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드 창설 2 >
질병흡수는 상대의 질병을 빨아들이는 스킬이었다.
일방적으로 스킬 보유자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스킬이었다. 흡수한 질병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니까.
“어떤 대기업 회장님의 병을 흡수해주면 대가로 100억을 주겠다더군요. 당연히 거절했죠. 아무리 각성자라도 버틸 수 없는 병이었거든요.”
그 이후로 김지혜는 더 이상 던전에 들어가 사냥을 할 수 없었다.
일단 사냥 신청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녀와 함께 사냥을 하려는 팀도 구할 수 없었고.
그리고 김지혜와 가까웠다는 이유로 이지영도 같은 꼴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암시장으로 흘러 들어갔고, 꽤 오랫동안 고생하면서 지금의 일행들을 하나둘 만나게 되었다.
대부분 김지혜와 이지영의 도움을 받았기에 다들 사이가 각별했다.
“사실 우리는 레벨업은 다들 포기하고 있었어요. 빡빡하긴 해도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목표였죠. 그런데 그것도 한계였어요.”
생활고로 인해 얻은 빚이 문제였다.
그녀들에게 돈을 융통해준 자가 바로 거대 길드들의 끄나풀이었다.
빚에 대한 압박이 점점 심해지고 있을 때, 강하진이 나타난 것이다.
덕분에 빚도 싹 갚고 이제 사람다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녀들에게 있어서 강하진은 은인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고 모일 때마다 다짐을 했다.
얘기를 듣던 강하진이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말했다.
“암시장은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예? 암시장이요? 그냥······ 이 바닥에서 일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요.”
“자연스럽게요? 거대 길드들과 척을 쳤는데요? 거기에 대기업 회장님도 얽혀 있고.”
“그게 상관이 있나요?”
“거대 길드와 대기업은 각성자 관리청과 서로 많은 것을 주고받는 관계니까요.”
“그거야 다들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요?”
“그리고 암시장은 각성자 관리청과 거대 길드, 그리고 대기업들이 존재를 인정해주기 때문에 유지가 가능하죠.”
“예? 설마요.”
“자연스럽게 암시장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건, 그 존재를 알 수 있도록 유도했거나 방치했다는 뜻이죠.”
“그럼······.”
“어쩌면 지혜 씨를 노리는 놈들이 일부러 암시장과 연결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김지혜의 눈이 커다래졌다.
각성자가 그들의 방해를 피해 돈을 벌고자 하면 암시장 말고는 답이 없었다.
그리고 암시장은 아무리 그들이 존재를 묵인해 준다고 해도 전혀 다른 음지의 세상이었다.
그들은 김지혜가 암시장으로 흘러간 다음에도 통제할 수 있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려면 김지혜가 암시장에서 맺는 관계를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이 통제 가능한 범위 안으로 말이다.
김지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만일 정말 그랬다면 이미 그녀의 위치나 상황을 그들이 낱낱이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미리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일단 길드를 만들고 천천히 대응책을 생각해보죠. 그래도 암시장을 헤매는 것보다는 차라리 양지로 나가는 편이 훨씬 나을 겁니다.”
그건 확실히 그렇다.
김지혜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길드 구성원은 여기 있는 분들이 전부인가요?”
강하진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부터 더 영입해야죠. 추천하고 싶은 분 있으면 다들 망설이지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다들 머릿속으로 혹시 괜찮은 사람이 있나 떠올려봤다. 얼른 생각나지 않아 한동안 침묵이 맴돌았다.
그러다가 이지영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길드 이름은 뭔가요?”
강하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지금부터 지어보죠. 적당한 이름 있으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다들 난감한 표정으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가장 어려운 것이 이름 짓는 것 아니던가. 게다가 다른 길드와 중복되면 안 되니 더 어렵다.
회의는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들 조금씩 말이 많아졌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열띤 토론의 장이 열렸다.
그 회의에서 길드에 대한 큰 틀이 그려졌다.
