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의 서막 2 >
“우와, 던전 분위기 진짜 끝내주네요.”
황수영은 던전에 들어와서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굉장히 다양한 분위기와 환경의 던전을 겪어봤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다.
일단 환경 자체가 평범하지 않았다.
하늘은 구름이라도 낀 것처럼 잿빛으로 꽉 채워져 있었고, 땅도 그랬다.
마치 세상 전체가 죽은 것 같은 분위기였다.
실제로 흐르는 마력도 그랬다.
죽음과 관계된 마력이 공기 대신 채워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숨 쉬기도 굉장히 불편했다.
황수영을 비롯한 다른 각성자들은 신기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강하진은 그렇지 않았다.
‘역시나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이 던전은 본격적인 던전 전쟁이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긴장 풀지 마세요. 여기, 위험한 던전입니다.”
강하진의 말에 황수영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런 던전 겪어본 적 있으세요?”
강하진은 그에 대한 대답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안전에 신경 쓰세요. 싸움이 유리해진다고 해서 무리하면 큰일 납니다. 약해 보인다고 함부로 달려들지 마시고요. 약한 놈들 하나도 없으니까.”
황수영이 잠시 강하진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전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우리 길드원들도 제가 그러라면 그럴 거예요.”
황수영이 자신이 데려온 길드원들을 돌아보자 다들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는······ 솔직히 저도 장담 못하겠네요.”
이 던전에 들어온 각성자의 수는 강하진까지 해서 53명이었다.
그 중 던전 브레이커는 황수영을 포함해서 열 명이었고.
강하진이 남은 42명의 각성자를 힐끗 쳐다보니, 강하진의 말에 수긍하는 사람 반, 그렇지 않은 사람 반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강하진은 던전 브레이커 길드 마스터가 각별히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강하진의 말에 수긍하는 사람도 황수영 때문에 그런 것이지 진짜로 그 말을 듣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천천히 이동할 겁니다. 속도를 내고 싶어도 참으세요.”
강하진은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자들이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황수영과 던전 브레이커가 군소리 없이 강하진을 따라가니 어쩔 수 없이 함께 움직일 뿐이었다.
강하진이 가디언스의 마스터라는 사실을 안다면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하겠지만, 그걸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동안 강하진이 워낙 혼자서 따로 움직이기도 했고, 드러내놓고 공식 석상에 나선 적도 없기 때문이었다.
가디언스에서 공식적인 일을 나서서 처리하는 사람은 윤경민이었다.
그래서 윤경민은 유명했지만, 정작 진짜 가디언스의 주인인 강하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나마 예전 부산 던전에서 구름독수리를 상대하던 각성자들이 강하진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들은 부산에서 활동했기에 강하진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강하진이 가디언스 마스터라는 건 몰랐고.
아무튼 강하진은 굉장히 신중하게 움직였다.
끊임없이 마력을 보내 혹시 숨은 적이 없는지 계속 확인했다.
하지만 뒤따라가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느리게 걷는 걸로만 보였다.
슬슬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고, 하나둘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황수영 때문에 참았는데, 시간이 더 지나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자, 결국 터져 버렸다.
“언제까지 이렇게 갈 겁니까?”
나선 사람 역시 제법 큰 길드에 소속된 각성자였다. 더구나 그 길드에서 팀장이기도 한지라 자신의 팀원들을 데리고 이 던전에 들어왔다.
던전 브레이커가 비록 대단히 유명한 길드이긴 해도 규모나 힘만 따지면 자신들도 그 못지않다고 여기기에 목소리와 어깨에 힘이 꽉 들어가 있었다.
한 사람이 총대를 메고 나서자, 나머지 사람들도 저마다 불만을 토해냈다.
“우리는 시간이 돈인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굼뜨게 움직여서 어느 세월에 이 던전을 닫는단 말입니까?”
“지금 밖에서는 난리가 났는데, 우리만 이렇게 여유로우면 안 되죠.”
황수영은 난감한 표정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강하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빠르게 움직여서 괴물들이 파 놓은 함정이나 유인에 걸려든다면 자신이나 황수영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해도 나머지 사람들은 아마 힘들 것이다.
“거기 제일 앞에 나선 분이 얘기 좀 해보시죠. 솔직히 던전 브레이커 마스터인 황수영 씨라면 모를까. 당신이 우리를 이끈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안 그렇습니까?”
가장 처음 나섰던 사내가 좌중을 둘러보며 동의를 구하자,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무리 황수영이 말려도 저들이 먼저 앞장 설 듯했다. 아니, 여기서 의견이 더 갈리면 아예 따로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하아, 이젠 나도 모르겠네요. 어쩌실 거예요?”
“내가 뒤로 빠지겠습니다. 대신 아까 내가 했던 말 명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강하진의 말에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빙긋 웃은 사내가 앞으로 나갔다.
