기까지 들고 와 차를 끓이고 앉아 있다.
“네가 일본에서 거둔 성과는 들었다. 그놈들이 약값도 싸게 해 줬다며? 도대체 네놈은 맨날 뭔 짓을 하고 다니기에, 만나는 놈들마다 너한테 뭘 못 줘서 안달이야?”
와타나베는 화진과의 거래에서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약을 넘겼고, 세 배에 가까운 값으로 우리 물건을 사들였다.
아주 노골적이게 내 편의를 봐준 것이었다. 덕분에 우리 영감님만 입이 찢어지라 올라갔다.
“운이 좋았습니다.”
“또, 또! 허구한 날 운 타령하는 것도 지겹지 않냐?”
“그런데 어쩌겠어요? 사실인걸.”
권용일은 고개를 흔들며 잔을 들어,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아무튼, 이번에는… 아니지. 이번에도 정말 잘했다. 네가 좀만 더 나한테 일찍 왔으면, 내 주머니가 더 커졌을 텐데….”
그놈의 욕심은.
하여튼 이 영감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런데 미국에는 또 언제 갈 생각이냐?”
“내년에 갈 생각입니다. 이제 두 달만 있으면 86년이잖아요. 아마 내년 2월쯤에는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으음-. 그래?”
권용일의 눈빛이 좀 이상하다. 마치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단순히 기분 탓이려나?
“예. 어차피 김아름 씨가 주도해서 일을 진행하니까요. 그리고 얼마 전에 강철중 씨도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장 큰일이 아니라면 직접 미국에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뭐…. 그렇긴 하지. 그래서 2월이라고?”
“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내 물음에 권용일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궁금하니까 그렇지!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캐물은 적도 없는데 화내는 걸 보니 매우 수상했다. 정말 이 영감이 나 몰래 뭔가를 꾸미고 있는 건 아닐까?
다음에 김아름한테 연락해서 권용일이 별도로 시킨 게 없는지 알아봐야겠다.
“외국 나가기 전까지는 주경야독이라도 할 생각이냐?”
“주경야독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학생이 공부 안 하면 쓰겠습니까?”
“뭐 듣기론 황규혁 그놈이, 네놈 영입할 때 대학교 가는 걸 염두해 뒀다고 했지.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네가 공부할 필요가 있긴 하냐? 그 머리로 뭘 해도 대성할 것 같은데 말이야.”
나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권용일에게 말했다.
“좀만 시간이 지나면 대학 이름으로 사람의 인생이 갈리게 될 겁니다. 그게 마치 그 사람의 얼굴처럼 변해 버리는 거죠. 그리고 큰 형님께서 조직을 기업으로 운영하게 되면, 대학 교육을 받은 인재가 많이 필요하실 거예요. 그때 제가 그런 놈들한테 밀려서 밥그릇을 빼앗길 순 없잖아요.”
권용일은 껄껄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당돌한 녀석일세. 벌써부터 그 뒷일을 생각하고 있었냐? 하여튼, 나이에 맞지 않게 무서운 놈이라니까.”
그리고 성일환에게 화살을 돌려 괜스레 나를 모함한다.
“너도 조심해. 저놈이 언제 네놈 등 뒤에 비수를 꽂을지 몰라.”
그런데 그걸 또 좋다고 성일환이 받았다.
“하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산이가 제 뒤통수를 치면 그건 답이 없지 않습니까?”
“하긴. 네가 이놈 머리를 따라갈 순 없겠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기다리고만 있지 않습니까? 얼른 이놈이 학교 졸업해서 어엿한 성인이 될 때까지요. 그래야 이놈이 저한테 짬 때린 거, 다 돌려줄 수 있잖아요.”
성일환은 다른 간부들과 다르게 자신의 구역이 많아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뭐랄까, 그냥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랄까.
모든 걸 위험하지 않게 하려는 안전주의적인 사람.
어쩌면 이런 소극적인 태도가 이진용에게 빌미를 제공한 것일 수도 있겠다.
확실히 이진용을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은 아니다.
