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황제와의 만남(1)
어린 녀석이 뜬금없이 찾아와 다짜고짜 거래를 하자고 하니, 이철호 입장에서는 참 황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쉽사리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얼굴을 가졌다.
이철호 회장이 철면을 가졌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거래? 내가 원하는 걸 과연 네가 줄 수 있을까? 그전에, 내가 원하는 게 뭔지는 알고 그러는 거냐? 거래라는 건 한쪽만 원해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어.”
호기심과 비웃음이 적절하게 섞인 어투였다. 이철호는 어디 한번 지껄여나 보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난 싱긋 미소를 지었다.
당신 오늘, 철없는 자식새끼 때문에 땡 잡은 줄 아쇼.
“회장님께서 원하시는 게 뭔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안다고? 그게 뭔데?”
“눈엣가시 같은 놈들을 뜯어내고 싶지 않으십니까?”
나의 말에 이철호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내가 말한 눈엣가시가 무엇인지 그는 금방 알아들은 것이다.
“….”
하지만 별다른 말이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거겠지? 그럼 조금 더 확실하게 찔러주면 될 것이다.
“언제까지 금양 그룹에 밀릴 순 없지 않습니까? 그놈들을 완전히 밀어낼 순 없지만, 제대로 한 방 먹일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편하게 착석을 하고 있던 이철호의 자세가 달라졌다. 그는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이며 흥미를 드러냈다.
“금양 그룹에게 한 방 먹일 방법?”
“예. 이 정도면 거래가 되겠습니까?”
“글쎄. 네가 어떻게 말하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아직 좀 더 들어보겠다는 건가?
바라는 바다.
몇 년 더 있으면 천성 전자가 대한민국의 돈을 쓸어 담게 되지만, 지금은 금양 그룹에게 밀리고 있는 시기다.
반도체 사업이 천성을 일으키고, 반대로 금양을 폭삭 내려앉게 만들지 않던가.
금양은 정부에게 반도체 사업을 빼앗기게 되고, 천성은 더욱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게 되어 세계 1위라는 타이틀을 거머쥔다.
그러나 아직은 천성이 금양에게 밀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천성과 금양은 엄연히 사돈 관계로 맺어져 있다. 하지만 이철호 회장이 전자 쪽에 진출하겠다는 발표를 하자마자, 두 대기업 사이는 완전히 틀어졌다.
겉은 사돈일진 몰라도, 지금은 서로 소리 없는 총탄을 퍼붓고 있는 철천지원수다.
“지금 당장 금양 그룹을 넘어설 방법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어차피 이대로만 가면 천성은 금양을 넘어설 겁니다. 하지만 지금 회장님께서 원하시는 건 금양에게 제대로 된 펀치를 날리고 싶은 게 아닙니까?”
“제대로 된 펀치?”
“예. 항상 천성을 깔보고 있는 사돈에게 카운터펀치를 꽂는 거죠. 그리고 인상을 완전히 구기게 만드는 겁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철호는 대한민국을 장악하기 위한 포석을 깔아 두었다. 판검사들부터 시작해 각 정부 기관을 맡게 될 공무원들에게도 열심히 돈을 뿌리지 않았던가?
이철호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풍족한 생활을 즐긴 그들은 그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더 천성에 충성을 바치게 된다.
천성 장학생들도 차례로 라인을 타고 위로 올라가는 중이다.
이철호는 오랫동안 뿌려온 씨앗을 파종할 것이고, 금양을 짓밟아 대한민국의 선두주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파종의 시기가 되지 않았다.
그동안은 금양이 휘두르는 대로 맞아가며 따라가야 하는 시기.
이철호는 그사이에 카운터펀치를 섞어, 금양의 콧대를 꺾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것이다.
그런 간지러운 부분을 지금 내가 긁어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풉-! 하하하-!”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철호가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잔 하나를 내 앞에 놓았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술이라도… 아니지. 넌 아직 어리니까 음료수나 마셔라.”
윽. 저 양반이 가지고 있는 술이라면 상당히 고급스러운 양주들만 있을 텐데. 이철호가 남다른 애주가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아쉽긴 하지만, 술이나 먹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수화기를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내 방에 시원한 음료수 하나 가져와. 그리고 오늘 일정 있는 거 다 취소해.”
일정까지 모두 취소했다. 그건 내게 모든 시간을 할애하겠다는 것이다. 그만큼 금양에게 쌓인 한이 많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이철호는 다시 내 앞에 앉아 몸을 기울였다.
“혹시라도 내 관심을 끌기 위해서 괜한 소리를 꺼낸 거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제가 멍청이도 아니고, 설마 그러겠습니까?”
“좋아. 그럼, 어디 한 번 들어볼까? 우리 대단하신 김태산 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실지?”