하지만 강하진은 회의에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앞으로 대적하게 될 길드들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고, 그들을 상대할 때 쓸 요긴한 기억이 없는지 살폈다.
생각보다 재미난 기억들이 많았다. 그리고 일단 한 번 올라온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 많은 기억을 불러냈다.
* * *
길드를 운영한다는 건 사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드 마스터가 있고, 길드원이 있고, 근거지가 있다고 끝이 아니었다.
길드를 운영하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했다.
행정 업무부터 시작해서 재정, 인력관리, 타 길드와의 관계 설정을 비롯해 무수한 일을 처리할 사람이 필요했다.
당연히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강하진은 자신이 길드를 창설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염두에 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만 영입하면 향후 길드가 아무리 성장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심지어 길드에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한다 해도 그 모든 걸 떠안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혼자 갈 때는 필요 없지만, 함께 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인재였다.
강하진은 지금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굳이 조사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첫 번째 재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시골에 내려가서 은둔 생활을 했으니까.
강원도 산골에 살았는데, 강하진은 회귀 전에 그곳에 가본 적이 있었다.
강하진이 마지막 팀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거쳐 갔던 길드 중 던전 브레이커라는 곳이 있었다.
첫 번째 재앙 이후에 작게 시작한 길드였는데, 빠르게 성장해서 나중에는 다른 거대 길드와 대기업들을 위협할 정도로 강해졌다.
강하진이 들어간 건 중간쯤 성장했을 때였는데, 당시 길드를 운영하고 있던 사람이 바로 윤경민, 지금 찾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길드 마스터가 위험한 던전을 공략하다가 길드원들과 함께 전멸하는 바람에 던전 브레이커가 망한 상황에서도 길드를 다시 위로 올릴 준비를 했다.
심지어 아주 성공적이었다.
제영 그룹과 태산, 그리고 각성자 관리청이 손을 잡고 조직적으로 방해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쨌든 이제 그런 미래는 없다.
제영 그룹도 회귀 전과는 달리 한국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재벌이 되지 못할 테고, 태산 역시 그저 그런 조직폭력배에 불과할 것이며, 그 둘이 없이는 각성자 관리청도 나서지 못할 테니까.
‘뭐, 그 전에 윤경민이 던전 브레이커에 갈 일이 없겠지만.’
강하진은 옛날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윤경민은 말이 산골 마을이지 사실상 마을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산기슭에 허름한 나무집을 지어놓고 살았는데, 겨울에는 말 그대로 살이 에이는 듯한 추위를 견뎌야 했다.
윤경민은 그렇게 산에서 살다가 첫 번째 재앙을 겪으면서 간신히 살아남아 서울로 상경한다.
그리고 그때 운 좋게 던전 브레이커의 길드 마스터를 만나게 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던전 브레이커 쪽의 운이 좋은 거였지만 말이다.
강하진은 한참을 걷고 나서야 윤경민이 사는 집에 도착했다. 아니, 집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윤경민은 집앞 평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강하진이 계속 그쪽으로 걸어가자, 윤경민이 책에서 눈을 떼 강하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강하진이 윤경민 앞에 도착했다.
“누구십니까?”
윤경민의 물음에 강하진이 미리 준비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강하진이라고 합니다.”
윤경민은 의아한 표정으로 강하진이 건넨 명함을 확인했다.
“가디언스······ 길드 마스터?”
“네. 길드 가디언스의 마스터입니다. 당신을 스카웃하러 왔습니다.”
“예? 저를요? 길드에서?”
윤경민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길드라면······ 각성자들이 모여서 던전에서 사냥도 하고 그런 단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럼 잘못 알고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만······ 전 각성자가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윤경민 씨의 운영 능력입니다.”
“우, 운영이요? 전 그쪽도 별 재능이 없는데요? 아니, 재능이고 뭐고 사업 한 번 말아먹은 것 말고는 경험이 아예 없는데······.”
“있습니다. 그러니 절 믿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우리 길드가 아직 인원은 별로 안 되는데, 제법 괜찮거든요.”