내가 성일환이었으면 최고의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는 놈을 아껴주진 않을 것 같다. 은밀히 제거한다면 모를까. 그리고 구역을 넘겨주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양반은 딱히 욕심이랄 게 없다. 그냥 이렇게 살다가 때가 되면, 유유자적하는 게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튼, 이제 일어나자. 우리 태산이 고생 많이 했는데, 내가 뭐라도 사 먹여야지. 일환이 네가 앞장서라.”
“예, 큰 형님.”
나 먹을 거 사 준다는 양반이 내가 뭐 먹고 싶은지 물어보지도 않는다. 더 웃긴 건, 성일환은 당연하게도 나와 권용일을 비싼 소고깃집으로 안내했다.
“우리 태산이가 좋아하는 소고기, 오늘 내가 마음껏 사주마.”
권용일은 씨익 웃으며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는 내게, 이번에는 성일환이 다가와 등을 팡팡 때렸다.
“어때. 마음에 들지? 여기가 이번에 새로 생긴 곳인데, 진짜 맛있는 곳이야. 저번에 여기서 먹었을 때, 네 생각나더라.”
성일환도 권용일을 따라, 훌쩍 식당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껄껄거리며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곤, 헛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두 사람은 내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이미 메뉴를 정해 버린걸.
하는 수 없이 나도 두 사람을 뒤따라 들어갔다.
절대, 야들야들한 소고기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냥 저 두 사람한테 맞춰 줬을 뿐.
* * *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병마에 숨을 거두신 어머니의 싸늘한 모습은, 이번 생에는 절대 보기 싫었다.
남들이 손가락질할지언정, 내 어머니만큼은 세상 누구보다도 잘 먹고 잘살게 해 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단 하루도 집에 가만히 계시는 날이 없다.
내게 일을 안 하면 좀이 쑤신다고 매일 같이 노래를 부르셨고, 팔 다리가 굳어서 아프다는 말씀까지 하셨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버릇을 들이신 덕분에, 집에 가만히 앉아 있는 걸 못 참아 하시는 것이다.
“어머니. 아직 눈 뜨시면 안 됩니다.”
그래서 연욱이와 상의 끝에 나는 결정을 내렸다.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 거니?”
“좀만 기다려 보세요, 어머니. 태산이가 정말 깜짝 놀랄 만한 걸 준비했으니까요.”
어머니가 그토록 일하고 싶으시다면, 좀 더 몸과 마음이 편한 곳을 마련해 드리자고.
“이제 눈 뜨셔도 돼요, 어머니.”
“으응?”
어머니는 번쩍거리는 간판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셨다.
[현자네 닭갈비]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만든 식당이다.
그것도 여의도 한복판에 있는 3층짜리 건물을 사서 만든 곳인데, 평수만 120평이고 좌석만 100개가 넘는다. 아직 공사가 마무리되진 않았지만, 내년 초에는 오픈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항상 그러셨잖아요. 어머니 이름으로 된 식당을 꼭 갖고 싶다고. 그러니까 이제 남의 식당에서 일하지 마시고 여기서 편하게 일하세요, 어머니.”
어머니는 천천히 내게 고개를 돌리셨다. 이미 눈가에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태, 태산아. 이게 정녕 꿈인지 생시인지….”
어머니는 목소리까지 떨며 눈을 여러 번 비비셨다. 거기다가 꿈일까 봐. 볼도 꼬집기까지 하셨다. 하지만 이건 꿈이 아니지 않은가.
정말 어머니의 가게가 생긴 것이다.
“태산아…. 이 어미가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던 모양이야. 지지리도 복도 없다고 생각한 년이, 자식 복은 차고도 넘치는구나.”
“어머니….”
나는 조용히 어머니를 끌어 안아드렸다. 지금까지 평생, 자식들을 위해 고생만 하셨던 분이다. 이제는 자신의 인생을 마음껏 즐기실 때도 되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한동안 간판 앞에서 자리를 뜨지 못한 채 서 계셨다.
