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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63화 (63/325)
  • 63화. 사냥 시작 (5)

    “이제 벗겨도 좋아.”

    조금 강한 악센트를 가진 발음으로 누군가가 말했다. 다행히 쓰는 언어가 영어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조직원들은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풀어 주었지만, 내게 겨누고 있던 총구는 거두지 않았다.

    나는 잠시 몇 번 눈을 깜빡이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숏 모히칸 머리에 상의는 벗은 채로 나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히스패닉.

    이 조직에서 한자리를 꿰차고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너야? 건방지게 우리 창고를 보여 달라고 한 놈이?”

    역시, 비즈니스적인 어투는 디에고에게서 밖에 들을 수가 없었다. 이놈은 날 보자마자 적개심 어린 목소리를 드러냈다.

    난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일 처리를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확실한 일 처리? 우리 칼리 카르텔이 너 같은 새끼한테 신뢰를 받지 못할 정도란 말이야?”

    어지간히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시작부터 좀 삐걱거리는 거 같은데….

    나는 내 옆에 있던 디에고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잔뜩 흥분해 있는 남성을 살살 달래었다.

    “하하. 어차피 저분은 대리인이지 않습니까?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니, 저분을 책망해 봤자 득이 될 건 없어요.”

    디에고의 중재에 남성은 혼잣말로 욕설을 내뱉다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조직원들이 나와 디에고를 천천히 인도했다.

    “스테로이드제를 원한다고 했었나?”

    종이에 돌돌 말아진 뭔가를 피던 남성은, 건들거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아마 저 특유의 냄새를 보니 대마초를 피는 것처럼 보였다.

    “예.”

    “정확히 어느 정도를 원하는데?”

    “4,500만 달러어치.”

    남성은 잠깐 발걸음을 멈추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다시 발을 움직였다.

    “다른 건 필요하지 않은가 봐?”

    “그 정도 돈을 맞춰 줄 수 있는 스테로이드제가 있다면야 전부 구입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뭐, 돈만 준다면야 우리도 상관없지.”

    7번이라고 쓰여 있는 문을 지키던 조직원 두 명이 남성을 알아보고 자물쇠를 열기 시작했다.

    “가서 봐. 네가 원하는 게 전부 다 저기 있으니까.”

    나는 남성의 말에 따라 조직원 몇 명과 함께 문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수백 개의 박스들이 안을 채우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열어보니 디에고가 내게 보여 준 스테로이드제 샘플과 똑같았다.

    “개당 3천 달러. 어때?”

    이런 사기꾼 같은 놈.

    개당 1천 달러에 팔아넘긴 로이 놈도 바가지를 씌운다고 속으로 욕했는데, 이놈은 그것에 세 배 가격을 후려치고 있었다.

    ‘미친 새끼’라는 말이 목까지 차고 올랐지만, 난 꾹 삼키며 미소를 보였다.

    “3천 달러…. 저희는 1천으로 생각했는데, 너무 비싸게 받으시는 거 아닙니까?”

    “네가 여길 보여 달라고 하지 않았으면 나도 3천까지 안 끌어올렸어. 그리고 날 개고생 시켰으면 합당한 값을 치러야지. 내뺄 생각은 하지 마. 3천에 안 받으면, 넌 살아서 여기 못 나가.”

    오. 살벌한 협박까지.

    이제야 쓰레기 본성이 나오는 건가.

    그동안 디에고가 워낙 예의 바르게 행동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잠깐 이놈들의 습성을 잊고 있었다.

    그래. 이런 식으로 뜯어내겠다, 이거지?

    “디에고. 칼리 카르텔은 메데인처럼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디에고도 상대의 행동에 좀 당황한 눈치였다. 그는 애써 상황을 수습하려고 내게 조용히 말했다.

    “미스터 김. 3천 달러는 결코 많이 비싼 게 아닙니다. 저 정도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약은 어디서 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건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른데요?”

    “뭐야!?”

    내 말을 들은 남성이 버럭 화를 내며 총을 꺼내 들었다.

    “이 새끼가 어디서 수작질이야. 지금 감히 메데인과 칼리를 비교해!?”

    조금 건드려봤다고 저렇게 열을 내기는.

    아무래도 이놈은 칼리 카르텔에서 그다지 높은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저 조심성 없고 막 나가는 행동을 보건대, 머리가 좋아 보이진 않는다.

    차라리 저런 놈이 걸려서 다행이려나.

    잘하면 이놈의 뒤통수를 제대로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협상의 여지가 있지 않습니까?”

