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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62화 (62/325)
  • 62화. 사냥 시작 (4)

    디에고 이후에도, 나는 다른 브로커들과도 만남을 가졌다. 그래야 칼리 쪽에서 우리가 정말 급하다는 거로 생각해 미끼를 물어볼 게 아닌가.

    물론, 다른 브로커들과 디에고만큼 영양가 있는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역시, 그 사람은 뭔가 있다. 분명 대형 조직에서 나왔다는 느낌이 물씬 풍겨 나온다. 그게 칼리일지, 아니면 전혀 다른 조직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행히 나오셨군요. 혹시라도 어젯밤에 다른 곳과 거래를 하셨으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 군데 알아보긴 했습니다만, 확 마음에 와닿는 곳이 아직 없군요. 그래도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곳이 있긴 합니다.”

    살짝 밑밥을 깔며 디에고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눈매까지 가릴 순 없었다.

    “그럼, 저도 가진 패를 보여드려야겠군요.”

    “어떤 조직과 저희를 연결해 줄 생각이십니까?”

    “하하. 사실, 저도 이리저리 알아보긴 했는데…. 아무래도 귀사와 가장 어울리는 곳은 칼리 카르텔이 어떨까 합니다.”

    됐다!

    이것으로 디에고는 자신이 칼리에서 왔다는 걸 스스로 밝히는 꼴이었다.

    한 번에 미끼를 물어 주다니….

    솔직히 이렇게 빨리 저들이 움직일 줄은 몰랐다. 그만큼 우리의 제안이 매력적으로 보였다는 것일 수도 있고, 그냥 칼리가 급했던 것일 수도 있다.

    “칼리라-. 그곳도 리스트에 올라간 곳이긴 합니다만….”

    바보처럼 좋다구나 하며 덥석 제안을 받아들이진 않았다. 조금 말을 끌어 주며 칼리 말고도 다른 공급처가 있다는 걸 은연중에 보여줘야 한다.

    “칼리 카르텔도 염두에 두고 계셨다니 다행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메데인과 칼리 중에 고민을 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메데인 쪽에서는 컨택을 해 봐도 반응이 없더군요.”

    난 다시 조약돌을 던져 보았고, 디에고의 얼굴은 잘게 물결이 일어난 연못 같았다.

    이 사람은 분명 칼리가 메데인을 공격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메데인의 영향력이 크긴 하지만, 그들은 어느 날부터 갑자기 고착된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곳보다는 차라리 하루가 다르게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는 칼리 카르텔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슬슬 영업을 시작하는 건가.

    저 말대로 메데인이 고착된 상태를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9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 마약 시장을 지배하는 건 메데인이다.

    난 슬쩍 경계를 푸는 모습을 보여주며 디에고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런가요? 확실히 메데인이 크긴 크군요. 4,500만 달러어치의 약을 산다고 해도 반응조차 해 주지 않다니….”

    “하하. 조금 기분이 상하셨나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래도 제 기분이 상한다고, 위의 분들 명령을 거스를 순 없지 않습니까. 메데인이 약은 많이 가지고 있으니, 계속 컨택을 해 보고 있긴 합니다.”

    이 정도 말했으면 저쪽도 의심을 좀 거두었으려나.

    디에고는 다시 한번 내게 은근한 제안을 던졌다.

    “메데인은 지배자라도 된 것 마냥 고객을 등한시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이 주 공급처라는 걸 알기 때문에 오히려 값을 무지막지하게 올리는 경우가 있지요.”

    “메데인보다는 칼리 카르텔을 선택해라?”

    “그렇습니다. 메데인보다는 값도 저렴하고 고객의 신용을 중요시하는 곳입니다.”

    고객의 신용이라.

    이런 말이 마약 조직에게서 나온다는 게 꽤 웃기긴 했다. 하지만 일반 대기업보다 칼리 카르텔 같은 마약 조직이 더 고객의 신용을 우선시한다는 게 웃지 못할 사실이다.

    “디에고 씨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칼리 쪽에 자꾸 시선이 가는군요. 그쪽에서는 저희가 원하는 약의 수량을 채워 줄 수 있겠습니까?”

    “4,500만 달러어치를 말씀하시는 거겠죠?”