“나도 별의 별 던전을 다 겪어본 사람이에요. 염려 턱 놓으시고 나중에 괴물 나타나면 지원이나 확실히 해주세요. 아셨죠?”
강하진은 물끄러미 그 사람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은 확실히 해드리죠.”
그 말을 남기고 뒤로 물러난 강하진을 사내가 승리자의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자, 이제부터 속도 좀 올립니다. 뒤쳐지지 말고 잘 따라오세요. 떨어져 나가도 기다려줄 시간 없으니까.”
사내는 강하진의 말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빠르게 걸어갔다.
반쯤 뛰다시피 이동했는데, 덕분에 이동 속도가 아까의 몇 배에 달했다.
강하진은 뒤따라가면서 여전히 마력을 쫙 퍼트리고 혹시 있을지 모를 괴물을 탐색했다.
그렇게 몇 분쯤 이동했을 때, 강하진의 감각에 어둡고 음습한 마력이 잡혔다.
굉장히 짙은 마력이었다. 드디어 괴물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 얘기는 땅 아래에 숨어 있다는 뜻이었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굉장히 수가 많았다.
게다가 어찌나 마력을 잘 감췄는지 강하진도 순간적으로 그게 괴물인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강하진은 괴물을 감지한 즉시 말했다.
“전방에 괴물이 숨어 있습니다.”
강하진의 말에 황수영을 비롯한 던전 브레이커 길드는 급히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앞장서서 이동하던 자들은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럴 틈이 없었다.
이미 그들은 괴물의 포위망 안에 발을 들인 상태였으니까.
푸확! 푸확! 푸확!
땅을 뚫고 스켈레톤들이 퍽퍽 솟아났다.
그들은 손에 녹슨 검과 방패를 들고 있었다.
시커멓게 뚫린 눈에서는 검붉은 광망을 쏟아내고 있었다.
절그럭. 절그럭.
뼈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스켈레톤들이 달려들었다.
앞장서던 각성자들이 다급히 스켈레톤들과 싸웠다. 그들은 자신 있었다.
재앙 이전의 던전에서도 스켈레톤들은 제법 자주 나오던 괴물 중 하나였으니까.
그들은 스켈레톤을 어떻게 상대하면 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꽝! 꽝! 꽝!
앞장서던 자들은 근접 전투 스킬을 가진 각성자였기에 각자의 무기를 꺼내 스켈레톤들을 맹렬히 공격했다.
하지만 스켈레톤들은 방패로 각성자들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냈다.
심지어 그냥 막는 것도 아니고 방패를 이리저리 비틀어 타점까지 흔들었다.
각성자들이 채 당황하기도 전에 멀리서 마법이 우수수 날아왔다.
작은 불덩어리와 얼음덩어리, 그리고 주먹만 한 전격의 구, 그리고 바람화살이었다.
하나하나의 위력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았고, 다른 스켈레톤과 싸우고 있던 도중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각성자들의 몸에 마법이 적중되었고, 그때 잠깐 일어난 경직의 틈을 스켈레톤의 녹슨 검이 비집고 들어갔다.
촤악!
“크윽!”
각성자들의 몸에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냥 상처가 아니었다.
상처를 통해 저주가 스며들었다.
심각한 저주는 아니었지만, 순간적으로 전투력을 떨어뜨리기에는 충분했다.
거기까지 당하는 데 걸린 시간이 고작 10초도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당한 것이다.
그 와중에도 계속 스켈레톤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저 멀리 떨어진 바닥에서 푹푹 튀어나오는 스켈레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공포가 마음을 꽉 짓눌렀다.
그제야 후회의 감정이 올라왔지만 이미 늦었다.
정확히 그 순간 강력한 빛이 코앞에서 폭발했다.
화아악!
신기하게도 그 빛은 그렇게 밝은데도 전혀 눈이 부시지 않았다. 그저 따스하고 포근하기만 했다.
하지만 결과는 눈이 뒤집힐 정도로 놀라웠다.
몸에 났던 상처가 싹 사라졌다.
그리고 그렇게 무시무시하던 스켈레톤들이 후두둑 무너졌다.
다들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멍하니 있었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어느새 다른 스켈레톤들이 빈자리를 메우며 달려들었으니까.
각성자들은 이를 악물고 무기를 꽉 쥐었다.
그 순간 몸에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청량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넘쳤다.
그들은 이게 뭔지 안다.
‘버프! 그런데 이런 버프가 말이 돼?’
굳이 상태창을 확인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거의 사기에 가까운 버프가 적용되었다는 것을.
각성자들의 움직임이 훨씬 빠르고 강해졌다.
지금까지 스켈레톤들에게 밀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몰아쳤다.
