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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65화 (65/325)
  • 65화. 거리의 제왕.

    “미국물이 좋긴 좋은가 보구나. 아주 인상이 확 펴졌네.”

    한국에 돌아온 다음 날, 권용일은 득달같이 나를 천안으로 불렀다.

    “미국이 좋긴 좋더라고요. 그래도 고향만 한 곳이 있겠습니까?”

    “허허. 가끔 네가 말하는 거 보면 다 늙은 영감탱이를 보는 것 같다니까.”

    권용일은 내 앞에 찻잔을 밀어주면서 말했다.

    “한잔할 테냐?”

    “감사합니다, 큰 형님.”

    그렇지 않아도 권용일의 차가 그리워지던 참이었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차를 끓이고 내 잔에 채워주면서 운을 뗐다.

    “꽤 위험했을 텐데, 잘 해결을 해 주었구나.”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또 어울리지도 않는 겸양을 떨기는….”

    권용일은 나를 물끄러미 살펴보며 조금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다친 곳은 없고?”

    “예. 다행히 없습니다.”

    “확실히 네가 난 놈이긴 난 놈인가 보다. 그 살벌한 놈들과 총격전을 벌이고도 몸 멀쩡히 돌아오다니.”

    “그건 좀… 위험하긴 했죠. 근데 살벌한 건 우리 화진파가 훨씬 더 합니다.”

    권용일은 껄껄 웃으며 무릎을 탁탁 쳤다.

    “그 말이 맞다. 우리 쪽이 더 살벌하지. 못하진 않을 거다.”

    잠깐 말없이 그는 찻잔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러다 은근한 목소리로 나를 슬쩍 떠 보았다.

    “거기서 페이커 컴퍼니인가를 하나를 차렸다던데….”

    페이커 컴퍼니가 무슨 뜻인지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왜 그런 걸 만들었냐고 묻는 것이다.

    과연 김아름과 강철중이 이 영감에게 어디까지 말을 했을까?

    내가 도박으로 돈을 왕창 벌어 놓았다는 것도 다 말한 걸까?

    “페이퍼 컴퍼니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습니다. 칼리 카르텔과 접촉하려면 미끼를 던질 만한 게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그냥 한 번 만들고 없앨 유령 회사를 세운 거냐?”

    어감을 보니, 내가 전부터 미국에 회사를 차려 놓으려 했다는 건 듣지 못한 것 같다. 이 영감님이 민감하게 반응할 만한 건, 김아름과 강철중이 잘 빼서 보고를 했다는 건데….

    그럼, 내가 4,500만 달러를 투자했다는 것도 듣지 못한 걸까.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을 해 보니 그냥 유령회사로 놔두기에는 좀 아깝지 않습니까?”

    “그럼?”

    “앞으로 미국에서 움직일 때 제 신분을 숨길 만한 것쯤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때론 조직의 이름보다 존재하지 않는 회사를 앞세우는 게 더 이로울 때가 있을 테니까요.”

    “존재하지 않는 회사를 앞세운 다라….”

    내가 말하는 건 단순히 신분을 위장한다는 게 아니다. 앞으로 화진이 가야 할 방향을 지금 이 영감님에게 말해 주는 것이었다.

    “큰 형님께서도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조직 생활을 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요. 지금은 시대는 법보다 주먹이 앞선다고 하지만, 곧 있으면 법이 주먹을 누르는 때가 올 겁니다.”

    “저번에 말했던 그거냐? 우리도 회사원들처럼 넥타이 매고 살아야 한다는 거.”

    “예. 화진이란 이름을 깨끗하게 빨래해서 다른 대기업처럼 국민의 질타와 멸시를 받을지언정 공권력에게 소탕당하지 않는, 그런 영원한 조직을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들이라고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아도, 정작 민중의 지팡이는 대기업을 향해 칼을 휘두르지 못한다. 설사 휘두른다고 해도 그건 그냥 보여주기식일 때가 많다.

    “지금이야 제가 페이퍼 컴퍼니를 내세워 신분을 세탁한다고 하지만, 화진이 새롭게 출범해 날개를 펴고 나면 미국에서도 그 이름을 쓸 수 있을 겁니다.”

    내 말에 권용일은 진중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넌 우리가 회사를 세운다고 하면, 어디 쪽부터 건드렸으면 좋겠냐?”

    저건 어느 분야로 화진이 출범하면 좋겠냐는 질문이다. 분명 저 영감은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을 터.

    그게 뭔지는 이미 나도 알고 있지 않은가.

    “건설과 화학 쪽이 가장 낫다고 생각합니다.”

