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의 서막 1 >
“결국 강하진 씨가 말한 대로 됐네요.”
황수영이 신기한 눈으로 강하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던전 공습 이후로 한국에는 한동안 던전이 굉장히 드물게 나타났다.
마치 예전의 일본처럼.
그래서 대부분의 각성자들이 푹 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황수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최근 던전 브레이커보다 가디언스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 정도로 자주 찾아왔다.
“말 안 들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지 뭐예요. 지금도 가끔 자면서 그때 꿈을 꾸다가 벌떡벌떡 깬다니까요? 꿈속에서는 결국 고집 부리고 일본으로 가거든요.”
황수영이 그렇게 말하며 민망한 듯 피식 웃었다.
“일본행 비행기를 타는 내 모습이 너무 또렷이 보여서 그때마다 안 된다고 가지 말라고 소리치다가 잠에서 깨요.”
강하진은 좀 의외였기에 살짝 놀란 눈으로 황수영을 쳐다봤다.
“그렇게까지 예민한 성격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그러게요. 저도 제가 이런 줄 몰랐죠. 사실 무사히 잘 피해갔고,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일인데.”
강하진은 황수영의 말을 들으며 원인을 짐작했다. 저건 죄책감이었다.
“일본 정부가 무릎까지 꿇고 애원하는데 이제 많이들 지원해서 가겠죠? 행태야 괘씸하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도 살아야 하니까요.”
황수영의 말에 강하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 안 될 겁니다.”
“예? 이번에도 안 가실 거예요?”
“아무도 안 갈 겁니다.”
황수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는 눈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아무도······ 안 간다는 게 무슨 의미죠?”
“던전 공습이 한국이랑 일본에서만 일어날 리 없으니까요.”
“하지만······.”
황수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타이밍 좋게 도착한 문자 때문이었다.
강하진의 강압으로 이제 막 운영하기 시작한 던전 브레이커의 정보 조직에서 보낸 문자였다.
“필리핀에서······ 던전 공습이 시작되었네요.”
“아마 이제부터는 다들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이제 고작 필리핀에서만 벌어진 일일 뿐이에요. 그렇다고 다른 나라에서도 일본을 외면할 거라고는······.”
황수영은 또 말을 잇지 못했다. 역시나 문자 때문이었다.
이번엔 러시아에서 던전 공습이 시작되었다는 문자였다.
그 뒤로도 문자가 연이어 도착했다.
무려 열 개나 되는 나라에 거의 동시에 던전 공습이 시작된 것이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예측하신 거죠?”
황수영이 강하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약간의 경외감마저 담겨 있었다.
“황수영 씨는 던전의 정체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던전의 정체요?”
“던전이 나타나는 이유, 그리고 그 던전에서 싸울 수 있는 각성자를 만들어내는 시스템.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습니까?”
황수영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당연히 생각해봤다. 특히나 황수영 같은 이레귤러의 경우는 더 깊이 고민하는 게 당연했다.
“왜 안 해봤겠어요. 전 사실 처음에는 던전이라는 게······ 지구를 정화하기 위한 거라고 여겼어요.”
“정화한다고요?”
황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를 망가뜨리는 주범인 인간을 단죄하기 위한 거죠.”
아마 저런 생각을 한 사람도 제법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에 괴물은 너무 난폭하고 강하다.
괴물은 생명채를 공격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생존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그저 죽이기 위한 싸움을 이어가는 존재가 바로 던전에서 나오는 괴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좀 혼란스러워요. 특히 일본······ 마지막에 나타난 던전, 쉽게 안 터질 거 같죠?”
황수영의 물음에 강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안 터질 겁니다. 종류가 다른 던전인 거 같았습니다.”
“역시 그렇죠? 꼭 누군가 지켜보면서 전략이라도 짠 것처럼 말이에요.”
강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한 것도 아니면서 여기까지 유추해 낸 것도 대단한 거다. 황수영이 보는 것처럼 전투에 미친 단순무식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번에도 그래요. 이렇게 갑자기 열 군데나 되는 나라에 던전 공습이 일어나면 다른 누구도 일본에 가지 않을 거예요.”
“그럴 거라고 했잖습니까.”