    “협상? 개소리하지 말고 개당 3천에 거래해야 한다고. 혹시라도 몰래 여기를 뜰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접는 게 좋아. 네가 미국 뜰 때까지 우리가 가만히 지켜볼 거 같냐?”

    내가 이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날 죽이겠다는 소린데.

    솔직히 이놈이 이 정도로 막 나갈 줄은 몰랐다.

    거대한 조직일수록 거액의 고객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디에고도 당황한 눈치를 보였던 거고….

    도대체 이놈은 뭐지?

    내가 지금 동양인이라고 막 나가는 건가?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어차피 이놈들은 곧 있으면….

    “젠장!”

    아니나 다를까 어떤 조직원 하나가 다급히 안으로 들어오며 알 수 없는 언어로 뭔가를 소리쳤다.

    대충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알 것도 같다.

    로이 루스테가 와 준 건가?

    난 모른 척하며 옆에 있던 디에고에게 슬쩍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디에고는 당혹감 어린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누가 이곳에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누가요? 여길…? 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야 되긴 하지만….”

    디에고는 날 의심쩍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게 협박을 일삼던 저 남자도 총구를 내 머리에 들이밀며 욕설을 내뱉었다.

    “너지? 네가 지금 저 새끼들 끌고 온 거지! 이 새끼, 처음부터 이상했어!”

    난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재빨리 손을 저었다.

    “말 같은 소리를 하십쇼! 나도 당신들만 믿고 여기 왔다가, 아작나게 생겼으니.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거요!”

    “닥쳐, 이 새끼야!”

    남성은 내 얼굴을 총으로 후려쳤다.

    꽤 충격이 컸지만, 쓰러지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상대에게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모르는 일이오! 그리고 여기서 약속합니다.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진 알 수 없어도, 일이 잘 끝나면 개당 3천 달러에 구매할 테니 어서 해결 좀 해보시오!”

    거래를 하겠다는 내 말에 남성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내 그는 내 이마에 겨누던 총구를 내리며 옆에 있던 조직원들에게 뭐라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날 감시하고 있으라는 명령을 내린 게 분명했다.

    “싸가지 하고는…. 저 혹시 피 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나의 장난 섞인 물음에 디에고는 내 얼굴을 빠르게 살피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행히 괜찮은 것 같군요.”

    “하하. 그런가요?”

    “겁나지… 않으십니까?”

    디에고는 이미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그럴 만도 한 게, 지금 그는 조직 간의 싸움에 휘말린 거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이다.

    “글쎄요. 저희 옆에 있는 저 두 분만 없으면 편할 거 같은데.”

    나는 우리를 제대로 감시하지 않은 채 서로 이야기만 나누고 있는 조직원 두 명을 바라보았다. 아마 저놈들도 창고에 적이 쳐들어온 거로 걱정하는 눈치였다.

    “디에고 씨. 저 두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들입니까?”

    “그거야… 콜롬비아 사람일 겁니다.”

    “그럼, 디에고 씨는 멕시코인이죠?”

    “그렇습니다.”

    역시, 이름부터가 멕시코인 같았는데 맞았군.

    “그렇다면 칼리 카르텔과는 무슨 관계세요? 보니까 그냥 브로커는 아닌 거 같던데. 혹시 칼리에서 일하십니까?”

    디에고는 조금 난처한 얼굴을 보이다 이내 깨끗하게 인정했다.

    “맞습니다. 원래는 브로커였다가 칼리에서 수당을 받으며 일하는 중입니다.”

    “그렇군요…. 그거 안타깝습니다.”

    “예? 그게 무슨….”

    “이따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저 둘부터 해결 좀 하고요.”

    무슨 소리냐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디에고를 뒤로하고, 나는 여전히 서로 떠들고 있는 조직원 두 명에게 다가갔다. 그중 하나의 목을 뒤에서 냅다 팔로 걸어버렸다.

    깜짝 놀란 조직원 하나가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소리치며 내게 총구를 겨누었다. 난 곧바로 내 팔에 붙잡힌 채 아등바등하고 있는 조직원의 자동 소총 회수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탕-!

    시끄러운 총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앞에 있던 조직원은 여러 발의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내 팔에 붙잡혀 옴짝달싹 못 하다 숨이 끊긴 녀석에게도 확인 사살을 했다.

    탕-! 타타탕-!

    권총에 있는 총알이 다 사라질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발포를 했다.

    그리고 난 일단 주변부터 살펴보았다. 다행히 총소리를 듣고 뛰어오는 놈은 없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밖에 총성이 들리는 걸 보니, 메데인과 칼리 카르텔이 서로 교전 중에 있으리라.

