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화끈한 마무리 (2)
“내 그럴 줄 알았다. 내가 말했잖아. 그 새끼가 너무 쉽게 받아들인 것 같다고.”
연욱이는 폭풍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마지막에는 그렇게 막살다가는 회귀 전과 똑같이 뒤질 거라고 악담까지 퍼부었다.
“알았어. 그리고 결과도 나쁘지 않았잖아. 내가 네 말 듣고 정식이도 일부러 데려와서, 박두기도 밀어냈고.”
“주둥이 뚫렸다고 말은 잘해요. 솔직히 말해서 이진용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냐? 아마 난리가 났을 거다. 고등학생들이 연합 같은 걸 만들어서 조직폭력배랑 싸울 정도로 막 나간다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을걸?”
아무래도 이놈,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걸 전부 나한테 푸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이번에는 좀 위험했다. 너무 앞만 보고 달렸고, 앞에 있는 장애물들을 너무 얕보고 말았다.
“조심할게.”
“그래라 좀.”
연욱이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시어머니 같은 잔소리가 끝난 것이다.
“근데 오늘은 또 어디 가려고?”
“박두기 때문에. 영감님이 간부들 전부 다 소집하라고 했어. 나도 가야지.”
“좀 쉬지. 상처도 다 낫지 않았을 텐데.”
“그냥 좀 스친 거밖에 없으니까, 괜찮아.”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어제 전투로 인해 크게 다친 건 없었다. 그냥 가볍게 스친 상처만 조금 있어서 움직이는 데엔 큰 어려움이 없다.
“권용일이 어떻게 나올까? 내부적인 일이기도 하고, 박두기가 권용일 옆에서 오래 있었으니까, 좀 선처를 해 주려나?”
“글쎄다. 그 영감님이 그런 걸 따지려나.”
연욱이의 말처럼 박두기는 권용일 옆에 오랫동안 있던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 대가리로 인천 지역을 맡은 간부가 되었겠지.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권용일이라면….
“일단, 다녀올게.”
과연 권용일이 어떻게 나올지, 벌써 기대가 된다.
* * *
천안 제1곡물창고는 이미 폐허가 된 곳이다. 하지만 성일환에게 듣기로 이곳은 화진파의 사형대 혹은 심판대라고 한다.
즉, 간부 중 잘못을 저지른 놈에게 심판을 내리고 그에 합당한 벌을 주는 것.
그렇다면 누군가 한 명은 죽거나 사지 하나는 날아간다는 건데, 그 주인공이 누가 될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이. 박두기.”
“혀, 형님….”
권용일은 위스키 잔으로 입을 축이고 있었다. 그리고 한 나라의 왕처럼 자리에 앉아, 무릎을 꿇고 있는 박두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 영감님. 포스가 장난이 아닌데?
권용일이 술을 마실 때면 모두 긴장을 한다고 했던가. 과연 그 말대로 술잔을 들고 있는 권용일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험악하게 보였다.
“네가 뭔 잘못을 했는지 알고는 있지?”
“혀, 형님…. 저, 저는 그게….”
박두기가 뭐라 변명을 하려고 하자, 권용일은 들고 있던 술잔을 박두기 얼굴에 던져 버렸다.
“그 더러운 입 닥치고 있어, 이 배신자 새끼야!”
유리잔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은 박두기가 작게 신음도 뱉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깨진 유리가 이마에 박혀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지만, 권용일의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
권용일이 다시 새 잔으로 술을 채우고, 세 모금을 마실 때까지 침묵의 시간이 계속됐다. 그러다 무겁게 운을 뗀 것은 이진용이었다.
“형님. 모든 것은 제 불찰입니다. 아랫사람을 관리하지 못한 저를 탓해 주십시오.”
권용일은 그런 이진용을 사납게 노려보며 그를 불렀다.
“진용아.”
“예, 형님.”
“내 아랫사람을 네 아랫사람인 것 마냥 말하는 버르장머린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거냐?”
저 독사 이진용도 권용일 앞에서는 맹수 앞에 있는 토끼에 불과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슬며시 뒤로 물러났다. 여기서 괜히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는, 박두기 꼴이 난다는 걸 모르지 않는 것이다.
“여기 계신 모든 대가리들. 이 늙은이가 하나만 묻자. 내가 지금 나이 좀 처먹었다고 무시라도 하는 거냐?”
“아닙니다!”
“아니면, 내가 예전 성질 다 버리고 요즘은 부드럽게 말하니까 우습게 보이는 거냐?”
“아닙니다!”
“아니면!”
권용일은 의자 손잡이를 세게 친 다음, 간부들을 천천히 살펴봤다. 모두 잔뜩 긴장한 얼굴로 감히 권용일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오롯이 박두기 저 새끼만의 문제냐? 그게 아니라면 여기 있는 모든 놈이 저 새끼랑 같은 생각인 거냐?”
