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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36화 (36/325)
  • 36화. 황제와의 만남(2)

    “부르셨습니까.”

    이강찬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회장 이철호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힐끔거리는 시선으로 나를 빠르게 훑어봤다.

    “손님이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이철호는 이강찬에게 손짓하며 대꾸했다.

    “일로 와서 앉아. 그리고 서로 인사해라.”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이강찬이 먼저 내게 손을 뻗었다.

    “천성 전자 LSI 사업부 실장, 이강찬이라고 합니다.”

    “김태산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재벌 2세라고 해서 버르장머리 없는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내 옷차림과 얼굴만 봐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놈이라는 걸 알았을 텐데, 깍듯하게 예의를 차린다.

    첫째 이강혁과는 딴판이다.

    회귀 전에도, 이강찬은 아버지 이철호의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고 들었다. 덕분에 어린 이강찬이 재벌 2세랍시고 떵떵거린 적은 없었다지…. 물론, 첫째 이강혁과 둘째 이강우는 완전히 정반대였지만.

    “김태산이라고 하면….”

    공허하게 보였던 이강찬의 눈빛이 아주 잠깐 살아났다.

    날 알고 있기라도 하는 건가?

    “첫째 형님이 신세를 졌다던 그분이시군요.”

    아, 이강혁과 내가 여의도를 두고 싸웠다는 걸 알았군.

    이강찬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난 그런 이강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성 그룹의 2대 회장이 될 이강찬.

    평소에도 말이 지극히 없으며, 칩거 생활을 즐긴다. 주변 사람들 말을 빌려보면, 그는 항상 명상하듯 말없이 자리에 앉아 며칠 동안 움직이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이사들을 불러 모아 아이디어를 내놓거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침묵의 지휘자.

    이것이 이강찬을 부르는 또 다른 수식어이기도 하다.

    “강찬아.”

    “예, 회장님.”

    “이놈이 너랑 똑같은 소리를 하더라.”

    “…예?”

    이강찬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이철호는 재미가 붙었는지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거 있잖아. 네가 저번에 세가인가 뭔가 하는 회사랑 손잡고 게임 산업에 뛰어 들자고 말이야.”

    이철호의 말에 이강찬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네가 그랬지? 게임이란 게 사람들의 욕구를 풀어 줄 적절한 도구가 될 거라고. 그 말을 이놈도 똑같이 하더라.”

    다시 미묘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는 이강찬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빛이 공허해 보이긴 했다.

    “넌, 세가와 손을 잡자고 했었지? 근데 태산이는 닌텐도라는 회사가 낫다고 말하더라. 그 회사에 대해서 아는 게 좀 있냐?”

    닌텐도라는 이름에 이강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마 저게 놀란 표정은 아니겠지? 당최 감정을 표현하지도 않고 얼굴로 나타내지도 않으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대단한 포커페이스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천성이 그런 건지.

    역시, 듣던 대로다.

    “세가는… 어떻습니까?”

    드디어 말문이 열린 이강찬의 질문에 난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가, 나쁘진 않지. 하지만 닌텐도의 슈퍼 페미컴이 출시되어 세가는 완전히 구시대적 게임기로 전락된다

    세가도 뒷심을 발휘해 성장세를 이어 가지만, 닌텐도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 그러나 게임 시장에 발을 들이기 위해서 세가를 선택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그렇다고 좋은 선택도 아니다.

    닌텐도 열풍이 불면서, 금양이 허둥지둥거리며 세가를 들여오긴 하는데…. 닌텐도 페미컴이 한국 시장을 장악하면서 세가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물론, 닌텐도 열풍이 불기 전에 세가가 먼저 한국 시장을 치고 들어오면 일말의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세가를 택하기보다는 순풍을 맞은 닌텐도 함선이 훨씬 좋지 않겠는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면 일본 시장이 닌텐도에 완전히 잡아먹힐 겁니다. 세가는 숨도 못 쉬고 압살을 당하겠죠. 그만큼 이번에 닌텐도가 내놓은 페미컴이 대단합니다. 그리고 제가 세가보다는 닌텐도를 권유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이강찬은 슬쩍 이철호를 쳐다본 뒤, 다시 내게 시선을 옮겼다. 얼른 말을 해 보라는 듯 재촉을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금양 그룹도 세가와 접촉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순간, 공허함만 가득해 보였던 이강찬의 눈빛이 흔들렸고…. 이철호는 몸을 들썩였다.