    “미, 미스터 김. 가, 갑자기 이게 무슨….”

    “조용히 하고 따라오세요.”

    나는 죽은 조직원의 총을 들고 디에고를 앞장세웠다.

    “자. 총성이 들리는 쪽으로 갑시다. 분명 여기 입구 쪽이겠죠?”

    “미, 미스터 김. 일단 총부터 내려놓으시고….”

    “디에고. 아직 상황 판단이 안 되는 겁니까?”

    디에고는 내 목소리가 험악하게 바뀌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그는 금방 사과하며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떨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미, 미안합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예. 부디 제가 방금 죽인 저 두 명처럼 방아쇠를 당기지 않게 해 주십시오.”

    허튼수작 부리면 당장 쏴버리겠다는 엄포였다.

    이미 숨이 끊어졌음에도, 과도하게 발포한 건 이런 효과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디에고도 바보가 아니라서 조용히 내 말을 따랐다.

    어느 정도 창고 안을 지나자, 슬슬 입구 쪽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총성도 전보다 훨씬 크게 들렸다.

    로이가 아주 이를 갈고 조직원들을 끌고 온 모양이다.

    그래도 가만히 여기서 기다릴 순 없지 않은가. 나는 컨네이너 위에서 한창 전방에다 총질을 하고 있는 놈을 조준했다.

    타앙-!

    거리가 좀 있어서 과연 맞을까 했는데, 내가 군대에서 사격 하나는 끝내주게 한 탓일까.

    이 총의 영점도 나와 아주 잘 맞아, 단 한 발로 적의 가슴을 꿰뚫었다.

    다행스러운 건 한 명이 내 총에 죽었는데도 누구 하나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조금 더 앞으로 다가가 컨테이너 위로 올라가 보았다.

    워낙 사방에서 총을 쏘고 있는 중이라 나는 얼른 포복 자세로 바꾸며 컨테이너 위에 누웠다.

    “저기 숨어 있으세요.”

    디에고는 내 말에 따라 박스 밑에 쭈그려 앉아 숨었다.

    나는 컨테이너 위에서, 혹은 아래에서 메데인과 교전 중인 칼리 카르텔 조직원을 하나씩 노렸다.

    타앙-!

    조준력을 높이기 위해 한 발씩 쏠 때마다 들키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는데, 이놈들은 지금 완전히 전방에다 시선이 빼앗겨 있었다.

    실수로 한 발을 놓쳤지만, 나는 다시 조준해 상대의 머리를 터트렸다. 그러나 저놈들은 웃기게도 앞에서 쏜 총알에 맞은 줄 알고 오히려 더 분개하며 전방만 신경썼다.

    뭐, 나야 땡큐지.

    타앙-! 타탕-!

    이것보다 더 긴장되고 짜릿한 상황이 또 어디 있겠는가.

    총을 쏠 때마다 쓰러지는 칼리 카르텔 조직원들을 바라보며, 나는 묘한 쾌감이 일었다. 사람을 쏘는 게 이번이 처음인데도 저 녀석들의 목숨을 빼앗는 일에 일체 망설임도,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혹시 내가 싸이코패스는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솔직히 간단한 문제이지 않은가.

    이건 내 목숨이 걸린 일이다.

    저놈들을 먼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그리고 나는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다.

    그저 쓰레기를 치우는 중일 뿐.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더 마음이 편해졌다. 난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기며 한 명씩 쓰러뜨렸다. 이놈들도 슬슬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그중 하나가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저, 저 새끼가!”

    내게 총구를 겨누며 협박을 하던 놈이었다. 나는 빠르게 총구를 돌려 놈을 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크아악!”

    이런. 조준을 잘못했나.

    아예 빗나간 건 아니지만, 목숨을 빼앗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래도 왼쪽 어깨를 관통당했으니, 쉽게 움직이진 못할 터.

    “저 개새끼부터 죽여!!”

    콜롬비아 언어라서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사방에서 나를 향해 총알 세례가 쏟아지기 시작했으니까.

    나는 컨테이너에서 내려와 빠르게 몸을 아래로 숨겼다. 녀석들은 단단히 화가 났는지, 몇몇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너무 오랫동안 위에 있었나.

    이러다가는 로이가 오기도 전에 훅 가게 생겼다.

    타타탕-!

    견제용으로 내게 달려오던 조직원들에게 총을 쏘았다. 그중 하나는 총에 맞아 쓰러졌고, 나머지는 양옆에 엄폐물을 찾아 흩어졌다.

    난 계속해서 놈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총을 쐈지만, 점점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었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달칵.

    탄창 세 개에 있던 총알을 전부 다 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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