    권용일의 표정이 달라졌다. 내가 옳은 대답을 내놓은 것이다.

    그는 짐짓 모른 척하며 내게 다시 물었다.

    “건설과 화학?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당연히 권용일이 그렇게 시작했고, 또 그 두 개로 성공을 이뤘으니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불과하다.

    “건설은 우리 조직에서 발을 담그고 있는 게 꽤 되지 않습니까? 입찰부터 보호까지 받는 곳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화학이란 분야는 무기를 만드는 곳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군부와 손잡고 돈놀이하는 분야입니다. 우리 화진에게 딱 어울리는 일이죠.”

    80년대 건설업은 조직폭력배와 연관이 된 일이다. 그리고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업종이기도 하다. 90년도 후반까지 건설업은 강남을 비롯한 여러 부지의 활발한 개발로 인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다.

    물론, 불경기가 시작되면서 건설업은 오히려 기업의 등골을 빼 먹는 거머리로 취급받게 되지만.

    “건설업은 조금만 준비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화학은 결국 군부와 얼마나 쇼부를 잘 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지 않습니까?”

    화진은 단기간에 성장을 이루는 대기업으로 발전한다. 그 이유로는 빠르게 건설과 화학 부문에 뛰어든 덕에 시기적절한 것이었다.

    거기다가 화학 산업은 무시무시한 방산 비리를 뽑아내게 되는데, 수차례 정권이 바뀌어도 유독 방산 비리만큼은 뿌리를 뽑지 못해 더욱 성장세를 받게 된다.

    그만큼 방산 비리에 연관이 된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자칫 정권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그냥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건드린다.

    쉽게 말해서 자기 밥그릇 빼앗기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밑에 있는 똘마니들 밥그릇을 빼앗을 수도 없어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이다.

    “네 말이 맞다. 지금 별 달고 있는 새끼 중 때 안 낀 손이 없지. 그리고 그놈들은 우리와 한패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는 놈들이니까.”

    화진파가 끝까지 살아남아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던 가장 큰 요인은 군부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이 화진을 키워 주고, 화진은 그들에게 조공을 바치니 서로 윈윈하는 전략이다.

    이 영감도 그걸 알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군부는 때를 묻히지 않는 한 별을 달을 수가 없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튼튼한 자본력이 없다면 절대 위로 올라갈 수도 없다.

    그렇기에 이제 막 군 생활을 시작한 소위부터, 정점에 올라간 국방부 장관까지 서슴지 않고 비리를 저지른다.

    북한과의 긴장이 계속되는 한, 멈추지 않는 돈줄.

    이것이 방산 비리가 사라질 수 없는 이유다.

    당장 국방부 장관과 장성들이 방산 비리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는데, 누가 감히 건드릴 생각을 하겠는가.

    “제가 볼 땐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습니다. 우리 같은 깡패들이 거리에서 사라질 날이 말이죠.”

    권용일은 침음을 짙게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영감도 나름 내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권용일도 그런 상황이 곧 온다는 걸 예측하고 있었으니까.

    내 말대로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때가.

    * * *

    “새끼. 치사하게 혼자서 재미 좀 보고 왔다며?”

    권용일 다음으론 성일환이 있는 명동 사무실을 들렀다. 하지만 성일환은 없고, 황규혁이 있었다.

    “재미라뇨. 솔직히 무서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칼도 아니고 총알이 사방에서 휭휭 날아다니니….”

    “또 어울리지도 않을 엄살 부리기는. 이미 다 들었어, 인마. 네가 거기 있는 새끼들 대가리를 다 터트려 주고 왔다던데?”

    “운이 좋았던 것뿐이죠.”

    “또 그놈의 운 타령한다.”

    황규혁이 핀잔을 주긴 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운이 좋았다.

    “한잔할래?”

    “저 술 잘 안 마시잖아요.”

    “막상 까면 혼자 다 마시는 놈이…. 됐고 잔이나 받아.”

    난 못이기는 척하며 황규혁이 주는 잔을 받았다.

    “성일환 형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곧 있으면 오실 거야. 요즘 네가 싸지른 거 때문에 바쁘시다. 박두기가 뒤지는 바람에 전부 덤터기 쓰셨잖아. 너 돌아오면 아주 곤죽을 내 버릴 거라고 얼마나 이를 가셨는데.”

    “그럼… 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흐흐. 네가 얻어터지는 진귀한 장면을 안 볼 수야 없지.”

    황규혁과 오랜만에 술잔을 같이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성일환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너 이 새끼…!”

    성일환은 오자마자 내 윗머리를 세게 쓰다듬었다.