“일본을 꼭 차지하겠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물으며 강하진을 바라보는 황수영의 눈빛에는 어느 정도 확신이 담겨 있었다.
“저도 그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다른 차원의 존재가 지구를 노리고 있다고. 거기에 맞춰서 생각하면 다음에 무슨 일을 벌일지 약간이나마 예측이 가능하더군요.”
물론 그것만으로 다음에 벌어질 일을 예측한다는 건 말이 거의 안 되는 일이었지만, 황수영은 그걸 걸고넘어지지는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강하진은 규격 외의 인간이었다. 보유한 강력한 힘도 그렇고 생각하는 방식도 그렇고 툭툭 튀어나오는 엄청난 물건의 제작법도 그렇고 말이다.
“일단 이해했어요. 그래서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은가요?”
“던전 공습이 이어지겠죠.”
“전 세계가 던전 때문에 몸살을 앓겠군요.”
황수영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나직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좀 이상하긴 하네요.”
황수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마치 미리 지구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던전을 보내는 것 같지 않나요?”
어느새 황수영은 지구를 침공하려는 타 차원의 존재가 있다는 걸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그게 여러모로 생각하기에 편했으니까.
“그리고 침공을 왜 이런 식으로 복잡하게 하는 걸까요? 저 정도 능력과 힘이 있으면 그냥 확 몰아치면 금방 끝날 텐데.”
“그게 안 되니까 그러는 거겠죠? 차원의 구멍을 뚫는 일인데 어떤 제약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죠?”
황수영은 여전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아까 그녀가 말한 부분은 고민을 해봐야 한다.
마치 상황을 미리 예측하거나 아니면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타이밍 맞춰 사건이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회귀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한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첫 번째 재앙 이후부터 던전이 생기는 위치나 시기가 공교롭기는 했다.
이번에 일본에 떨어진 거대 뉴타입 던전은 이후에도 몇 번 등장한다.
그 때마다 대응에 혼선이 빚어져 큰 문제가 발생하곤 했다.
상황을 지켜보면서 전략과 전술을 수정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강하진의 머릿속에 최대길의 금고에서 찾은 복종의 팔찌가 떠올랐다.
처음 그걸 발견했을 때의 추측이 맞을 확률이 올라갔다. 복종의 팔찌가 여러 개 있을 거라는 추측 말이다.
“이제 우리는 어쩌죠?”
황수영의 물음에 강하진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가볍게 대답했다.
“싸워야죠.”
“누구랑요?”
“누구긴 누굽니까. 던전 속에 있는 괴물이지.”
황수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 * *
무릎까지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한 일본 총리의 퍼포먼스는 한 순간의 허무한 쇼로 끝났다.
다른 나라에 연이어 시작된 던전 공습은 일본으로 향하려던 모든 각성자들의 발을 묶어 버렸다.
결국 일본은 자국의 각성자와 외국인 각성자들을 강제로 모아 방어선을 철저히 구축하고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버티기로 결정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요인들이 은밀히 일본을 빠져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만 빠져나갈 생각은 없었다. 자신들을 지킬 무력이 필요하니 그들에게 충성하는 각성자들은 전부 데리고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그들이 뭘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사람이나 조직은 없었다.
일단 각성자나 자위대, 경찰 병력은 방어선 내의 치안을 유지하고 몰려오는 괴물을 막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일본에 관심을 둘 만한 다른 나라의 경우, 연이어 터지는 던전 공습 때문에 역시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그들은 아주 여유롭고 은밀하게 일본을 빠져나갔다.
탈출은 배를 이용했다. 거대한 컨테이너선에 일본 정부가 그동안 모은 막대한 물품을 싣고서.
그들의 목적지는 미국이었고, 아주 안전하게 도착했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비난이 이어졌다.
전 세계가 일본 정부의 파렴치한 행동을 비난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일본 정부가 빼돌린 막대한 양의 마석을 비롯한 값진 아이템과 막대한 자금, 그리고 지금까지 모아온 중요한 정보들에 눈독을 들였다.
* * *
던전 공습이 한창 세계를 휩쓸고 있을 무렵, 한국에도 다시 던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니, 던전이야 꾸준히 나왔다. 다만 너무나 드물게 나와서 대부분의 각성자가 본의 아니게 긴 휴가를 보내야 했다.