    이강찬이 뭔가 말을 꺼내려고 할 때, 이철호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금양 그룹이 세가와 접촉하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괜한 말을 꺼낸 건가. 하지만 앞으로의 거래를 위해서라면 내 정보력을 조금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쓸 만한 정보처가 있습니다.”

    “쓸 만한 정보처? 네가 애용하는 정보처가 우리 천성 그룹의 정보부에 맞먹는다는 거냐?”

    “하하. 설마요.”

    꽤 놀랐는지, 이철호는 잔에 담긴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이강찬도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면서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금양 그룹이 세가와 손을 잡으려고 하니까, 천성에서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아니었나요?”

    이철호는 이강찬에게 고개를 돌렸다. 답을 하라는 그의 신호에 이강찬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맞습니다. 금양이 세가와 컨택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그 회사에 대해 면밀히 조사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름 미래가 밝더군요.”

    90년대 게임 시장을 주름잡은 회사에는 당연히 세가도 포함이 된다. 그들이 내놓은 여러 히트작은 나도 즐겁게 플레이를 해 왔으니까. 또한, 여러 유명한 애니메이션들도 제작해 초대박을 치지 않았던가.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들이 공들여 쌓아 놓은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세가의 야심작인 드림캐스트가 몰락하면서 2000년도에는 최악의 실적을 내놓게 된다. 결국, 세가는 ‘사미’사와 합병을 하게 되었다. 그냥 평범한 수준의 실적을 내놓게 되는 회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세가가 좋은 회사라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금양과 벌써 접촉을 하고 있는 곳입니다. 굳이 더 큰 돈을 들여 세가를 금양에게서 빼앗기보다는, 닌텐도를 앞세워 금양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이는 게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생각에 잠겼는지, 이강찬은 말없이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였다. 그 모습에 이철호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내게 말했다.

    “이해해라. 원래 저런 놈이야.”

    “아, 예.”

    이강찬의 버릇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별로 놀랍지는 않지만, 막상 눈앞에서 보게 되니 좀 신기하긴 했다.

    “파트너를 빼앗기보다는 더 좋은 파트너를 구한다….”

    “예?”

    “일단, 알겠습니다.”

    방금 전보다 더 공허해진 눈빛으로 이강찬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 의견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당최 속내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할 지경이었다.

    이철호도 흥미가 떨어졌는지, 화제를 돌렸다.

    “강찬이도 더는 할 말이 없는 거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네가 원하는 게 뭔지를 듣지 못했네.”

    “그게….”

    내가 이강찬을 힐끔 바라보자, 이철호는 괜찮다는 듯 내가 말했다.

    “괜찮아. 편하게 말해도 돼.”

    “그럼, 거두절미하고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은 회장님의 첫째 아들이신 이강혁 부회장 때문입니다.”

    “강혁이?”

    이강혁이라는 이름을 꺼내면서 난 슬쩍 이강찬의 반응도 살폈다.

    역시, 이렇다 할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이 천성이란 왕국에서 후계자 싸움을 하고 있는 첫째 형에 대한 경계심이 분명 강할 텐데 말이다.

    “강혁이가 왜?”

    “이강혁 부회장이 요즘 대룡파와 손을 잡고 있다는 걸 아십니까?”

    이철호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그의 정보망이라면 대룡파의 절반 이상이 날아갔다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 아들이 대룡파와 놀아나고 있다는 건 몰랐을까?

    “이번에 대룡파가 군부 손에 두드려 맞으면서 세력이 많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화진에서는 그런 대룡파를 흡수하려고 했죠. 그런데 부회장님이 대룡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라고 하니…. 이거 갑자기 저희가 밀고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난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번 여의도 때 일도 있어서, 대룡파를 마음대로 쳐도 되는 건지 좀 껄끄러운 상태입니다.”