이철호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매년 금양 그룹을 누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 봤겠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을 것이다.
아직 대한민국 1위 기업은 금양이지, 천성이 아니다.
항상 1등만을 고집하는 이철호는 아마 지금도 도끼를 가는 중일 것이다. 언제라도 금양에게 제대로 된 한 방을 날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모든 일정을 취소하면서까지 내게 시간을 쏟는 것이 아니겠는가?
“천성이 지금 레이스를 같이 하고 있는 일본 기업이 있습니까?”
“몇 군데 있긴 하지. 그게 왜?”
“그중에서 닌텐도라는 기업을 혹시 있습니까?”
“닌텐도?”
이철호는 잠시 고개를 위로 올리더니, 이내 무릎을 ‘탁’ 쳤다.
“아, 그렇지. 그놈들은 게임 만드는 회사지? 장난감도 만들고.”
“알고 계시는군요.”
“그 회사는 우리 회사랑 전혀 관련이 없어.”
닌텐도라는 이름을 몇 번 들어보긴 했나 보다. 그러나 크게 관심을 보이진 않는 듯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닌텐도는 이제 막 성장세를 타서 일본을 강타하고 있는 시기다.
“닌텐도. 그 회사를 꼭 붙잡으셔야 합니다. 바짓가랑이를 잡고서라도 그 회사가 만드는 제품들을 전부 한국에 들여오셔야 해요.”
83년도에 나온 페미컴에 이어, 90년도에 등장하는 슈퍼 페미컴으로 닌텐도가 어마어마한 히트를 치게 된다.
90년도에는 무려 1천억 엔에 달하는 경상이익을 달성하는데, 이는 대마, 금양, 천성 그룹의 경상이익을 합친 값보다 더 많은 액수였다.
그만큼 닌텐도의 열풍은 허리케인처럼 전 세계를 휩쓸어 버린다.
물론, 누구도 닌텐도가 그런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회귀 전에, 닌텐도 3대 사장인 야마우치 히로시도 이 정도의 성공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회고한 것을 기사로 본 기억이 있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제대로 알지 못하는 놈들의 제품을 내가 왜 들여와? 어차피 만들어 봐야 애새끼들 장난감밖에 만들지 않을 텐데.”
이철호는 게임기가 가진 엄청난 미래를 아직 그리고 있지 못한다. 곧 세계에 몰아칠 태풍을 직접 맞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게임 관련 사업이 엄청나게 성장한다는 걸 과연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83년에 닌텐도에서 내놓은 페미컴이 벌써 일본에서는 엄청난 유행을 타고 있습니다. 이 유행이 일본에서 끝나진 않을 겁니다. 분명 닌텐도는 자신들의 제품을 세계에 내놓으려 할 겁니다. 그때 기차를 잡으려고 하면 늦습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철호는 잔에 담긴 술을 들이켠 뒤,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휴-. 그럼 그렇지. 내가 괜히 너한테 시간을 허비한 거 같다.”
역시, 이철호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일본 기업과 손을 잡아, 철옹성처럼 단단한 금양에게 어떠한 흠집도 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일본 기업과 손을 잡아? 지금 일본이랑 잘못 엮이면 안 돼. 가뜩이나 일본 타도를 외치는 놈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 줄 아는 거냐? 차라리 그놈들을 두들겨 패면 모를까.”
회사의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일본 기업과 손을 잡지 않는 게 맞다. 그들을 추월해서 이기지 못할망정, 손을 잡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이철호의 마음이, 다음 회장 자리를 역임하게 되는 이강찬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일까? 그래서 천성이 기어코 일본을 뛰어넘는 기술력을 가지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필요한 걸 이철호가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철호는 금양이 쪽도 못 쓰고 당하는 꼴을 보고 싶어 한다.
그 방법은 내 손에 있지 않은가?
“회장님께서는 그래봐야 고작 게임이지 않냐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지만, 게임의 힘을 무시하시면 안 됩니다. 인간이란 항상 재미와 쾌락을 추구하지 않습니까? 게임이 그들의 욕구를 풀어 줄 수단이 되는 시대가 곧 올 겁니다.”
“재밌는 소리를 하는구나. 고작 그런 게임기가 인간의 욕구를 풀어 준다?”
“예. 시대가 빨리 변화하는 만큼, 게임도 변화를 합니다. 인간이란 자신의 상상을 자극하는, 현실 세계에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을 무언가를 통해 이루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게임이라는 요소가 그것을 풀어 줄 훌륭한 도구가 될 겁니다.”
한 번 게임에 빠지면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건 게임만큼 피드백이 빠른 게 또 없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에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한다. 원하는 게 크면 클수록 그 대가도 커진다. 또한, 과연 자신이 옳은 길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생기기 마련.