    “어디 안 다쳤냐? 아주 영화 한 편을 찍고 왔다며?”

    “그 정도까진 아니었습니다.”

    “아니긴? 얘기 들어보니까 아주 거하게 날아다녔다던데. 강철중 그놈이 남 칭찬하는 건 내가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넌 정말 대단하다고 하더라.”

    강철중 그 사람이?

    그런 구석이 있는 줄은 몰랐군.

    “정말 별일 아니었어요.”

    “하하. 100만 달러어치 스테로이드제를 거저 가져왔는데, 별일 아니긴. 그것 때문에 큰 형님 귀에 입이 다 걸릴 정도였다.”

    성일환의 칭찬 일색에 황규혁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님. 이놈 오면 아주 작살을 내 버린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응? 아니, 이놈이 이렇게 일을 잘하고 왔는데 내가 어떻게 갈구냐. 그랬다가는 너랑 내가 큰 형님 손에 작살나.”

    황규혁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이 양반은 정말 나를 갈구고 싶었던 건가….

    하긴. 이제까지 한 번도 내게 아쉬운 소리를 하거나 혼낸 적이 없는 양반이니, 후임 기르는 맛이 없긴 하겠다.

    “아무튼, 고생했다. 솔직히 네가 미국 간다고 했을 때 꽤 걱정했는데 말이야. 다른 간부들도 찍소리 못하고, 입 닥치고 있는 모양이야.”

    내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렸던 간부들의 김새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성일환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다시 한번 말했다.

    “정말 고생했어. 앞으로도 쭉 이렇게만 해.”

    “예, 형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요즘 인천 쪽은 어떻습니까?”

    인천 이야기가 나오자 성일환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자리에 앉으며 손을 흔들었다.

    “거긴 생각보다 괜찮아. 처음에는 오성파 새끼들 때문에 신경을 좀 썼는데, 의외로 그놈들 별로 움직임이 없어. 거기다가 너랑 규혁이가 창고 털면서 다른 조직원인 척했다며? 그게 제대로 먹힌 거 같다.”

    단순히 교란 작전을 쓰려고 했던 건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니 다행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애써 키운 연합을 잃은 오성이 가만히 있다는 게 좀 수상했다.

    이놈들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 아닌지….

    하지만 화진파는 커질 대로 커진 곳이다.

    예전에는 몰라도 지금은 화진파와 승부를 벌이려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는 걸 오성이 모르진 않을 터. 그렇기에 더욱 조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오늘 같은 날에 일 이야기하면서 머리 아프긴 싫으니까 다른 얘기나 해. 다들 나가서 술이나 한잔 할까?”

    * * *

    오성파의 역사는 1940년도부터 시작됐다.

    그들은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세력을 키웠고, 광복 후에는 친일파와 손을 잡아 이 나라의 거리를 장악했다. 그리고 일제와 맞서 싸운 독립군들을 핍박하는 등, 온갖 더러운 짓은 서슴지 않고 저지른 조직이다.

    그렇게 40년이 넘는 세월을 거리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오성파가 슬슬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모든 발단은 바로….

    “영등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영등포?”

    “예, 큰 형님.”

    오성파의 2대 두목 이창호는 15년 전 아버지의 대를 이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오른팔인 이재욱의 보고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지?”

    “영남파 일을 기억하십니까?”

    영남파 일이라면 이창호도 분명히 기억한다. 그때 영남파를 도와, 영등포를 장악하자던 간부들을 묻어 버리지 않았던가.

    “알고 있지.”

    “원래대로 라면 그 계획은 성공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꼬이고 말았지요. 바로 김태산이라는 놈이 화진파에 들러붙기 전까지는요.”

    이창호의 집무실에 모인 몇몇 간부들의 헛기침 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이들의 두목인 이창호도 김태산이란 이름을 익히 들어봤다. 하지만 영남파와 무슨 연관이 된 건지는 알지 못했다.

    “자세히 말해 봐.”

    “화진파의 세력이 급속도로 늘어났다는 건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영등포의 영남파, 천성의 여의도, 아편굴 사건, 대룡파 그리고 인천까지. 단기간에 화진이 이 모든 것을 흡수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죠.”

    이창호도 화진파의 괴물 같은 성장 속도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화진은 그렇게 빨리 성장을 할 수 있는 걸까?

    그래서 그는 이재욱을 시켜 화진의 성장 비밀을 알아내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사 결과, 한 사람의 이름이 계속해서 나왔다.

    “그런데 이 불가능 일을 가능케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김태산이죠. 그것도 고작 고등학생 2학년에 불과한 학생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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