“아닙니다!”
마치 군대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내무반 풍경 같았다.
최고참이 아랫것들을 전부 불러 모아 한마디 할 때마다 다들 ‘아닙니다’를 복창하는 모습이라-.
나이 좀 먹은 간부들이 저러고 있으니, 뭔가 웃기기도 하고…. 권용일의 포스가 참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불만 있는 새끼들은 언제든 말해.”
권용일은 입고 있던 셔츠를 풀어헤쳤다. 그리고 그 안에 드러난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아수라장을 뚫고 왔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몸 구석구석에 나 있던 흉터에는 뼈가 부러졌던 자국도 있고, 칼이 몇 번이나 살을 뚫고 지나간 흔적도 있었다. 하지만 저 나이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근육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꺼내며 상 위에 꽂았다.
“내가 다시 말하겠는데, 여기 있는 놈 중 내 자리가 탐나는 새끼가 있으면 언제라도 상관없으니까 한판 뜨자고 해. 내가 나이는 먹었지만, 여기서 너희들 전부 덤빈다고 해도 무섭지 않아.”
시답잖은 허세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영감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굉장히 사나웠다.
“박두기.”
“예, 형님!”
꾹 다물고 있던 입을 드디어 열게 된 박두기는 참고 있던 진한 신음을 함께 터트리며 대답했다.
“네가 내 밑에서 구른 지 얼마나 됐지?”
“십오 년 됐습니다!”
“십오 년…. 우리 두기가 내 뒤를 참 길게도 따라와 줬네.”
“….”
뭔가 갑자기 분위기가 다운되는 게 좀 이상하다.
박두기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권용일에게 싹싹 빌었다.
“형님. 제가 정말 죽을 죄를 졌습니다.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허허. 네가 죽을 죄를 지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네.”
“물론입니다. 하지만 제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신다면 정말 열심히 형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래. 물론 그래야지. 우리 두기가 지금까지 해 온 게 있으니까.”
권용일은 껄껄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박두기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어나.”
“형님….”
박두기는 살짝 감동한 목소리로 울먹였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했더니, 설마 정말 봐 주기라도 하는 건가?
십오 년 동안 권용일 옆에 붙어 있던 사람이 박두기다. 아무리 썩은 놈이라도 그 오랜 정을 떼어낼 순 없다는 것인가.
박두기가 권용일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저것은 마치 자신이 이겼다는 듯한 회심의 미소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 이렇게 넘어가다니…!
뻐억-!
“컥-!”
하지만 태세가 전환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박두기는 다시 무릎을 꺾었다. 복부를 강타한 권용일의 주먹에 숨을 헐떡이면서….
역시, 이 일을 영감님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않은가.
저 양반은 누가 자신 옆에 오래 있었다는 거로 이런 것을 따지지 않는다.
‘필요하다, 필요하지 않다’로 나눌 뿐.
“일어나.”
박두기도 덩치가 우람한 사람이다. 근데 권용일의 주먹 한 방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꺽꺽’ 소리만 내고 있다.
“일어나라고.”
권요일은 그런 박두기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강제로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그의 주먹이 박두기의 복부에 정확하게 꽂혔다.
“커컥-!”
박두기는 또 한 번 바닥에 쓰러졌다.
“덩치도 큰 새끼가 뭘 자꾸 쓰러져 있어?”
저건 절대 쇼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주먹에 맞고 쓰러지는 건, 수도 없이 봐왔다. 그중에서 일부러 맞아 주는 척을 하는 사람이 있고, 정말 충격이 커서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다.
당연히 박두기는 후자다.
그것도 굉장한 악력이 실린 주먹에 맞아 저렇게 토악질을 하면서까지 괴로워하는 것이다.
“일어나.”
“꺼 억-. 커헉… 컥.”
“이 새끼가 일어나라니까.”
이번에도 권용일의 주먹이 박두기의 몸을 강타했다.
몇 대 맞지도 않았는데, 박두기는 몸부림까지 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저 영감 주먹이 그렇게 매섭단 말인가?
“이 새끼가 똑바로 일어서라니까.”
상대방이 게거품을 물면서 아등바등하고 있는데, 권용일의 주먹에는 일말의 자비심도 보이지 않았다.
“새끼가 뒤룩뒤룩 살만 쪄서, 뭐 이렇게 맷집이 약해? 벌떡 안 일어나!?”
권용일은 계속해서 박두기에게 무참히 주먹을 날렸다.
간부들은 미간을 조금씩 찌푸리며, 점점 피떡이 돼가는 박두기를 지켜봤다. 박두기는 결국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져 권용일 손에 간신히 붙들려 있을 정도였다.