한데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던전이 나타난 것이다.
재앙과 던전 공습 이후 시민 의식도 많이 달라져, 던전을 발견하면 바로바로 신고했다.
각성자 관리청은 신고를 받으면 바로 근처의 각성자와 길드에 우선적으로 연락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걸 시스템으로 만들어 거의 기계적으로 이루어지게 해 두었다.
이제 대기업이나 거대 길드의 편의를 봐주는 시대는 지났다. 더 이상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만일 그러다가 자칫 던전이 하나 터지기라도 하면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다.
이젠 던전을 어떻게 할당하느냐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과연 이 던전을 닫을 수 있을지, 던전 근처에 각성자들이 그걸 닫을 만큼 있는지를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도 서울, 경기 지역은 비교적 안전한 편이었다.
던전이 나오는 비율이 살짝 높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많은 길드와 각성자가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까.
가디언스와 던전 브레이커도 결국은 서울에 길드 본부가 있지 않은가.
오늘 던전이 여러 개 나타나서 서울의 각성자들이 굉장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던전이라는 게 몇 시간 빡세게 뛴다고 닫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며칠 동안 안에서 싸워야 한다.
그러니 던전이 여러 개 나타나면 각성자가 모자랄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이 그런 상황이었다.
강하진은 가장 마지막에 나타난 던전으로 향했다.
가디언스는 가장 처음 나타난 던전에 들어가 있었다. 다른 길드에 비해 가디언스가 월등히 강하지만 그래도 닫는 데 며칠은 걸릴 것이다.
던전에 도착하니, 던전 브레이커에서 나온 각성자 열 명 정도가 다른 각성자들과 함께 대기 중이었다.
그 중에 황수영도 있었다.
“이렇게 또 보네요.”
휴가 때도 자주 봤는데, 던전이 열리기 시작했는데도 이렇게 자주 마주치니 기분이 좀 묘하긴 했다.
황수영은 강하진에게 다가가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 속에 담긴 감정은 굉장히 복잡했다.
“왜 그러십니까?”
“또 맞췄어요.”
“뭘 말입니까?”
“일본이요.”
그제야 강하진이 피식 웃었다.
일본 정부가 몰래 빠져나간 일을 말하는 것이다.
예전 황수영이 던전 브레이커를 전부 데리고 일본으로 가겠다고 할 때, 그녀를 말리기 위해 해준 얘기였다.
“이제 강하진 씨 존경하기로 했어요.”
“좋은 자세입니다.”
“농담 아니에요. 대체 어떻게 그런 단편적인 추측과 정보만으로 이렇게 정확히 예측을 하는 거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굉장히 곤란한 분위기였기에 강하진은 얼른 말을 돌렸다.
“일본 상황이 더 어려워졌겠군요.”
황수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놈들이 자기들만 빠져나간 게 아니라, 상당한 양의 물자와 각성자까지 데리고 가는 바람에 전력 공백이 아주 심각한 모양이에요.”
그럴 것이다. 회귀 전에도 일본 정부가 일본을 떠나는 걸 기점으로 제대로 된 몰락이 시작되었으니까.
이제 일본은 더 이상 회생이 불가능하다.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희망을 일본 정부가 나서서 박살을 내 버렸으니까.
“어떻게 도울 방법 없을까요?”
황수영이 기대감 어린 눈으로 강하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강하진이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에도 왠지 답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슬슬 거기서도 탈출을 시도할 겁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버려질 겁니다.”
정부가 사라졌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마 자국의 각성자를 탈출시키기 위한 특작대를 보내는 나라도 제법 있을 테고.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살 길을 찾을 겁니다.”
“방법이 없다는 말이군요.”
“탈출을 도울 수는 있죠. 그리고 그들을 미국으로 보낼 수도 있고.”
강하진의 말에 황수영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게 가능한가요?”
“하지만 전부를 돕지는 못합니다. 그저 강에서 물 한 바가지 퍼내는 정도죠.”
“그거라도 어디에요. 한 명이라도 살리는 게 중요하죠.”
“일단 이 던전부터 닫고 다시 얘기해 봅시다.”
강하진은 그렇게 말하고 던전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황수영이 신 나서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