그에 반해 게임은 쉬운 조작으로 금방 결과가 나온다. 그리고 목표도 아주 정확하다. 이런 피드백이 계속되면 뇌는 몰입을 하게 되는데, 이때 분비되는 도파민이 행복이란 감정을 만들어 게임을 멈출 수 없게 만든다.
바로 이것이 게임 중독자가 되는 패턴이다.
“욕구를 풀어 줄 훌륭한 도구라-. 누구랑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구나.”
누구랑 똑같은 소리를 했다고?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을 보는 능력이 뛰어난 것 같다.
내가 아는 미래에서는 천성이 게임 산업에 뒤늦게 뛰어들었다가 쪽박을 찬 것으로 알고 있다.
닌텐도가 어마어마한 성공을 이루는 것을 보고, 여러 전자계열 기업들이 게임 산업에 불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전부 게임 산업을 말아먹는 기염을 토해냈다.
그나마 늦게 닌텐도와 계약을 맺은 대마 전자만 재미를 봤다. 물론, 늦은 시기에 닌텐도와 계약을 맺은 탓에 대마 전자가 엄청난 갑질을 당하게 된다.
천성이 그런 꼴을 당하기 전에 누구보다도 먼저 닌텐도를 잡아 동일 선상에서 출발을 해야 한다. 아직 닌텐도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기 전이니까.
“혹시 그게 누군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내 뇌리에 스치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회귀 전에는 천성 전자를 조사할 때 털어야 할 인물 리스트였겠지만, 지금은 대한민국 전자산업을 최고조까지 끌어 올린 사람들로 떠올렸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강찬이라고. 우리 셋째 아들.”
순간, 나는 망치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천성 전자를 1위 반도체 기업으로 이끈 권대현이나 신정일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강찬이 그런 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
하긴, 권대현과 신정일은 지금쯤 연구소에서 썩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천성에 들어오는 시기는 90년도부터다.
“그렇군요…. 그래서 회장님께서는 셋째 아드님과 제 생각이 전부 틀렸다고 보십니까?”
“지금까지는 그래. 그런데 말이야. 내가 세상 살면서 얻은 지혜는, 무조건 내 생각이 맞다고 고집 피우는 놈은 얼마 못 가 사라진다는 거야.”
이철호가 천성을 세우기 전에 몇 번이나 사업을 말아 먹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무조건 내 생각이 맞다고 고집을 피우면 얼마 못 가 사라진다.’ 이건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면서 얻은 지혜라는 건가?
저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항상 귀를 열고 있으라는 소리다. 조그마한 가능성이라도 탐구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 말씀은….”
“솔직히 너나 강찬이나,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걸로 밖에 안 들려. 적어도 나한테는 말이지. 맘 같아서는 그냥 무시하고 싶은데, 금양 그룹한테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몸이 좀 근질거려서 말이야.”
이철호는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나다. 그래. 강찬이 있지? 그놈 좀 불러.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이강찬을 여기에 부른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젊은 날 이강찬의 모습은 나도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직접 대면한 적도 없어서 실제로 보게 되는 건 처음이다.
이철호가 다지고 간 천성이란 왕국을, 마침내 제국으로 만들어 스스로 황제가 된 인물. 그것이 바로 이강찬이지 않은가?
훗날 실질적인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는 사람을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내가 왜 널 안 쫓아내고 가만히 놔두는지 알고 있냐?”
“쫓아낼 만큼 형편없는 소리였습니까?”
“그럼? 설마 그런 게 먹힐 거로 생각했냐?”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회장님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아무짝 쓸모도 없는 것이었군요.”
“그거야 강찬이가 오면 알게 될 일이고. 아무튼, 내가 널 내쫓지 않고 가만히 들어 준 건 권용일 그 양반 때문이야.”
금양 그룹에게 쪽이라도 주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찌푸리기라도 잡는 건 줄 알았는데, 사실은 권용일 때문이었다?
“그 양반이 널 엄청 아끼잖아. 그 양반이 그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굉장한 신뢰가 느껴진다. 파트너로서 신뢰를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권용일의 능력을 이철호가 그만큼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철호가 지금까지 화진과 손을 잡고 있는 건, 단순히 화진이라는 용병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권용일이라는 사람이 필요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야. 아까도 말했다시피 금양 놈들이 질질 짜는 걸 한번 보고 싶긴 하거든.”
이철호는 음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 이강찬 실장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드디어 왔다. 훗날 대한민국을 정복하게 되는 황제와의 첫 대면이다.
“그래. 들어와.”
이철호의 허락이 떨어지면서 회장실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입구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 두 눈으로 황제의 젊은 날 모습을 똑똑히 보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