    나는 이번에도 이철호보다는 이강찬의 반응을 살펴봤다. 하지만 여전히 이강찬은 저 얼굴이었다. 그에 반해 이철호의 반응이 꽤 재미있었다.

    여의도를 화진에게 빼앗긴 게 그리 배가 아픈 건 아닌지, 실실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안 봐도 알겠네. 그 속 좁은 놈이 토라져서 대룡파로 화진 좀 흔들어 놓겠다는 거겠지.”

    단번에 상황을 판단한 이철호는 여유롭게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전형적인 갑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건 강혁이를 좀 치워 달라는 거냐?”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그렇습니다. 괜히 저번처럼 서로 얼굴 붉히며 싸우기에는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싫다고 하면? 내 아들 녀석이 밥 먹여 주고 있는 대룡파를 칠 생각인가?”

    이철호가 질문을 스트레이트로 꽂는구나. 여기서 내 대답 여하에 따라 이철호의 반응이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굳이 아부를 떨 필요는 없다. 그냥 내가 생각하는 대로 대답하면 되지 않겠는가?

    “아니요. 대룡파는 깔끔하게 포기할 생각입니다.”

    “응? 정말로?”

    “예. 이번 일로 천성과 싸우고 싶진 않습니다. 더군다나 회장님과 적이 되는 건 더더욱 생각하기가 싫고요.”

    “하하. 그런 놈이 여의도는 잘도 꿀꺽 삼켰네?”

    정곡을 찌르는군. 하지만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과거의 일로 연연하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일부터 처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여의도 때 일은 누가 먼저 들어가서 깃발을 꽂느냐가 관건이었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 당장은 대룡파를 포기한다고 해도, 어차피 자연스럽게 대룡파는 화진에 흡수가 될 겁니다.”

    “꽤 자신 있는데? 우리 아들이 밥만 잘 가져다주면 다시 살아날 수도 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대룡파가 이강혁 부회장을 호구처럼 부려 먹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십니까?”

    “풉-!”

    이강혁 부회장을 호구로 내리깔자,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이강찬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와 이철호는 둘 다 놀라 그런 이강찬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우리 둘의 시선을 느꼈는지, 얼른 자세를 고쳐 잡고 내게 사과부터 건넸다.

    “미안합니다. 첫째 형님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이제까지 회장님 밖에 없었는데, 태산씨가 그러니까 저도 모르게 그만….”

    자칫 잘못하면 분위기가 험악해질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장남인 이강혁을 호구로 만들었으니 이철호가 크게 화를 내도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강찬의 웃음 한 번으로 그런 분위기는 쏙 들어가 버렸다.

    피도 눈물도, 하물며 웃는 얼굴도 없는 줄 알았던 이강찬이 저렇게 웃을 줄이야.

    사람이 좀 다르게 보일 정도였다.

    “강혁이, 그놈이 호구 짓을 한다라-. 네 말을 들어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이강찬 덕분인지 이철호도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내 자식새끼가 유흥으로 즐기겠다는 일을 굳이 내가 나서서 막을 필요는 없지.”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대한민국 삼대 조직 중 하나인 대룡파가 관련된 일이다. 그런 걸 고작 유흥으로 취급한단 말인가?

    제정신이고서야 저런 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철호가 갑의 위치에 있는 상태. 더군다나 이철호는 대룡파 따위를 큰 변수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대룡파를 그저 그런 놈들로 취급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렇기에 대룡파를 유흥으로 취급하면서 내게 미끼를 흔들고 있는 것이었다.

    “일단, 돌아가라. 지금 당장은 딱히 구미가 당기지 않네. 혹시라도 맘 바뀌면 연락하지.”

    아쉽게 됐군.

    내 설득력이 부족했던 탓일까.

    이철호도 그렇고, 이강찬도 크게 관심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하긴, 어차피 확률도 크게 높지 않은 도박이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를 올린 뒤 회장실 밖을 나왔다.

    오늘은 그냥 이강찬을 만난 거로 만족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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