    “예. 혹시 가능하다면 직접 약의 상태를 보고 싶군요. 저희가 원하는 1순위 약은 스테로이드제입니다.”

    “샘플이 필요하신 겁니까?”

    직접 약의 상태를 보겠다는 말에 디에고는 별 경계심 없이 받아들였다. 샘플 정도는 문제없이 가져올 수 있을 테니까.

    “예. 바로 가능할까요?”

    “그렇지 않아도 필요하실까 봐 따로 챙겨왔습니다.”

    준비성이 있는 사람이군.

    나는 디에고가 건넨 작은 병 하나를 살펴봤다.

    일전에 확인한 병과 같았지만,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신중을 기해야한다.

    나는 옆에 있던 김아름에게 그 병을 건넸다.

    그녀는 루이와 거래를 했던 때처럼 뚜껑을 열고 몇 방울을 떨어뜨려 세세히 확인을 했다. 이윽고 작업을 마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다.

    칼리 카르텔이 메데인에게서 강탈한 약이 바로 이것이라는 신호였다.

    자. 그렇다면 이제 다시 내 차례인가.

    “약은 이상이 없다고 하는군요.”

    디에고는 나와 김아름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보고 알 수 있는 겁니까?”

    “하하. 저희는 전부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 있거든요. 약 하나 판별해 내는 건 일도 아닙니다.”

    “그렇군요. 귀사가 얼마나 성장할지 기대가 됩니다.”

    이 정도면 거래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디에고는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더 있었다.

    “약의 퀄리티는 확인이 되긴 했지만, 문제는 정말 이 퀄리티를 유지하는 약을 저희에게 넘길 수 있느냐가 문제군요. 그것도 4,500만 달러어치의 약을 말입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칼리 카르텔이 메데인만큼은 아니지만, 메데인 다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세력이 크니까요. 당연히 취급하는 물품의 종류와 양도 상당합니다.”

    “물론 저도 디에고 씨의 말씀을 믿습니다. 하지만 제가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아시지 않습니까. 이쪽 세상이 어떤지. 조금이라도 일에 차질이 생기면 그대로 제 목이 날아가는 겁니다.”

    내가 조금 비굴한 어투로 말하자 디에고도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약의 수량을 확인하겠다는 건, 칼리 카르텔의 창고를 방문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자칫 잘못하면 창고가 노출돼 습격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은가.

    메데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기에는 좀 힘든가요?”

    “아무래도 보안상 문제가 있다 보니…. 창고를 보여드리는 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4,500만 달러가 걸린 거래이지 않습니까? 제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다면 위에서도 이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정 안 된다고 하신다면야…. 혹시 칼리 카르텔 말고 다른 곳을 알아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제 내가 던질 수 있는 패는 모두 던졌다. 마지막에 블러핑까지 던지는 걸 잊지 않았다.

    과연 디에고는 내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지금 당장 확답을 드리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적어도 1단계는 통과한 걸까.

    단박에 거절을 하기보다 두루뭉술하게 답을 주었다는 건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좋습니다.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죠. 그리고 그분들께 꼭 전해주세요. 위치 노출이 걱정된다면 눈이라도 가려서 데려가라고요. 그럼 제가 그곳이 어딘지 알 길이 없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니, 저도 힘내서 그쪽을 설득해 봐야겠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하루하루 똥줄이 타서 미치겠습니다. 얼른 이번 일을 마무리 짓고 싶군요.”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디에고는 벗어두었던 둥근 모자를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 좋은 소식 가지고 오겠습니다.”

    절반은 됐다고 봐야 하나?

    * * *

    “하하! 대단한데? 베짱이 정말 장난이 아니네.”

    로이 루스테는 나와 디에고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두 듣고는 박장대소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까지 치켜들며 나를 칭찬하기 바빴다.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이런 중요한 직책을 맡았는지 알 거 같다. 그래서, 칼리 놈들이 넘어올 거 같아?”

    “그들도 빨리 약을 해치우고 싶을 겁니다. 언제 또 다른 놈들에게 공격을 받아 약을 빼앗길지 모르니까요. 거기다가 저는 값을 좀 올려서라도 빨리 약을 구매하고자 하는 고객이지 않습니까? 쉽게 거절하진 못할 겁니다.”

    “듣고 보니 그러네. 나 같아도 덥석 물었을걸? 어차피 창고야 언제든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되는 거니까.”