“왜 그래, 두기야. 형, 아직 시작도 안 했다.”
“혀… 형님. 제, 제발. 사, 살려 주십….”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권용일은 박두기 옆구리에 다시 주먹을 날렸다. 그때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박두기가 격한 신음을 터트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뼈가 부러지기라도 한 건가. 그에 비해 권용일은 아주 멀쩡해 보였다.
보통 사람 뼈를 부러지게 할 정도의 주먹이면, 권용일 손도 분명 골절이 되거나 뼈에 금이 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쉼 없이 박두기를 구타하는 걸 보면, 주먹에 뭐라도 낀 게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권용일의 양쪽 손 모두 맨주먹이었다.
“왜, 여기가 많이 아프냐?”
권용일은 일부러 박두기의 왼쪽 옆구리를 발로 세게 찼다. 방금 전 권용일 손에 부러진 곳을 차는 것이었다.
“나도 네가 이 형을 배신했을 때 똑같이 아팠다.”
“제, 제발! 혀, 형님!”
“입 닥쳐, 이 새끼야.”
박두기는 살려달라고 괴성을 지르며 바닥에서 몸부림을 쳤다.
저걸 맞고 기절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그런데 권용일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박두기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결국, 박두기는 네 번을 더 맞고 기절했다.
잔인한 건 권용일이 기절한 박두기를 일으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뭐해? 저 새끼 일으켜.”
권용일의 명령에, 그와 눈이 마주친 간부들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쓰러진 박두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기절한 사람이 일어나봤자, 오징어처럼 늘어질 뿐이다.
화가 난 권용일이 간부들에게 고성을 질렀다.
“찬물이라도 뿌려야 일어날 거 아니야, 이 답답한 새끼들아! 너희들이 대신 처맞고 싶어!?”
번쩍 정신을 차린 간부들이 어디선가 양동이에 담긴 물을 허겁지겁 가져오곤 박두기에게 뿌렸다.
“어푸-!”
안타깝게도 박두기는 정신을 차렸다. 보는 내가 다 안쓰러울 지경이다.
“이제야 정신 차렸네.”
정신은 차렸다만, 반쯤 정신이 나가 있던 박두기는 계속 잘못했다는 말을 중얼거리듯 반복했다. 하지만 권용일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박두기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박두기가 힘없이 날아가자 다시 간부들에게 불똥이 튀었다.
“똑바로 안 잡고 뭐 해! 너희들이 저 새끼 대신 맞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간부들은 말단 조직원이라도 된 것 마냥 우왕좌왕 거렸다.
그렇게 박두기는 간부들 손에 붙들려 권용일의 샌드백 신세가 되었다.
한 대씩 권용일의 주먹이 박두기 턱을 강타할 때마다 붉은 핏물과 함께 하얀 이빨들이 부산물로 딸려 날아간다. 나중에는 날아갈 이빨도 없어, 핏물만 사방에 튈 뿐이었다.
처음에는 작게라도 신음을 터트리던 박두기는 한 대 때려도 인형처럼 픽 소리만 날 뿐, 꿈틀거리지도 않았다.
그제야 권용일도 구타를 멈추고 옆에 있던 성일환에게 손을 건넸다.
“술 한 잔 줘 봐.”
“예, 형님.”
성일환은 조심스레 잔을 들어 권용일 손에 쥐여 주었다.
그는 깨끗하게 잔을 비운 뒤,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박두기를 양쪽에서 부축하고 있던 간부들도 살살 눈치를 보며 각자 자리에 돌아왔다.
권용일은 한동안 말없이 술을 마시면서 목을 축였다. 거의 이십분 가량 사람을 구타하고도 숨 한 번 헐떡이지 않는 권용일의 체력에 난 속으로 혀를 찼다.
결국, 술 한 병을 다 비우고 나서야 권용일은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낸다. 다음에는 너희들 손모가지 하나씩은 내놓을 각오해. 그리고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불만이 있으면 칼이나 총 들고 나한테 찾아와. 상대해 줄 테니까.”
“….”
권용일의 엄포에 누구도 감히 반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권용일이 눈을 부릅뜨며 언성을 높였다.
“왜 대답이 없어!”
몸을 들썩이던 간부들은 큰 목소리로 권용일에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큰 형님!”
권용일은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박두기를 가리키며 성일환에게 말했다.
“저 새끼는 바다에 던져. 그리고 인천은 성일환 네가 잠깐 맡아.”
“예, 형님.”
대답을 들은 권용일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간부들도 전부 기립하며 창고 밖을 나서는 권용일의 등 뒤로 허리를 반듯하게 꺾었다.
두려움의 상징으로 간부들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화진파의 왕, 권용일.
저것이다.
내가 잠시 잊고 있던 권용일의 진정한 모습이.
참 화끈한 마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