그들은 버프가 주는 힘에 취해 던전에 들어올 때 강하진이 신신당부하던 말을 잊었다.
싸움이 유리해졌다고 해서 무리하면 안 되는데, 버프에 취하니 그게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들은 빠르게 진격하며 스켈레톤들을 박살 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들은 스켈레톤 무리 한가운데 고립되고 말았다.
그걸 알아차린 건 버프의 적용시간이 사라졌을 때였다.
갑자기 몸에서 힘이 쭉 빠졌는데, 당황해서 주위를 살피니 스켈레톤 무리 한가운데였고, 강하진과 황수영을 비롯한 던전 브레이커는 저 멀리서 싸우고 있었다.
“다시 저쪽으로 가야 돼!”
누군가의 외침에 그들은 방향을 바꿔 강하진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아까 돌격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저항이 심했다.
이대로라면 끝장이었다.
모두의 눈에 서서히 절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씨발, 무슨 스켈레톤이 이따위야!”
전투 경험이 자신들보다 많은 것 같았다. 스펙도 기존의 스켈레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데, 전투경험까지 많으니 상대하기가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문득 이런 놈들이 던전 밖으로 나간다면 세상에는 그야말로 재앙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죽나, 싶은 순간 아까의 그 빛이 또 한 번 터졌다. 이번에는 아까의 몇 배나 될 정도로 거대한 빛무리가 주위를 휩쓸었다.
콰자자자자자자작!
스켈레톤들이 빛에 휩쓸려 우수수 무너졌다.
그리고 각성자들의 몸에 났던 상처가 낫고 활력이 솟아올랐다.
“씨발, 이것도 사기야.”
물론 좋은 사기였다. 덕분에 자신들이 살았으니까.
강하진이 있는 쪽으로 좀 더 다가가니, 아까의 그 버프가 온몸에 스며들었다.
“이제 다 죽었어.”
각성자들은 힘을 내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까처럼 무모하게 돌진하진 않았다.
철저히 안전을 생각하며 방어에 집중하며 싸웠다.
그 사기적인 치료와 버프가 있는 한, 자신들은 절대 죽지 않을 테니까.
* * *
한 차례 싸움이 끝나고 다들 바닥에 널브러졌다.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은 강하진과 황수영, 둘 뿐이었다.
두 사람 주변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수없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검은 기사들 바깥쪽으로 검은 로브 여러 장이 떨어져 있었고.
아까 포위되었을 때, 따로 떨어진 각성자들을 바로 구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 검은 갑옷들 때문이었다.
어둠의 기사라는 언데드였는데, 하나하나가 굉장한 강자였다.
그 뒤에 떨어진 로브는 어둠의 기사와 쌍으로 움직이는 사령종자였다.
어둠의 기사에게 치료와 버프를 제공하고, 몇 가지 마법을 통해 적을 견제할 수 있는 놈들이었다.
아무리 강하진과 황수영이 강해도 저런 놈들에게 포위되었는데, 그 상황을 금방 해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나마도 강하진이나 되니 그 와중에 치료와 버프를 전해줄 수 있었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림도 없었다.
“저 마력 포션 다 떨어졌어요. 아우, 이 미친놈들 진짜 장난 아니네요.”
황수영도 이러다가 중독되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마력 포션을 마시며 스킬을 난사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정말 버티기 어려웠으니까.
“마력 포션 때문에 전 밖에 나갔다 다시 들어와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실 거예요?”
강하진은 황수영에게 허리띠 하나를 넘겼다.
“이게 뭐예요?”
“선물입니다.”
황수영이 황당한 표정으로 강하진과 허리띠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 상황에서요?”
“마음에 드실 거라 확신합니다.”
황수영은 묘한 표정으로 허리띠를 받았다.
“그냥 차면 돼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도 되게 좋은 건데.”
“바꾸는 게 나을 겁니다.”
황수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허리띠를 바꿔 찼다.
그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설마 이거 힘 올려주는 거예요?”
“이것저것 효과가 있습니다. 유동훈 씨가 만든 최신 제품이니까 제법 쓸 만할 겁니다.”
“우와, 고마워요!”
황수영은 환하게 웃고는 말했다.
“그럼 이제 전 나가서 포션 좀 보충하고 올게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네?”
“여는 데 마력이 필요하니까 몇 번 연습해봐야 할 겁니다.”
그 말을 들은 황수영은 짐작하는 바가 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표정이 더없이 환해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강하진을 꽉 끌어안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강하진이 타이밍 좋게 한 발 물러나 피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조심하십시오. 조절하지 않고 아무나 붙잡으면 허리 부러집니다.”
황수영이 황당한 눈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우와, 진짜 얄미워!”
아무튼 덕분에 사냥을 중간에 끊지 않고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