    로이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칼리 쪽에서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문제는 로이가 맡은 임무를 잘 수행해 낼 수 있느냐였다.

    “제 눈을 전부 가려도 괜찮으니 그쪽 창고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만약 저쪽에서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면….”

    “알아, 걱정하지 마. 미행하는 건 우리 전문이야. 이미 곳곳에 우리 애들을 풀어놨어. 미안한 말이지만, 움직이는 동선 모두에 우리가 따라 붙어있었어. 의심 가는 구역에는 전부 뿌려놨으니까, 너 태운 차량을 발견하면 바로 움직일 거야.”

    “예상은 하던 거지만…. 연락망은 확실하겠죠?”

    “우리 메데인이야.”

    걱정하지 말라며 자신감을 드러내는 로이를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칼리한테는 왜 당한 겁니까?”

    “그, 그거야….”

    “아무튼, 이번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잘못하면 제 목숨이 날아가요.”

    “하하. 내가 우리 리틀 보스 목숨은 꼭 살려 주지. 우리 생각보다 일 잘해.”

    “믿겠습니다.”

    로이는 한쪽 눈을 찡긋 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잘해 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로이가 제대로 일을 해 주지 못하면 내가 위험해진다. 그냥 생으로 4,500만 달러를 날릴 수도 있고.

    * * *

    “좋은 소식입니다, 미스터 김.”

    다음 날 다시 만나게 된 디에고는 밝은 얼굴로 운을 뗐다.

    “칼리 쪽에서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대신, 눈에 안대를 껴야 하고 무기는 소지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게 아니라면 소지품은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동의하십니까?”

    “의심을 풀 수만 있다면야 원하는 바입니다.”

    결국, 내가 던진 미끼에 걸렸군.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한순간의 실수가 내 목숨을 좌지우지하게 될 것이다.

    “이미 차량은 밑에 대기를 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미스터 김, 혼자 오셔야 합니다. 수행인은 따라올 수 없습니다.”

    수행인이 따라올 수 없다는 말에 김아름과 강철중이 조금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이건 예상한 일이다.

    “알겠습니다. 밑으로 내려가면 되겠죠? 먼저 내려가 계세요.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예. 그럼….”

    디에고가 내려가기 무섭게 먼저 말문을 연 건 강철중이었다.

    “혼자서 가시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그럽니까, 혼자서 간다고.”

    “…예?”

    “로이가 차량을 가지고 올 겁니다. 그거 타고 오시면 돼요. 저, 절대 혼자 갈 생각 없습니다. 하하.”

    웃으며 말은 했지만, 김아름과 강철중은 여전히 근심 어린 눈빛을 띠고 있었다.

    내가 혼자 사자굴에 들어간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얼른 오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사장님 신변에 문제가 없도록 서두르겠습니다.”

    “아아. 너무 서두르진 마시고요.”

    나는 김아름과 강철중을 놔두고 밑으로 내려가 보았다.

    80년대 유행했다는 머스탱 차량들이 줄지어 길가에 서 있었다.

    1979년에 일어난 2차 오일쇼크로 인해 미국은 기름을 덜 먹는 소형차가 유행하게 된다. 하지만 쉽게 벌고 쉽게 쓰는 이런 놈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나라 이야기였다.

    나는 디에고가 손짓하는 곳으로 다가가 보았다.

    사브 900 터보. 1978년부터 1998년까지, 약 20년간 생산된 럭셔리 차량이다.

    뒷좌석과 앞 좌석에는 험악하게 생긴 조직원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하. 원래 눈빛이 저런 사람들이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한두 번 보는 풍경이 아니니까요.”

    “예. 그럼, 잠시 눈을….”

    디에고는 안대를 꺼내 빠르게 내 눈을 가렸다. 곧이어 차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어디인지 모를 칼리 카르텔의 본거지로 가는 동안 우린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긴장되지 않는다면 허세일 것이다.

    왜 긴장이 되지 않겠는가?

    두 손에 식은땀을 가득 쥐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런데도 이 상황이 결코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칼리 카르텔을 낚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짜릿함을 선사한다.

    역시, 이것도 직업병인가.

    나는 차량이 멈출 것을 기다리며, 뒷좌석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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