“아니, 전······.”
윤경민의 말을 강하진이 뚝 끊었다.
“이제 곧 겨울이 오겠군요. 여기, 겨울에는 좀 춥죠?”
“······ 좀이 아닙니다. 아주 춥습니다.”
추운 게 전부가 아니다. 눈이라도 내리면 아주 그냥 끝장이다.
윤경민은 작년 겨울의 암담한 기억이 떠올라 표정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금년은 작년보다 더 춥다던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조건은 어떻게 됩니까?”
강하진이 씨익 웃었다. 좋은 인재를 추운 겨울 덕분에 아주 쉽게 얻었다.
“아마 어딜 가도 받기 어려운 조건일 겁니다.”
자그마치 지구에서 던전을 없애버릴 길드를 운영하게 될 테니까.
가디언스는 회귀 전 강하진이 속해 있던 팀의 이름이었다.
강하진은 이번엔 똑같은 이름의 길드로 던전과의 전쟁을 종식시킬 작정이었다.
* * *
윤경민은 강하진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다는 거네요?”
“아니죠. 이제 곧 다 생길 겁니다. 윤경민 씨가 그렇게 할 테니까요.”
윤경민의 얼굴에 속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설마 달랑 명함만, 그것도 길드 마스터인 강하진의 명함만 있고 아무것도 없을 줄은 몰랐으니까.
심지어 길드 신청도 안 했고, 길드의 근거지로 쓸 사무실도 구하지 않은 상태였다.
“어······ 자금은 있으시죠? 길드 창설하려면 등록비 5억, 그리고 보증금 10억이 필요합니다.”
“길드 등록하려면 근거지부터 마련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일단 건물부터 사죠.”
강하진은 그렇게 말하며 윤경민에게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윤경민은 얼결에 통장을 받아 내역을 확인했다.
“헉!”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통장에는 무려 500억이 들어 있었다.
“이, 이게 정말 길드에서 쓸 자금입니까?”
“왜요? 너무 적습니까?”
윤경민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적다니! 무려 500억인데!
“일단 그걸로 건물부터 적당한 걸로 하나 사세요. 위치는 아무데나 상관없는데 되도록 종로에서 가까우면 좋겠네요.”
강하진은 정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사실 500억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강하진 입장에서는 별 거 아니었다.
레모노의 송곳니를 팔아서 번 돈만 해도 벌써 800억이 넘었고, 향후 강하진이 벌일 사업들을 생각하면 500억은 푼돈에 불과했다.
아공간 사업을 시작하면 당장 떼돈을 벌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윤경민은 정말 중요한 인재였다. 앞으로 강하진이 벌일 모든 사업의 중심을 잘 잡아주고 운영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건물에는 공방도 있어야 하니까 고려해서 구입하세요. 길드원의 수는 아직 스물이 안 되지만 차근차근 늘려서 최소 백 명은 넘길 예정이니까 그것도 고려하십시오. 돈 모자라면 말씀하시고요.”
“어······ 알겠습니다. 한데 얼마까지 더 쓰실 수 있는지······.”
“얼마든지요. 천억이든 2천억이든 상관없습니다.”
윤경민이 멍하니 강하진을 바라봤다. 그렇게 돈이 많은데 왜 굳이 길드를 만들고 던전에 들어가 위험한 짓을 하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길드, 꼭 만드셔야 하는 겁니까?”
윤경민의 물음에 강하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윤경민이 얼른 말을 이었다.
“그 정도 돈이면 얼마든지 다른 일을 해서 훨씬 안전하게 큰돈을 벌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각성자라고 해도 던전은 위험한 곳 아닙니까.”
강하진은 그 말에 빙긋 웃었다.
“제 목표는 이 세상에서 던전을 모두 없애는 겁니다. 지금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미리 알고 계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해드리는 겁니다.”
윤경민은 멍하니 강하진을 바라봤다. 그러면서 자신이 아마 평생 지었던 모든 표정 중 가장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