* * *
어머니의 가게를 여의도로 잡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혹시라도 다른 조직에서, 나 때문이라도 어머니를 해코지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관리하는 구역에 어머니 가게를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내 쪽 애들을 어머니 가게 주변으로 쫙 깔아 놓았다.
이미 내가 조직원들에게 단단히 일러둔 터라, 어머니 가게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르르 몰려갈 것이다.
“공사가 좀 걸릴 것 같네. 그런데 왜 닭갈비를 선택한 거니?”
“항상 태혁이랑 제 생일 때마다 닭갈비를 해 주셨잖아요. 그 요리를 누구보다도 가장 잘 하시니까요. 그리고 저도 어머니 닭갈비를 제일 좋아하기도 하고요.”
예전에는 집안 형편이 워낙 어려웠다.
그래서 어머니는 특별한 날에만 어렵사리 닭갈비 재료를 구해와, 요리를 해주시곤 했다.
춘천에서부터 시작된 닭갈비는 80년도 중반부터 90년도까지 큰 히트를 쳐서, 엄청난 유행을 타게 된다. 물론, 반짝 유행이긴 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닭갈비 요리는 일반적인 것과 사뭇 다르다.
레시피까지는 나도 잘 알지 못하지만, 내가 먹어본 닭갈비 중에서 어머니의 요리를 따라갈 수 있는 건 없다고 확신한다.
물론, 내 주관적인 생각이라 가게에 파리만 날아다닐 수도 있다. 그래도 아무렴 어떤가?
내가 있는 한 가게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
돈을 벌라고 가게를 내어드린 게 아니다. 그저 어머니의 꿈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다. 장사의 성과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어머니가 자신의 가게를 일구어 나가면서, 더는 남의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사시기를 원한다.
정말 가게에 파리만 날리면, 조직원들 식사는 무조건 어머니 가게에서 하면 될 일이다.
“혹시 어머니는 닭갈비가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응? 아니야.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닭갈비잖니. 그런데 이 3층 건물이 다 가게가 되는 거니, 비쌀 텐데…. 요리에 손도 많이 가고, 사람도 많이 써야 할 테고….”
“건물 임대가 싸게 나와서, 황 사장님이 계약을 도와주신 거예요. 아시죠? 황 사장님.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사실 건물은 내가 사들인 것이지만, 계약을 도와준 것은 황규혁 형님이 맞다.
그리고 90년도까지 크게 유행한 닭갈비 시장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게 된 건, 바로 이것 때문이다.
급격하게 치솟는 닭고깃값과 인건비.
닭갈비는 판을 긁는 직원이 따로 있어야 하고, 밥을 볶아주면서 사리를 따로 끓여 주는 번거로운 잡일들이 많다.
당연히 인건비가 다른 식당들보다 훨씬 많이 든다.
“언제든 음식은 바꾸셔도 돼요. 그러니까 천천히 하세요, 어머니. 저는 돈 보다는, 이곳이 어머니가 꿈꾸는 가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아시겠죠?”
내 말을 들은 어머니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무리 그래도 가게를 열었으면 돈은 벌어야…. 네가 해 준 식당인데….”
역시, 책임감 강한 어머니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자식한테 갚을 생각부터 하신다.
난 단호하게 새끼손가락을 건네며 말했다.
“어머니. 저랑 약속하세요. 돈 걱정은 하지 마세요. 손님이 없어도, 어머니가 힘들지 않은 선에서 일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직원도 많이 뽑고요. 솔직히 일을 안 하셨으면 하지만, 어머니가 원하셔서 준비한 거예요. 꼭 행복하셨으면 하니까요.”
그렇게 비참한 꼴로 돌아가시는 걸 두 번 볼 자신이 없다. 어머니는 결국 마지못해 손가락을 걸으셨다.
“알겠어.”
“약속하신 겁니다.”
“그래. 정말 우리 아들밖에 없다.”
어머니는 나를 꼭 껴안으신 다음 내 등을 두드리셨다.
나도 기분 좋게 어머니 품에 안겼다. 하지만 저번보다 더 왜소해진 어머니 어깨에 마음이 아파져 왔다.
이번 생에는 꼭 행복하게 해 드릴게요,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